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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의 후반 단락.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추모 문집(『정거장에서의 충고』)에서 한 평론가는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를 청춘의 객기 정도로, 정직한 진술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지나치게 정직한 말은 거짓처럼 보이는 법일까.
1박 2일의 워크샵. 아름다운 곳이었다. 운악산 자락엔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고 그 아래엔 샛강이 흐르고 있더라. 풍광을 보려 무심코 앉은 나무 벤치. 나무 두 그루. 하나는 잎을 모두 떨구고 죽은 듯했고, 나란히 선 다른 이는 여전히 초록빛 이파리로 풍성했다. 약간은 기이하게 느끼며 나는 이 벤치에 앉았을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생각했다. 흐르는 것은 강물만이 아니었고 나는 곧 헤어질 것들만 사랑했더라.
오늘도 그랬다.
나는 할 수 없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나의 내부에 감추어져 있는 목표를 끄집어 내어, 내 앞에다 확실히 그려보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교수나 법관, 의사나 예술가가 되려고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그것을 이루려면 얼마만한 기간이 필요하고 거기엔 어떤 현실적인 이점이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나도 역시 그런 직업을 갖게 될 것이겠지만, 지금의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나 역시 몇 년을 찾고 또 찾아 왔지만 된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어떠한 목표에도 도달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나도 역시 어떠한 목표에 도달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정말 난처하고 위험스러우며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원했던 것, 바로 그것대로 살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은 왜 그리도 어려웠을까? (p.427)
ㅡ 헤르만 헤세,「데미안」,『지와 사랑ㆍ데미안』(문화광장) |
기쁨과 흥분의 반대는 슬픔과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과 흥분이 없는 상태ㅡ지루한 무감각 상태ㅡ다. 많은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긍정적인 감정의 양으로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의 양을 알 수 없다. 한 사람의 긍정적인 감정의 양과 부정적인 감정의 양은 서로 독립적이며, 아무런 관계가 없다. (p.114)
신경성 수치가 높은 사람은 신경성 수치가 낮은 사람보다 일상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신경성은 부정적인 감정시스템의 반응성(반응 정도)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감정이란 무엇인가? 공포, 걱정, 모욕감, 죄책감, 혐오, 슬픔 등의 감정으로, 이런 감정을 경험하면 불쾌하며, 이 불쾌감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하나의 설계특징이 된다. 긍정적인 감정이 존재하는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좋은 것을 추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면, 부정적인 감정이 만들어진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먼 조상 때부터 나빴던 것을 피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 (p.135) 신경증은 일관성이 있고 항구적인 하나의 특성인 반면, 우울증은 어떤 때는 발병하지만 어떤 때는 발병하지 않는 하나의 질병이다. 그러나 우울증은 재발하는 경향이 강하다. …부정적인 사건에 대한 우리의 반응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유전된 기질이며, 우울증은 우리의 성격과 우리에게 벌어진 일이 상호작용한 결과… (pp.143~145) 수전의 글에는 일인칭 대명사가 많았고, 그 일인칭 대명사는 고통을 의미하는 동사와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전형적으로 신경성 수치가 높은 사람의 글쓰기 방식이다. 신경성 수치가 높은 사람은 자신이 제대로 살아왔는지, 또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 끊임없이 걱정하며 궁금해한다. 잘못된 인생경로를 갈 위험도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이 탐지해내야 하는 위험 중 하나다. 따라서 부정적인 감정이 활성화되면 우리는 우리가 택한 삶의 경로에 대해 계속 의심하게 될 것이다. 경계성 인격장애는 높은 신경성을 특징으로 한다. 경계성 인격장애는 삶과 개인적 목표의 불안정을 주 증상으로 하며, 만성적인 자괴감이나 공허함도 수반한다. 삶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새로운 그러나 종종은 비현실적인 계획을 많이 세우고, 짧은 그리고 종종은 부적절한 결혼을 여러 번 한다. 그 이유는 자신에 대한, 자신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하는 것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가치에 대한 만성적인 회의 때문이다. …신경성 수치가 높은 사람들은 “불면증 환자가 편히 잠들 수 있는 자세를 찾으려고 계속 뒤척거리는 것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 규정하려고 한다.” (pp.146~149) …실제로 연구를 해본 결과 공유환경이 성격에 미친 영향은 0이었다. 공유환경이 성격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는 같은 가정에서 자란 입양형제들 간의 성격이 동일 모집단에서 무작위로 선택한 두 타인 간의 성격만큼이나 다르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공유환경인 부모의 성격은 (유전적인 영향 말고는) 자녀의 성격에 여하한의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양육방식도 아이의 성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부모의 식습관, 흡연, 가족 규모, 교육, 인생철학, 성적 취향, 결혼상태, 이혼, 재혼 등도 아이의 성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심란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이혼한 부모의 자녀들도 성인이 된 후 이혼할 가능성이 높고, 어린 시절 부모의 폭력을 경험한 사람이 자라서 더 폭력적이 된다는 연구결과는 어찌된 것인가? 결론을 말하자면, 이런 연구들도 환경적인 영향이 아니라 유전적 영향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경성이 높은 사람은 우울증과 이혼의 가능성이 일반인들보다 높고 그들 자녀도 그럴 가능성이 더 높은데, 그것은 자녀들이 부모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 애당초 부모를 그런 사람으로 만든 유전자 변형체를 자녀들이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녀의 유사성, 그리고 양육행태와 성인이 된 후 자식의 행태도 유전적 영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pp.246~248) ㅡ 대니얼 네틀,『성격의 탄생』(와이즈북) |
“세상 그 누구도 자기 인생을 책임질 필요가 없어. 너는 이미 온전히 너의 삶을 살고 있는 거야.”라고 무책임하게 말하자, 살고 싶어졌다. 영 미친놈 같다.
엄마는 순교자 같이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떠나온 곳에서 시작하는 거야. 이 모든 게 나쁜 꿈이었던 듯이 행동하자꾸나.” 나쁜 꿈. 벨자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죽은 아기처럼 텅 비고 멈춰버린 사람에게 세상은 그 자체가 나쁜 꿈인 것을. 나쁜 꿈. 난 모든 걸 기억했다. 해부용 시신, 도린, 무화과 이야기, 마르코의 다이아몬드, 광장에서 만난 해병, 닥터 고든 병원의 사시 간호사, 깨진 체온계, 두 종류의 콩 요리를 갖다 준 흑인, 인슐린 투약으로 9킬로그램이 늘어버린 체중, 하늘과 바다 사이에 회색 두개골처럼 튀어나온 바위. 어쩌면 친절한 눈처럼 망각은 그것들을 무감하게 하고 덮어버리리라. 하지만 그것들은 나의 일부였다. 그것들은 나의 풍경이었다. ㅡ 실비아 플라스,『벨자』(문예출판사), p.289 |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요, 두근, 두근. 말할 때마다 퍼지던 이름 모를 샴푸의 꽃내음. 네가 들어주지 않았다면, 난 살아 있는지도 몰랐을 거야. 유난히 햐앟게 보이던 가르마. 라일락꽃. 나쁜 꿈. 사라진 기분. 우울도 절망도 뭣도 아닌, 그저 순수하고 명징한 의미에서, 죽음.
니체의 말,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가 얼마나 숨막히게 무서운 말인가를 느낀다. 온갖 싫은 일들, 너저분하고 후줄그레한 일들, 시시하고 따분한 일들이 깔려 있는 운명의 아스팔트지만 이 길이 끝이 안 났으면 하는, 또는 또 한번 하는 의욕은 실로 무겁고 기름진 삶의 욕구의 사고일 것이다. ㅡ 전혜린,「10월 13일」부분,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p.193 |
차갑고 작은 손, 잡고 싶어.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을 보니까 아무 것도 안 되는 거야. 삶보다 죽음을, 만남보다 이별을, 사랑보다 두려움을. 낙서로 엉망진창인 스케치북을 들여다보면서 무슨 그림을 그리려고 했던가 고민해서는 안 돼. 끝에서 끝으로 달리는 꼴이니까. 한 장을 뜯어내고 다시 시작하는 무모함이 필요해ㅡ
그러나,
“이미 하도 찢어버려서… 덧칠에 덧칠을 더해 검게 눅어버린, 이게 제가 가진 마지막 한 장이랍니다.”
만일 수영을 배우지 않은 사람에게 헤엄을 치라고 명령하는 이가 있다면 누구든 무리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일 달리기를 배우지 않은 사람에게 뛰라고 명령하는 이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억지 소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끊임없이 받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인생에 대처하는 법을 배웠던가? 그런데도 그곳에서 나오는 길로 무턱대고 거대한 경기장 같은 인생에 발을 들이밀어야 한다. 물론 수영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제대로 헤엄을 칠 수 있을 리 없고, 마찬가지로 달리기를 배우지 않은 사람도 대개는 다른 사람 뒤에 처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상처 없이 인생의 경기장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리 없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앞서 간 사람들의 자취를 보면 된다. 거기에 우리의 모범이 있다”라고. 그러나 백 명의 수영 선수, 천 명의 달리기 선수를 쳐다본다 해도 곧바로 수영을 할 줄 알고 달리기를 잘하게 되는 건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수영 선수라는 이들도 모두가 물을 들이켰고, 또한 달리기 선수라는 이들도 모두 경기장의 흙에 범벅이 되어 있다. 보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들조차 대개는 의기양양한 미소의 뒤편에 떨떠름한 얼굴을 감추고 있지 않은가.
인생은 광인(狂人)의 주최로 벌어지는 올림픽 대회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인생과 직접 싸우면서 인생과의 전투를 배워 나가야 한다. 이 너무도 어리석은 게임에 분개를 금할 수 없는 사람은 일찌감치 장외로 나가는 게 좋다. 자살도 분명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인생의 경기장에서 버티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상처를 두려워하지 말고 싸워 나가야 한다.
인생은 한 갑의 성냥과도 같다. 소중하게 다루자니 아무래도 바보 짓만 같다. 그렇다고 소중하게 다루지 않았다가는 몹시 위험하다.
ㅡ아쿠타가와 류노스케,「난쟁이 어릿광대의 말」,『라쇼몽』(좋은생각), pp.333-334 |
인간의 運命은 악마가 정하지. 대신 神은 인간에게 개와 잠을 주셨단다….
금요일 저녁 아홉 시부터 잠에 들어서 토요일 아침 여섯 시에 눈을 떴다. 얼굴을 씻고 밥을 먹고 누웠다가 다시 잠에 들어서 오후 세 시에 눈을 떴다. 유일하게 붕붕이만이, 줄곧 내 머리맡이나 발끝에 웅크린 채 같이 자줬다. 코까지 골면서. 너는 내 곁에 머무는 처음이자 마지막 존재가 될 거야, 라고 속삭여 본다. 너무 유치했는지, 이 녀석, 쳐다보지도 않는다.
올해도 누군가는 조용히 사랑을 시작했고, 누군가는 조용히 사랑을 단념했다. 그 둘을 한꺼번에 해버린 누군가도 있었을 게다. 한 사람을 포기하면서 사랑 그 자체도 함께 처분해버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사람을 단념하면서 다른 사람을 향해 다시 사랑을 싹틔운 이 또한 있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실망하고, 누군가는 절망하고, 누군가는 그래도 살만하다면서 야근 따위에 열중하고, 어딘가에선 썩은 내가 진동한다. 아, 그러나, 잠들기 시작하면 이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를 찍어줘, 라고 말하는 내 등을 보고 한 사람이 서 있다. 왼손에는 도끼 자루를, 다른 손에는 사진기를 쥐고. 자, 이제, 내가 셋을 셀께, 그리고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께. 자, 하나, 둘…
맛있는 거 줄까?
붕붕이가 꼬리를 흔든다.
너는 내 곁에 머무는 처음이자 마지막 존재가 될 거야.
근데 나는 왜 꼬리가 없을까?
모든 약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의 결정들은 갑작스럽고 터무니 없이 확고하다. ㅡ 알베르 까뮈,『작가수첩2』 |
살아남고, 사랑할 것이다.
하루종일 앉은 채로 울컥거렸다. 네 화난 눈도 무서웠다. 한 사람의 인생을 알아가는 건 그렇게 괴로운 일이다. 왜 굳이 나를 읽으려 하는지. 사실은, 내가 너를 선택한지도 모르지만.
너무 오랫동안 파묻혀 곰삭아버린 슬픔들. 기어코 물기를 짜내겠다고 쉼없이 뒤틀리는 마른 걸레. 보아라 놀랍게도, 썩은 채 고인 물은 바닥으로 스며들고 마른 걸레에서는 검은 물방울이 떨어진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사랑해야, 살 수 있다.
그러나, 답답한 마음은 가시질 않네. 그 순간 최고의 선택이라 믿었던 것들이 결국 아쉬움이란 흉터로 남아서 이미 사라져버린 아픔을 강박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후회는 아픔보다 더 악마적이다. 고통을 좋아하는 가련한.
그런데 그 뒤 누나가 흘린 눈물은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얄궂게도 일본에 두고 온 약혼자도, 애절하게 사랑을 고백했던 그 젊은이도 둘다 맺어지지 못했다.
평생 혼자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누나는 나중에야 평범한 철도원 아저씨와 결혼을 했다. 사람들의 운명은 그렇게 뒤죽박죽이 된 것이다.
누나는 평생을 살면서 아마 모르긴 해도 이루지 못한 두 남자를 때때로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 했을 것이다. 다행인지 누나는 빨갱이였던 애인 둘은 잃었지만 다른 많은 여인들처럼 생과부 신세는 면했기에 자식들을 낳고 그런 대로 평생을 살았다.
ㅡ 권정생,「아홉 살 해방의 기억들」,『우리들의 하느님』, p.246 |
1. 스스로에게도, 서로에게도 자신이 없는 거지. 너 아니면 안 돼, 라고 할 사람을 기다리다 늙어버린 아이들. 유치한 외면. 상처 받기 보다는 그리움이란 껍데기 몇 장씩 곱씹으면서 살아가는 게 쉬우니까. 이 사람이 아니면, 뭐, 다른 사람. 적절한 시간과 공간에서 관계를 맺게 된다면, 결국 아무에게든 끌리는 거 아니겠니? 아아ㅡ 절망. 절망. 경악.
“사람들은 평생 동안 좋은 일이 생기기를 희망하며 살지. 그러나 좋은 것에는 나쁜 것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우주의 법이 그러한데 그걸 몰라. 그래서 나쁜 일이 일어나면 놀라고 고통스러워 하지. 평생 좋은 것을 좇고 나쁜 것을 피하느라 돌고 도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ㅡ 만공 선사,「좋은 것들」,『부처를 쏴라』, p.112 |
2. 모래알 만큼의 아픔도 느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탓에, 아주 사소한 행복마저도 잃어버린 거야. 그러자 행복이 없음을 불행이라 여긴거지. 그래, 나는 어느 한구석 아픈 곳이 없더구나. 눈물이 마른 게 아니라 흘릴 아픔이 없었어. 편안하게 절망했던 거야.
실은 그때 나는 새빨간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한 구실을 붙여 서양행을 거절한 것이다. 그 여자 때문에 나중에 무척 고생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서양에 가기보다 가난하고 바보 같은 여자와 고생하는 편이 인간적 사업으로 어렵기도 하고, 또한 영광스런 일이라고까지 생각하기 때문이다.
ㅡ 다자이 오사무,『나의 소소한 일상』, p.285 |
이렇게 늦게 어둠 속의 바람을 가르며 말을 달리는 자는 누구일까?
그것은 아이를 따뜻하게 품에 안고 말을 타고 달리는 아버지다.
ㅡ 아가, 너는 무엇이 그리 무서워 얼굴을 가리느냐? ㅡ 아버지, 아버지는 마왕이 보이지 않습니까? 관을 쓰고 긴 옷을 늘어뜨린 마왕이…
ㅡ 귀여운 아가, 이리 오너라. 재미있는 놀이를 하자. 저곳에 아름다운 꽃이 많이 피어 있고 또 너의 어머니는 많은 금으로 된 옷을 가지고 있다. ㅡ 아버지, 아버지는 들리지 않습니까? 마왕이 귀여운 소리로 속삭이고 있는 것이… ㅡ 가만히 있거라 아가. 걱정하지 말아라. 마른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다.
ㅡ 귀여운 아가. 나와 같이 가자. 소녀들이 너를 즐겁게 해 주리라. 밤에 춤추는 데 가서 즐겁게 해 줄테니… ㅡ 아버지, 아버지, 저 어두운 곳에 마왕의 소녀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ㅡ 아가. 아가. 아무 것도 아니란다. 그것은 잿빛의 오래된 버드나무란다.
ㅡ 나는 네가 제일 좋다. 자, 오라. 내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억지로 끌고 가겠다. ㅡ 아버지, 아버지, 지금 마왕이 나를 잡아요. 마왕이 나를 심하게 해요. 아버지는 무서워서 급히 말을 달린다. 팔에는 떨면서 신음하는 아이를 안고서… 지쳐 집에 도착했을 땐 사랑하는 아들은 품에서 이미 죽어 있었다.
ㅡ「마왕」, 슈베르트ㆍ괴테 |
지난 주. 미친듯이 흔들리는 창문 소리에 잠에서 깨니 붕붕이가 내 옆구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채 겁먹은 눈이다. 깜빡임조차 없는 까만 눈. 무언가 쓰러지고 깨지는 소리가 창밖에서 날 때마다 바짝바짝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창틈으로 파고드는 바람은 귀신 소리를 냈고. 괴테의 마왕이 생각났다. “사랑하는 아들은 품에서 이미 죽어 있었다.” 나는 왼손을 뻗어 붕붕이를 끌어안았다.
모든 게 날려가던 그날. 누가 누굴 위해 옆에 있어준 걸까... 누가 누굴 안았던 걸까.
아침에 일하러 갈 때 피곤하면 종종 들러 커피를 사가는 지하철역 커피점. 적게는 둘, 많게는 셋이 일하는데 커피를 따라주는 사람은 같다. 약간은 펑퍼짐한 얼굴과 쌍꺼풀 없는 작은 눈, 새침한 인상. 근데 오늘 그 여자, 눈화장 한 걸 처음 봤다. 까맣게...
기억할 만한 지나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