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단박에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챘다. 그 유태인 할망구가 그렇게 황홀해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무척 놀라는 것 같더니 곧 행복에 빠져들었다. 마치 천국에 있는 듯 보여서 나는 아줌마가 다시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될까봐 두렵기까지 했다. 나는 마약에 대해서는 침을 뱉어주고 싶을 정도로 경멸한다. 마약 주사를 맞은 녀석들은 모두 행복에 익숙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하긴 오죽이나 간절했으면 주사를 맞았을까만은 그 따위 생각을 가진 녀석은 정말 바보 천치다. 나는 절대로 꼬임에 넘어가지 않는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몇 차례 마리화나를 피운 적은 있지만, 그래도 열 살이란 나이는 아직 어른들로부터 이것저것 배워야 할 나이다. 아무튼 나는 그런 식으로 행복해지기보다는 그냥 이대로 사는 게 더 좋다. 행복이란 놈은 요물이며 고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놈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어차피 녀석은 내 편이 아니니까 난 신경도 안 쓴다. 나는 아직 정치를 잘 모르지만, 그것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득이 되는 것이라고 들었다. 행복을 찾는답시고 천치짓을 하는 녀석들을 막을 법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주절거리는 것뿐이다.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고, 하지만 나는 이제 행복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그러다가 또 발작을 일으키면 큰일이니까. 그런데 하밀 할아버지는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을 찾아야 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 바로 거기에 그것이 있다고 말했다. ㅡ pp.99~100 “두려워할 거 없어” 그걸 말이라고 하나. 사실 말이지 ‘두려워할 거 없다’라는 말처럼 얄팍한 속임수도 없다. 하밀 할아버지는 두려움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믿을 만한 동맹군이며 두려움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의 오랜 경험을 믿으라고 했다. 하밀 할아버지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메카에까지 다녀왔다. “너 같은 어린애가 거리에서 혼자 돌아다니면 못 써.” 나는 웃음을 떠뜨렸다. 정말로 웃기는 얘기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뭘 가르쳐주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넌 정말 내가 본 아이들 중 제일 예쁘구나.” “당신도 멋져요.” 그녀가 미소지었다. “고맙다, 얘야.”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갑자기 내 속에서 희망 같은 게 솟았다. 당장 내가 따로 살 곳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로자 아줌마가 살아 있는 한 아줌마를 버리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조만간 닥쳐올 미래를 생각해두어야 했다. 나는 밤마다 미래를 꿈꾸곤 했다. 누군가와 바닷가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꿈,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어떤 사람. 그렇다. 나는 가끔 로자 아줌마를 배신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죽고 싶어질 때 머릿속으로 그랬을 뿐이다. 나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희망이란 것에는 항상 대단한 힘이 있다. 로자 아줌마나 하밀 할아버지 같은 노인들에게조차도 그것은 큰 힘이 된다. 미칠 노릇이다. 그러나 그녀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사람이 아무런 대가 없이 행동을 할 때도 있으니까. 그녀는 내게 말을 건네고, 희망을 일깨우고, 친절한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한숨지으며 떠났다. 나쁜 년. ㅡ pp.108~109 ㅡ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
사람들이 쉼 없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용케 자리 잡았나 싶어 대견하더니 제 목숨을 굳건히 지키고 마침내 꽃봉오리를 내밀 때가 되었나 보다. 또 그렇게 꽃을 피우고, 마침내 모든 것을 털어버린 채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살아나기 위해 모든 것을 이겨낸 다음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들은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살아가는 것에 열중한다. 자연의 섭리는 원래 그렇게 되어 있다.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노력하지 않는 식물은 하나도 없다. 노력하지 않는 식물은 생존을 쟁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노력’이나 ‘열심히 산다’는 말을 자신과는 거리가 먼 특별한 일처럼 생각해버리곤 한다. 성공하기 위해서만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기 위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노력으로 일해야 한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자,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섭리다. ㅡ 이나모리 가즈오,『왜 일하는가』, pp.108~109 |
진짜 환멸이란 그런 적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저 멍할 뿐이다. 자살. 오늘 아침은 차분하게 자살을 생각했다. 진짜 환멸은 인간을 흐리멍덩해지게 하거나 자살하게 만드는 무서운 마귀와 같아. 확실히 나는 환멸을 느끼고 있다. 부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살아있는 최후의 단 하나의 길에 환멸을 느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세상이 바보 같은 게 아니라 세상에 살면서 노력하고 있는 내가 바보 같아지는 것이다. 암흑 속에서 혼자 하하하, 하고 웃고 싶은 기분이다. 세상에 이상 따위 있을 리 없다. 모두 초라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역시 먹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무미건조한 이야기다. ㅡ 다자이 오사무,『정의와 미소』, pp.184~185 X. “나는 적어도 본래적으로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오. 내 속에는 어떤 공허가, 어떤 무시무시한 사막이 있어요.” 마치 인간에게는 타락과 벌 사이의 절대적 선택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듯이. C의 친구. “우리는 우리가 스무 살 때 자기 가슴에 쏜 총알을 맞고 마흔 살에 죽을 것이다.” ㅡ 알베르 까뮈,『작가수첩2』, pp.258~307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열망들을 이루지 못한 채 몇십 년 동안이나 품고만 지냈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실패했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럴 때, 부정적 의미의 환멸로부터 구원이 필요하다. 우리가 환상과 더불어 열광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현실과 직면하지 않으려고 환상 속에 안주할 수도 있다. 나는 카뮈도 생각한다. 해방 후에 한때 우리는《콩바(Combat)》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다. 그는 모든 일에 성실했다.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어린아이들을 저렇게 고통받도록 내버려두는 하느님에게 나의 믿음을 바칠 수 없다.” 본질적으로 카뮈는 부정적 의미의 ‘환멸을 느낀 자’였다. 그것은 그에게 통찰력과 너그러운 마음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자신을 열광적인 환멸로 인도할 유일한 길인 희망을 끝내 찾지 못했다. 인간의 삶은 희망과 절망, 빛과 어두움이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샤를 보들레르가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쓴 비극적 외침이 생각난다. ‘나는 한밤중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숲속에서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여행자와 같아. 그런데 저 멀리서 불빛이 보인다. 아마도 산지기가 잠자리에 들려고 집으로 돌아가 촛불을 켠 것이리라. 이젠 살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게 되자 모든 게 간단해졌다. 그런데 잠시 후 산지기가 불을 꺼버린다. 나는 다시 길을 잃고 만다. 희망이라곤 없다.’ 이 편지는 내가 자주 떠올리곤 하는 다음의 시 구절과 더불어 끝이 난다. ‘악마가 여인숙 창문의 불을 모두 꺼버렸네.’ ㅡ 피에르 신부, 『단순한 기쁨』, pp.54~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