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5
미국 대륙을 뒤덮은 히피사상이 순수에서 출발해서 하나의 관습으로 정착되는 가운데 자연적인 생활만 낳은 것은 아니었다. 나체촌에서 환각제 복용, 노동기피등 향락추구로 방향을 뒤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정표 없는 사상운동은 필수적으로 인생에 대한 회의와 맹목적인 삶의 습관을 낳고 있었는데 그때 미국에 들어온 것이 인도의 요가였다. 그 요가는 현실도피와 향락추구의 삶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행원스님은 미국에 첫발을 들여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요가란 것도 한계가 있었다. 무엇이 지극히 옳은 것인지, 그러니까 무엇이 진리인지를 극명하게 심어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히피사회에 또 하나의 바람으로 불고 있었다는 것이 행원스님의 느낌이었다.
뚜렷한 목적이 없는 것은 미국인들의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이다. 미국에는 다시 선(禪)이라는 불교의 수행법이 관심사로 떠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선이란 것은 지극히 일본식입니다.”
이 말을 들은 행원스님은 이미 미국에 일본의 승려들이 들어 와 선방을 열고 있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선에 관심있는 계층은 20~30대였다. 그러니까 미국의 방황하는 지성들은 인간본성의 의미를 찾는 일, 바로 깨달음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히피에서 요가로 다시 요가에서 선으로 관심의 방향타를 옮기고 있는 그들은 일본승려에게 선을 지도 받고 일본 서적을 통해 선을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LA에만해도 ‘마이즈니로시’ ‘사사끼로시’ ‘라차스드레고’ ‘갑블로시’ 등이 선사대접을 받고 있었다. 로시란 선사(禪師)의 뜻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선덕화 보살의 집에서 행원스님은 미국의 사정을 대충 얘기듣고 이곳에 한국 선이 자리잡지 않으면 끝내 요가와 일본선만이 불교인 것으로 오해될 것이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만난 김교수가 생각났다.
“그 교수의 심정도 이해가 가는군.”
스님은 혼자 중얼거리며 선덕화 보살의 집 2층 방에 일본에서 모셔간 부처님을 모셨다. 며칠이 지나자 주변의 교민들이 서너명 찾아와 부처님께 절을 하고 스님을 반겼다. 그리고 ‘절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래도 나는 석달정도 여행하러 온 사람일 뿐입니다.”
스님은 아직 선뜻 절을 세운다는 말을 하기가 이르다고 생각했다.
스님의 생각과는 달리 선덕화 보살의 이웃들은 꾸준히 부처님을 찾아왔고 그러다보니 그 작은 방은 법당이 되고 말았다.
행원스님은 선덕화 보살집에 거처를 둔 채 LA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LA라는 한 도시만 보고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스님은 나름대로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 많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어느날 스님은 필라델피아에 한국 스님이 절을 짓고 포교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가왔다. 그 스님은 서경보스님이고 절은 능인선원이라고했다.
“그 절에 한번 가보고 싶군요.”
LA의 이곳저곳을 둘러 본 스님은 시카고를 거쳐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는 다행히 아는 사람이 몇 있었다. 구영회, 유영수, 이계향씨가 그들이었는데, 그들도 스님을 보자바자 “미곳에 절을 만들자”며 서두르기 시작했다. 스님을 앞세워 아파트를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스님은 미국에 절을 세운다는 생각을 굳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계향씨의 동생과 그녀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대령출신으로 음악과 조각 고미술품에 관심이 많은 골동품상이었다. 그는 일본승려인 에이도와 친한 사이라고 했다.
“그 에이도 스님은 이곳에서 선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선방을 운영한다는 소리에 행원스님은 귀가 번쩍 열렸다. 그래서 그 선방에도 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방에는 50여명의 미국인과 한국인 일본인이 앉아서 참선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일본 스님이 이렇게 선방을 하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야.”
스님은 생각을 바꾸었다. 미국이라는 불교의 황무지에 한국 불교의 선이 자라나지 않으면 끝내 일본불교와 인도의 요가등이 이곳에서 불교의 전부인양 행세를 할 것이 뻔했고 그 생각이 들자 아찔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절을 세우고 선방을 열어야 겠다.”
행원스님은 보스톤으로 발길을 돌렸다. 민순기라는 신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스님 반갑습니다.”
“오랫만입니다. 잘 지내십니까.”
인사가 오가고 스님은 이미 결정된 이야기를 했다.
“미국에 선방을 열고 싶소. 절을 세우겠다는 것이지요. 교민들도 원하고 내가 먹물옷을 입고 여기까지 와서 꼭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서요.”
무슨 일이든 마음의 결단이 어려운 것이지 한 마음을 결정하면 나머지 일이란 일사천리로 풀려 나가게 마련이다. 행원스님도 미국 포교에 대한 발원을 하고 보니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았다. 스님은 재차 다짐했다.
“미국에 한국불교의 선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거두리라.”
미국 대륙을 뒤덮은 히피사상이 순수에서 출발해서 하나의 관습으로 정착되는 가운데 자연적인 생활만 낳은 것은 아니었다. 나체촌에서 환각제 복용, 노동기피등 향락추구로 방향을 뒤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정표 없는 사상운동은 필수적으로 인생에 대한 회의와 맹목적인 삶의 습관을 낳고 있었는데 그때 미국에 들어온 것이 인도의 요가였다. 그 요가는 현실도피와 향락추구의 삶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행원스님은 미국에 첫발을 들여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요가란 것도 한계가 있었다. 무엇이 지극히 옳은 것인지, 그러니까 무엇이 진리인지를 극명하게 심어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히피사회에 또 하나의 바람으로 불고 있었다는 것이 행원스님의 느낌이었다.
뚜렷한 목적이 없는 것은 미국인들의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이다. 미국에는 다시 선(禪)이라는 불교의 수행법이 관심사로 떠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선이란 것은 지극히 일본식입니다.”
이 말을 들은 행원스님은 이미 미국에 일본의 승려들이 들어 와 선방을 열고 있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선에 관심있는 계층은 20~30대였다. 그러니까 미국의 방황하는 지성들은 인간본성의 의미를 찾는 일, 바로 깨달음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히피에서 요가로 다시 요가에서 선으로 관심의 방향타를 옮기고 있는 그들은 일본승려에게 선을 지도 받고 일본 서적을 통해 선을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LA에만해도 ‘마이즈니로시’ ‘사사끼로시’ ‘라차스드레고’ ‘갑블로시’ 등이 선사대접을 받고 있었다. 로시란 선사(禪師)의 뜻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선덕화 보살의 집에서 행원스님은 미국의 사정을 대충 얘기듣고 이곳에 한국 선이 자리잡지 않으면 끝내 요가와 일본선만이 불교인 것으로 오해될 것이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만난 김교수가 생각났다.
“그 교수의 심정도 이해가 가는군.”
스님은 혼자 중얼거리며 선덕화 보살의 집 2층 방에 일본에서 모셔간 부처님을 모셨다. 며칠이 지나자 주변의 교민들이 서너명 찾아와 부처님께 절을 하고 스님을 반겼다. 그리고 ‘절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래도 나는 석달정도 여행하러 온 사람일 뿐입니다.”
스님은 아직 선뜻 절을 세운다는 말을 하기가 이르다고 생각했다.
스님의 생각과는 달리 선덕화 보살의 이웃들은 꾸준히 부처님을 찾아왔고 그러다보니 그 작은 방은 법당이 되고 말았다.
행원스님은 선덕화 보살집에 거처를 둔 채 LA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LA라는 한 도시만 보고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스님은 나름대로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 많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어느날 스님은 필라델피아에 한국 스님이 절을 짓고 포교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가왔다. 그 스님은 서경보스님이고 절은 능인선원이라고했다.
“그 절에 한번 가보고 싶군요.”
LA의 이곳저곳을 둘러 본 스님은 시카고를 거쳐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는 다행히 아는 사람이 몇 있었다. 구영회, 유영수, 이계향씨가 그들이었는데, 그들도 스님을 보자바자 “미곳에 절을 만들자”며 서두르기 시작했다. 스님을 앞세워 아파트를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스님은 미국에 절을 세운다는 생각을 굳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계향씨의 동생과 그녀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대령출신으로 음악과 조각 고미술품에 관심이 많은 골동품상이었다. 그는 일본승려인 에이도와 친한 사이라고 했다.
“그 에이도 스님은 이곳에서 선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선방을 운영한다는 소리에 행원스님은 귀가 번쩍 열렸다. 그래서 그 선방에도 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방에는 50여명의 미국인과 한국인 일본인이 앉아서 참선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일본 스님이 이렇게 선방을 하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야.”
스님은 생각을 바꾸었다. 미국이라는 불교의 황무지에 한국 불교의 선이 자라나지 않으면 끝내 일본불교와 인도의 요가등이 이곳에서 불교의 전부인양 행세를 할 것이 뻔했고 그 생각이 들자 아찔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절을 세우고 선방을 열어야 겠다.”
행원스님은 보스톤으로 발길을 돌렸다. 민순기라는 신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스님 반갑습니다.”
“오랫만입니다. 잘 지내십니까.”
인사가 오가고 스님은 이미 결정된 이야기를 했다.
“미국에 선방을 열고 싶소. 절을 세우겠다는 것이지요. 교민들도 원하고 내가 먹물옷을 입고 여기까지 와서 꼭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서요.”
무슨 일이든 마음의 결단이 어려운 것이지 한 마음을 결정하면 나머지 일이란 일사천리로 풀려 나가게 마련이다. 행원스님도 미국 포교에 대한 발원을 하고 보니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았다. 스님은 재차 다짐했다.
“미국에 한국불교의 선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거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