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여신도 시주로 ...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2



- 일 여신도 시주로 셋방법당 청산 홍법원 개설 -
- “조총련과 손잡았다”모함 남산의 조사 받기도 -

“행원스님 계세요”
“누구시요”
“저, 고바야시예요”
고바야시 보살은 행원스님을 찾아와 한국의 참선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참선을 배우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행원 스님의 일본 포교에 큰 도움을 주게 됐다. 그녀는 스스로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변의 친구들을 행원스님과 인연 지어주는데 적극적이었다.

어느날 고바야시보살이 두 명의 교포 여인을 데리고 왔다. 나까노상과 노야마상이 그들인데 그 두 한국 교포는 일본에서 한국 신도가 모이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사람들이 모이니 법회도 잘됐다. 참선이란 무엇인가. 왜 하는 것인가. 무엇을 구하는 것인가. 주로 참선과 관련한 주제로 법회를 이끌었다.

“스님, 이제 넓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신도들이 먼저 제의한 것이 큰 절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좋은 생각이지만 아직 경제력이 닿지 않으니 좁은대로 지냅시다. 법당이 크다고 수행이 잘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사람들이 편히 앉아 참선도 하고 법문도 들으려면 큰 곳으로 옮겨야 해요. 무슨 방법이 있을 겁니다”
노야마상이 나서서 큰 절로 옮기는 일을 추진해 보겠다더니 어느날 기분이 좋은 표정으로 스님을 찾아왔다.

“제 남편이 3백만엔을 내기로 했습니다. 이제 좀 큰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행원스님은 신도들의 성의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집을 옮기기로 했다. 이렇게해서 새롭게 전법의 터전을 잡은 곳은 동경의 문경구 충일이란 곳이었다. 고오라깽야구장 뒤편에 제법 큰 집이 하나 비어 있었는데 1천5백만엔이나 있어야 구할 수 있었다. 노야마상의 남편이 시주한 3백만엔을 한국은행에 넣고 1천5백만엔을 융자 받아 그 집을 인수했다. 일본으로 건너와 셋방법당을 청산하고 본격적으로 홍법원(弘法院)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은 수리할 곳이 많았다. 2층의 그 집은 상하 70평이었고 윗층의 다다미방 6개를 다 터서 법당으로 만드는데만 75만엔이 들었다. 수리비는 나까노 보살이 냈다.

어쨌거나 새로운 법당이 마련됐다. 어수선한 일본 불교에 본격적으로 한국 불교를 전파할 수 있는 중요한 법당이 생긴 것이다.

“다 여러분들의 덕분입니다. 이제 이 법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견성(見性)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행원스님은 신도들과 기쁨을 나누며 다시금 포교 사업의 힘겨움과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홍법원에서의 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신도들의 집을 찾아가 불공을 해주지 않으면 융자금을 갚을 길이 없었다. 홍법원에서는 참선법회를 계속 열어 갔으며 신도들도 늘어났지만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도 여러명 찾아 왔다. 인환스님(현 동국대 교수)이나 김지견법사(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이영자씨(현 동국대 교수)등이 홍법원에 인연을 맺어 유학생활을 했다. 그들은 행원 스님에게 있어 든든한 식구들이기도 했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의 불교는 귀족적인 것과 화려한 의식을 좋아했다. 그런 영향때문에 행원스님의 초기 전법은 어려움이 따랐지만 홍법원을 세운 뒤로는 독자적인 법회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홍법원이 안정되려 할 때쯤 행원스님은 매우 언짢은 모함을 받았다.


‘행원스님이 조총련으로부터 2천만엔을 받아서 일본에 절을 지었다’는 터무니 없는 모함이었다. 그것도 일본이 아닌 한국의 정보부에 그 모함이 직접
전달된 것이다.
당시 서울의 ‘남산’이라면 무서운 곳이었다. 군사정권 아래의 중앙정보부가 ‘남산’으로 별칭되고 있었는데 그곳은 초법적인 곳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남산에서 한 사람이 찾아 왔다. 행원스님은 홍법원을 세운뒤 동경과 서울을 자주 왕복했었다.


“스님, 저는 그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만 조사가 불가피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스님에 대한 투서가 들어 왔는데요, 일본서 조총련과 손을 잡았다고…”
“나는 모르는 일이오”
“자세한 내막을 말씀해 주시지요. 스님”
“아는 것이 없으니 투서한 사람에게 자세한 내막을 들어 보시구려”
그 직원은 결국 스님의 요구대로 투서한 사람과 그 내용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모함이오. 내게 증거가 있으니 보시겠소”
행원스님은 일본 홍법원을 사기위해 은행 융자를 얻은 영수증등을 보여주었다.


결국 ‘남산’의 직원은 “그럴줄 알았어요…”라며 돌아가고 말았다.
이같은 모함이 생긴 것은 일본내에 불교를 이용해 발판을 세우려는 재가자들의 장난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실패했다. 일본에 가서 투서한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행원스님은 시치미를 떼고 사정 얘기를 했다.
“이런 때려 죽일놈이 있습니까. 어떤 놈이 스님을 그런 지경으로 모함했답니까…”


투서한 장본인의 흥분된 목소리가 오히려 측은하게 들렸기 때문에 행원스님은 더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일본 홍법원은 계속 번창했다. 제자들은 참선을 곧잘 했으며 몸과 마음에 수행자의 티를 갖고 있었다. 각종 행사나 단체의 모임에서도 행원스님을 초청했다.


2차 대전후에 생겨난 신흥종교와 전통불교의 혼돈 속에서 한국의 선불교를 전하는 일이 결실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04/12/02 17:28 2004/12/02 17:28

교포들 "한국불교 믿고 싶다"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1



-…도쿄서 셋방법당 열고 보니… -

참으로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거침이 없는 역사의 물결, 그 속에 휩쓸리는 사람의 역사는 모래톱처럼 서걱 거렸다. 일제와 해방, 전쟁과 휴전선, 독재와 부패, 부패와 4. 19, 혼돈과 정치, 정치와 5. 16….

어수선한 것은 속세의 일만도 아니었다. 이승만대통령의 유시로 인해 정화의 깃발은 올린 불교계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그 혼란의 물줄기는 끝이 없었고 끝이 없다는 것은 현실을 끝을 향해 치닫는 하나의 과정으로 묶어 두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절인연은 한 시점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머무름이 없는 것이 법계의 진리라면 또 다른 길로 발을 내딛는 것은 인간의 현실이었다.

“비구들이여, 모든이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둘이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 행원스님은 전도선언을 외치신 부처님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혼자서 가는 길, 그 외로움을 이제 스님의 현실로 받아 들이기 위해서.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 됐다. 더이상 일본은 갈 수 없는 나라, 가서는 안될 나라도 아니었다. 반대의 외침도 36년의 뼈저리는 역사는 물밑에서 서걱이는 모래톱으로 남아 있어야했다. 이 또한 어수선한 시절인연의 한 과정일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행원스님은 일본행을 결심했다. 그것은 해외전법의 첫 결심이기도 했다. 스님의 일본행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그 싹이 텄다. 초동에 있는 동국대의 기숙사 지하실이었다. 이 기숙사는 본래 일본 서본원사의 별원이었다. 종단일을 맡았던 스님은 이 별원을 허물고 새집을 지으려는 공사를 시작했는데 어이없게도 그 지하실에서 4천여구의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일본군의 뼈무덤이다.”
“어떻게 하면 좋으냐.”
“어쩌기는. 원수의 유골인데 파묻어 버리든지 어디 바닷물에 던져버리지…”
놀라움과 새로이 솟아나는 분개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불타고 있었다.

“아니, 그럴 것이 아니야.”
스님은 달마회를 이끄는 몇 사람과 의논해 그 유해들을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화계사로 옮겨다 놓았다. 그리고 그 일은 금방 소문이 났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일본은 일본대로 한국에서 실종된 가족을 찾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간 가족의 생사를 몸서리치며 궁굼해 하듯.

소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에서 장관급 인사들까지 화계사로 몰려 왔고 가족의 유해를 부둥켜 안고 울기도 했다. 그 유해 발견은 국교 정상화에도 한몫을 했던 것이다.
일본은 정식으로 스님들과 정치인을 보내 유골을 인수해 갔으며 한국에서도 일본에 흩어진 동포의 유해를 찾아 왔다. 그러니까 양국간의 유해교환이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한 점을 지우듯 이뤄진 것이었다. 물론 이 행사에 행원스님은 중요한 업무를 맡았다. 1966년의 일이었다.


이때쯤 행원스님에게 편지가 왔다. 한번도 아니고 수차례 날아든 그 편지는 일본의 국회의원 오요다시 요시오의 것이었다.
‘스님, 일본으로 와 주십시오. 일본에서는 스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한국인들입니다. 이곳의 한국인들은 한국의 절을 원하고 한국의 불교를 원합니다’
당시 일본에도 한국인 스님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일본식 스님이 되어 일본식 불교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반쯤 무당이 된 경우도 있었다.


행원스님의 일본행은 요오다시 요시오만의 채근이 아니었다. 한국의 정부에서도 일본에 갈 것을 권유했다. 거기에도 이유가 있었다. 당시 동경에 평화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은 북한의 것이었다. 절이 북한 것이란 점은 문제될 것이 없었는지 몰라도 정작 큰 문제는 그 평화사가 교포들을 세뇌시키고 북으로 이송시키는 거점이란 점이었다. 이것은 정부차원에서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저런 이유들은 마침내 행원스님을 일본으로 가게하는 현실적 이유로 굳어졌다. 일본, 도쿄에 도착했을 때 반겨준 사람은 오요다시 요시오였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인사를 거듭거듭해 오던 요시오는 “고려사를 쓰라”는 후한 인심도 내보였다. 그러나 그 고려사는 이미 몇달전에 불타 버려 휑뎅그레한 터만 남은 사찰이었다.
그러나 희망은 있었다. 행원스님이 일본에서 포교를 한다면 2천만원을 한국불교의 해외포교란 명분으로 지원해 준다고 했던 정부측의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 행원스님은 그 정부의 약속을 믿고 도쿄 신주꾸에서 집을 고르고 있었다. 1천8백만원이면 사찰로 쓰기에 충분한 집을 살 수 있었다. 적당한 집도 골라 두었다.

그러나 일본 대사관에 신청한 지원금은 몇달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고 결국 점찍어 뒀던 집은 한 일본인이 사가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다보이주에 셋집을 얻었다. 다달이 7만엔이란 큰 돈을 주어야 했다. 궁핍의 일본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신도도 없이 홀몸으로 시작한 일본 포교에서 넘어야 할 벽은 수 없이 많았다.
2004/12/02 17:27 2004/12/02 17:27

숭산스님 마지막 인터뷰-'오늘 이땅을 살아가는 지혜'




숭산 행원 대종사.

지난 10월 13일 현대불교신문은 ‘원로 스님들에게 듣는다-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지혜'를 주제로 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과 마지막 인터뷰를 가졌다.
오늘의 난국을 돌파할 지혜와 용기를 숭산 스님의 마지막 법문을 통해 다시한번 되새겨 본다.


문 :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서민들의 삶이 힘겹기만 합니다. 그러나 정치권 일부에서는 이에 아랑곳 없이 정쟁에 몰입하고 있는듯한 양상입니다. 국민들이 이 어려운 상황에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요?


숭산 스님 : 화(禍)와 복(福)은 스스로 받고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니 고난중에도 마음을 비우는 사람은 평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복이라고 다 좋은가요.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말도 있는데 복도 너무 많으면 복받느라 걱정이 많아집니다.
그러니 오유지족(吾唯知足)이라. 제 분수를 알아 욕심을 내려놓고 쉴 것이며 내 앞에 닥친 이 일, 이 순간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 자체로서 삶은 이미 바른 길로 들어선 것이 됩니다.
내려놓고 쉬라고 해서 결코 머물러 버려서는 안 됩니다. 자기 능력에 따라 그릇 크기에 맞게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문 : 현재 한국불교에는 각종의 수행법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어떤 수행법은 며칠이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며 불자들을 유혹하기도 합니다. 수행법 춘추전국시대에 어떤 수행법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는지, 또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요?

숭산 스님 : 선(禪)을 닦는데도 그 사람의 마음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규봉종밀 선사의 말을 빌면 선에도 외도선이니 범부선이니 소승선이니 하는게 있고, 중도실상을 관하는 대승선, 최상승선인 여래청정선 등이 있습니다. 또 불교공부를 하는 과정으로 보면 간경문에 염불문 그리고 진언문도 있고 참선문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밭을 가는데도 호미로 쟁기로 또는 소를 끌어 가는 등 여러 방법이 나올 수 있습니다. 모두 방편이 되기에 문제삼을 일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니 외도선이 아닌 다음에야 '이거다' 라고 한가지로 고집할 수는 없지만 이왕에 대자유인이 되어 걸림없이 살아가고자 한다면 최상승의 참선문을 통해 마음을 깨닫도록 하는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세상이 점점 영악해지다 보니 수행도 깨달음도 뭔가 요령껏, 남보다 빠른 지름길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또 그런 것을 좋아하는게 요즘의 세태인 모양이나 깨달음엔 지름길도 없고 특별한 요령도 없습니다.
그저 가고 오고 앉고 눕고 간에 언제 어느 곳에서나 마음자리를 살펴나가면 됩니다.

문 : 한국불교 일각에서는 계율을 안 지키는 풍토가 한국불교를 병들게 하는 주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일각에서는 시대에 맞는 계율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숭산 스님 :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지만 옛날에 백낙천(白樂天)이 조과(鳥 ) 선사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조과 선사의 대답이 간단합니다.
"나쁜 짓 하지 않고 착한 일 많이 하고 그 마음을 깨끗이 쓰면 그것이 불법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足諸佛敎)."
그러자 백낙천이 껄걸 웃으면서 "그쯤이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하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러나 백낙천이 뭘 몰라도 한참을 몰랐던 것입니다.
불교는 이치를 아는데 있는게 아니라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만약 계율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시대에 맞느니 안 맞느니 하는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런 말하기에 앞서 조과 선사가 대답한 뜻부터 바로 알라고 일러주고 싶습니다.
다만 5계, 10계 라도 목숨 걸고 실천부터 하는게 신불자(信佛者)의 도리입니다. 계율의 개정을 말하는 이들은 돌이켜 그 말을 하는 마음자리부터 살필 일입니다."


문 : 저 멀리 십자군 전쟁에서부터 최근 이라크 전쟁까지 종교가 전쟁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진정한 세계평화를 이루고 종교화합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숭산 스님 :네 신, 내 신…. 신의 이름을 앞세워 싸움을 벌이는 성향이 없질 않으니 그래서 '종교를 아편'이라고 극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이 먼저 사람의 도리를 알고 땅의 도리를 알고나서야 하늘 길을 묻는게 순서이겠거늘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서 그만 인간의 길은 제쳐두고 서로들 하늘 일을 잘 안다고 나대니 전쟁이 날 수 밖에 없지요.
기독교의 하나님이란 분은 텅 비고 깨끗한 자리라 그속에서 삼라만상이 탄생했다는 의미이니 불교의 가르침과 크게 어굿나지 않습니다. 유교다 도교다 하는 가르침도 다 마음을 잘 지키고 자연스럽게 쓰는 것이니 불교와도 또 어긋나지 않거늘 어디 다투고 싸울 명분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으면 그야말로 세계가 한 꽃송이 이거늘 그걸 모르니 편가르고 싸우는 것입니다.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2004/12/02 17:27 2004/12/0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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