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5년간 쓴 안경을 새로 맞추러 갔을 때, 딱히 쓰고 싶은 게 없어서 안경사가 골라 주는 걸 샀다. 15년간 똑같은 동네 미용실을 다닌 나는, 언제나 아줌마가 깎아주는 대로 깎인다. 길게요, 혹은 짧게요, 외엔 말이 없다. 어째 좀 커보이던 안경이 이젠 얼굴에 맞는 듯싶고, 어째 좀 어색했던 머리 스타일이 이젠 이 머리 아니면 안 될 것만 같다. 옷도 마찬가지. 거의 옷 사는 일이 없어서, 가족 가운데 누군가 언젠가 사다 놓은 것들을 멋대로 꺼내 입는 쪽이다. 처음엔 이상해 보이는 옷도 입다 보면 딱 내 몸에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사회에 나를 맞춰가는 일은 왜 그렇게 되지도 않고 짜증나는지, 적절한 기회만 주어지면 어디로든 도피하고 싶다. 아니, 집에만 누워 있고 싶다. 그러나, 그러지 못해서 멍청이처럼 끙끙거리며 살아내고 있는 게 아닌가. 몇 달 간을 버틸 정도의 돈이 모였다. 또 어떤 허무맹랑한 망상에 빠져서 잠적해버릴지. …아니면 이를 꽉, 물고 눈에 힘을 빡, 주고 “그저 막연한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낼런지.
ㅡ 비가 내리는 이유는 중력이 끌어내리기 때문입니다. 중력, 다른 말로 운명, 이란 뜻이죠.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건,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당하는 겁니다. 하늘도 모르게 구름도 모르게. 아시겠죠? ㅡ 아닙니다. 아니예요. 중력은 말이죠, 음… 중력은 물리학 교과서를 보면 말이죠, 음… 서로, 그러니까 서로가 끌어당기는 거지요. 다만 땅의 질량이 더 크기 때문에 비 쪽의 가속도가… ㅡ 아, 한쪽의 사랑이 지나치게 크면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다, 그겁니까? ㅡ 神께선 당신을,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사랑하시죠. 음… 이해가 안 되신다면, 당신이 관심없는 척하며 괴롭혔던 그 옛날 첫사랑을 떠올려 보세요. ㅡ 저는 사랑하는 대상을 죽여버리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ㅡ 음… 사랑이 아니었군요.
동면하고 싶다. 그러나 깨어난 뒤 되살아날 불안이…
만일 수영을 배우지 않은 사람에게 헤엄을 치라고 명령하는 이가 있다면 누구든 무리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일 달리기를 배우지 않은 사람에게 뛰라고 명령하는 이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억지 소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끊임없이 받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인생에 대처하는 법을 배웠던가? 그런데도 그곳에서 나오는 길로 무턱대고 거대한 경기장 같은 인생에 발을 들이밀어야 한다. 물론 수영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제대로 헤엄을 칠 수 있을 리 없고, 마찬가지로 달리기를 배우지 않은 사람도 대개는 다른 사람 뒤에 처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상처 없이 인생의 경기장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리 없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앞서 간 사람들의 자취를 보면 된다. 거기에 우리의 모범이 있다”라고. 그러나 백 명의 수영 선수, 천 명의 달리기 선수를 쳐다본다 해도 곧바로 수영을 할 줄 알고 달리기를 잘하게 되는 건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수영 선수라는 이들도 모두가 물을 들이켰고, 또한 달리기 선수라는 이들도 모두 경기장의 흙에 범벅이 되어 있다. 보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들조차 대개는 의기양양한 미소의 뒤편에 떨떠름한 얼굴을 감추고 있지 않은가.
인생은 광인(狂人)의 주최로 벌어지는 올림픽 대회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인생과 직접 싸우면서 인생과의 전투를 배워 나가야 한다. 이 너무도 어리석은 게임에 분개를 금할 수 없는 사람은 일찌감치 장외로 나가는 게 좋다. 자살도 분명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인생의 경기장에서 버티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상처를 두려워하지 말고 싸워 나가야 한다.
인생은 한 갑의 성냥과도 같다. 소중하게 다루자니 아무래도 바보 짓만 같다. 그렇다고 소중하게 다루지 않았다가는 몹시 위험하다.
ㅡ아쿠타가와 류노스케,「난쟁이 어릿광대의 말」,『라쇼몽』(좋은생각), pp.333-334 |
이봐, 아쿠타가와. 난, 싸우기는 싫어. 너처럼 죽지도 못하고 말이지. 그리고 죽어서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요즘엔 다들 라이터를 써. 혹시나 터지면 손해배상도 해줘. 스파크가 튈 때마다 기대하는데 로또보다 어려워 보이네. 뭐, 너야 더 이상 상관없겠지만.
TAGS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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