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에 선원 개원…유럽포교 교두보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8



- 英·스페인·브라질· 佛 등에도 포교 -

미국 포교가 홍법원을 중심으로 한창 이어지고 있었다. 제자들은 법사로도 품수받고 입승·원주등의 소임을 맡기도 해 선원마다 운영이 잘 되는 가운데 선수행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그럴즈음 행원스님의 발길이 폴란드로 이어지고 있었으니 동구권 포교의 시작이 된 것이었다. 1978년 미국에서 제자가 된 안토니오교수(클라우대 심리학)의 안내로 처음 폴란드를 둘러보게 되었다. 폴란드는 공산국가였으므로 공항문을 나가는 일부터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안토니오교수를 통해 알게된 그곳의 교수, 미술가, 음악가등이 스님을 맞이했다. 말하자면 폴란드의 전법은 그들 엘리트들의 불교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폴란드란 나라가 종교활동은 자유이지만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이고 보면 불교를 전하는 일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오랫동안 불교 자체가 인정못받는 수난도 감안해야 했다. 불교가 인정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신자도 극히 적고 전법할 성직자도 없다는데 있었다. 그리고 주로 불교를 가까이하는 사람들이 젊은 청년층이거나 여행을 많이하는 예술분야의 인사들이라 반국가적 행동이 뒤따를 수 있다는 일종의 정치적 불신도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숭산스님을 만난 젊은이들과 교수, 예술인들은 불교의 선수행과 그 의미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그들의 노력으로인해 월샤와에 홍법원을 개설하게 됐다. 월샤와 홍법원은 안토니오교수와 제이콥등이 열심히 이끌었다. 이듬해부터 미국의 신도들과 행원스님이 매년 방문해 용기를 북돋워 주었으므로 폴란드에도 여기저기 선원이 문을 열게 됐다. 자세히 얘기하자면 78년에는 도달사와 도명사가 문을 열어 16명에게 5계를 설해 폴란드 선불교의 뿌리가 내려졌고 이듬해에도 심춘사가 창건되어 신도를 1백명에 이르게까지 포교를 했다. 80년에는 우체에 심명사를 열고 37명에게 5계를 설했고 81년에는 루브린의 심각사를 비롯해 심오사, 오도암이 각각 신설됐다. 이처럼 각지에 선원이 생기면서 순례법회도 자주 갖게 되었다.

“생(生)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생은 한낱 허공에 이는 흰구름과 같고 사(死)란 흰구름이 허공에서 없어지는 것과 같다. 사람이 오고 가고 살고 죽는 것 모두가 저 흰구름과 같이 허망무실할진대 무엇을 삶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 물건이 있어서 그 놈은 맑고 깨끗하여 생사에 따르지 아니하니 그 맑고 깨끗한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제이콥의 통역으로 법문을 듣는 폴란드의 젊은이들과 교수, 예술가들은 목에 침을 꿀꺽덕 삼키며 다음에 이어질 스님의 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禪)이란 나 자신을 발견하여 대우주의 절대적인 진리를 깨달아 만중생의 마음속에 대광명을 밝혀주어 참다운 인생, 영원한 생명, 즉 ‘참나’ 속에서 생사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여 고해의 중생들을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건져 주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서 그 존재의 의미를 확신시키고 그 확신으로 말미암아 생사마저 초탈하는 큰 지혜의 성취가 선이란 소식을 동방의 한 스님에게서 전해들은 폴란드의 지성들. 그들은 줄곧 말이 없더니 스님이 “이제 다들 아시겠는가. 그래, 그대들에게 들린 나의 이야기는 좋은 소식인가 나쁜 소식인가. 그대들은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이라 생각하는가, 좋은 것이 원래부터 좋은것이었고 나쁜것은 원래부터 나쁜 것이었는가, 어디 대답을 해 보시라”고 독촉하니 놀라움을 탄하는 소리만 내지르고 있었다.

그렇게 선불교의 길을 엿보기 시작한 폴란드의 불자들. 그들은 각지역 선원에서 지도를 받으며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폴란드 포교는 달릴수록 계속 힘을 받으며 가속력을 더해갔다.

다음의 전법지는 영국이었다. 폴란드와 같은해인 78년에 서백림 무문선원을 연 사람은 종철법사였는데 그곳을 교두보로 영국포교도 씨앗을 틔워 잎돋고 줄기가 자라기에 이르렀다. 그 잎과 줄기는 80년의 런던선원 개원으로 이어진 것이다. 종철법사는 독일인 내과의사로 정신과, 침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일본식 참선을 오래 배웠었다. 그러나 행원스님을 만난이후 한국선의 종지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런던선원에이어 다음해에는 스페인 팔마에 선원을 열었고 82년에는 미국에서 세계평화종교지도자대회를 개최했는데 대성황이었다. 로르 아일랜드 뉴헤븐선센터에 세계 19개국 불교지도자가 참석해 세계평화를 위해 불교가 제 역할을 다해야한다고 다짐을한 이 대회는 행원스님의 세계전법의 중간 결실이기도 했다.

이어 83년에는 브라질 쌍파울로에, 2년 뒤에는 프랑스 파리에 선원 달마사를 개원했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이건 전법의 물줄기가 흘러들 길은 있었고 그 물을 기다리는 목마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행원스님에게 국경을 넘어서는 전법여행을 계속하게하는 하나의 당위이자 격려이기도 했다.
2004/12/02 17:32 2004/12/02 17:32

푸른 눈 먹물 옷 입은 제자 탄생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7



- 쪽지 적어준 공안 3천장 이르고 -

낯선 미국인에게 불교를 가르치는 것은 미국인의 입장에서나 가르치는 행원스님의 입장에서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르치는 쪽에서는 말이 잘 통하지 않고 배우는 쪽에서는 그 생소한 수행법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파트 법당의 수좌들은 열심이었다. 눈빛과 눈빛으로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를 알아채는 정도까지 다다르고부터는 생활 자체에 하나의 질서가 부여될 수 있었다.

행원스님이 단어를 써 놓으면 제자들은 그 단어들을 꿰어 맞춰서 법문으로 만들곤했다. 그런 단어와 단어들을 통한 의사소통은 다름아닌 공안이되고 있었다. 참선에서의 화두란 식사를 하는데 있어 숟가락이나 포크가 하는 역할을 해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미국의 수좌들. 그들에게 쪽지에 적어 준 스님의 공안은 그날의 수행과제이기도 했던 것인데 그 수가 날마다 늘어나 3천장에 이르렀다.

이제 미국생활에 대한 요령이 생기고 벽안의 제자들도 자신들의 삶에 수행을 자연스럽게 접목시키고 있을 무렵 재미 홍법원을 세웠다. 72년 9월의 일이었는데 그해에는 뉴욕에 삼보사도 세워졌다.

삼보사는 당시의 정달스님이 세운 것이었고 73년 1월에는 구산스님이 삼보사와 홍법원을 다녀갔다. 또 혜정스님도 미국의 법당을 다녀 갔고 계정스님도 미국으로 바랑을 지고 왔다. 계정스님은 행원스님의 초청을 받아 왔는데 도착즉시 달마사를 개원해 포교에 들어갔다.

정달스님도 행원스님처럼 일을해야만 했다. 신발공장을 다니며 돈을 벌지 않으면 않됐던 것이다. 미국땅은 절대로 공짜가 없는 곳이었고 이방인에게 정신의 지도자로 자리잡기에는 몸소 실천하는 모습이 우선적이었던 것이기도 했다.

미국제자들은 언제나처럼 낮에 일하고 저녁에 참선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또 참선을 하고는 일터로 나갔다. 참선도 잘했지만 절도 잘했다. 애당초 김정선교수가 “미국애들에게 명령을 하거나 절을 시키거나 심부름을 시키지 말라”던 충고는 이제 무색하게 되었다. 행원스님은 그 개인주의에 빠진 제자들에게 한국 절에서 소임을 나누듯이 한가지씩 소임을 맡겨 그 일에 대해서 만큼은 책임을 지게 했던 것이다. 시키는 것에 대한 복종은 잘 안해도 자기의 소임에 대한 책임감은 무서우리만치 철저한 것이 미국인들이었다.

아무튼 스님은 미국의 제자들과 또 하나의 도전을 했다. 그것은 돈모으기 원력이었다. 여름 어느날의 제안은 이런 것이었다. “자, 이제 너희 10명과 나를 합해서 열한명은 3개월간 열심히 일을 해서 1인당 천불씩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11명의 식구는 더 배고프고 더 알뜰하게 살아내야 했지만 석달 후에는 1만1천불이 생기게 됐다.

그 돈으로 산 것이 홍법원 4층집이었던 것이다. 뉴욕에 홍법원을 세운 것은 스님 개인의 일이기도 했지만 한국불교가 정식으로 미국에 전법의 물줄기를 댄 것이기도 했다.

홍법원을 근거지로 해서 미국포교는 거듭거듭 발전해 나갔다. 스티븐이라는 제자는 무각(無覺)이라는 법명을 쓰는 사람이었는데 보스톤에 선방을 열어 잘 운영했다. 그곳에 행원스님은 진경, 법안스님등을 초청하기도 했다.

뉴헤븐에 낸 선방에는 예일대학의 학생들이 많이 왔고 데이브, 스티브, 바브 등 교수들이 중심이되어 선방을 이끌었다.

각지에 선원이 생겨나면서부터 행원스님은 제자들을 보다 조직적으로 공부시키고 그들 사이에 위계질서를 심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선원마다 선원장과 입승, 원주, 교무 등의 소임자를 정했다. 그들을 하나씩의 소임으로 스스로 할 일을 나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공부의 깊이를 재는 일이었다.

처음 입문해서 3~4개월은 기초교리를 가르치며 불자가 될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게 된다. 두어차례 용맹정진을 시킴으로 그의 인내력과 불교에 대한 열의를 체크하기도 했다. 그 단계가 지나면 5계를 설하고 다시 1년이상 선공부를 시킨다. 행원스님이 만든 ‘선의 나침판’이란 공안집을 막힘없이 훑으면 일단 식견의 물꼬가 튼 것으로 여길 수 있어 시험을 치르게 했다. 그 시험을 넘어서면 법사로 불렀다. 법사를 명명받고도 5년가량 더 공부해 천칠백 공안을 마음으로 다스리는 정도가 되면 지도법사 자격을 주었다. 그래서 선원을 맡기고 신자들을 지도하게 했던 것이다.

출가에 대한 간절함이 깃든 사람은 출가수행도 가능케 했으므로 푸른 눈에 먹물옷을 걸친 제자도 생기게 됐다.

아무튼 행원스님의 미국포교는 여여하게 흐르는 물처럼 시간을 따라 마당도 넓어지고 결실 거두게 되었다.
2004/12/02 17:32 2004/12/02 17:32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6

- 시주없어 세탁소취직…신도 점차 늘어-
- 좁은 아파트 합숙하며 참선 지도 -

미국행 비행기에서 만났던 김정선 교수를 다시 만난 것은 보스톤에서 1시간가량 차를 달린 후였다. 그곳의 학생 너 댓명이 미리 교수의 집에 와 있는 것을 보고 행원스님은 놀랐다.
“스님, 반갑습니다. 스님이 오신다니까 이렇게 학생들까지 찾아 왔군요. 다들 불교에 관심이 많아서….”
김교수가 이렇게 인사를 하고 스님과 학생들사이에도 간단히 인사가 치뤄졌다. 그리고는 스님을 중심으로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실은 이야기를 나눴다기 보다는 “불교가 무엇인지 얘기해 주십시오”라는 교수의 청에 대해 행원스님이 법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판은 금방 깨지고 말았다. 행원스님이 ‘선이란 무엇이냐’ ‘불립문자요 직지인심이란 말은 무슨 의미냐’를 이야기 하면 그 통역을 김교수가 하는데 의미가 바르게 전달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언어도단’과 ‘불립문자’의 뜻을 서로 다른 언어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되지 못할 일이기도 했다. 불교를 가르치는 이야기판은 깨졌지만 학생들은 스님과 좀더 오래 만나며 조금씩 배우고 싶다고 청했다. 이미 미국포교에 뜻을 세운 뒤인데 무엇을 망설일 것인가.

행원스님은 조그만 아파트를 하나 얻었다. 그리고는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참선을 지도했다. 역시 말이 안통하는게 큰 어려움이었다. 스님이 아무말 없이 방석을 깔고 가부좌를 틀면 학생들도 그것을 따라했다. 죽비 소리에 맞춰 앉고 또 일어서 움직이는 것으로 참선을 지도하는데는 아무래도 답답한 그 무엇이 있었다.

왜 그렇게 앉고 앉아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큰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설법을 해야 했다. 빈 깡통에 흙을 퍼 넣더라도 그 이유와 방법이 있을 것인데 그 열의에 찬 학생들을 그저 멍청히 앉아 있게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편법이긴 했지만 최면술을 조금씩 써가며 학생들에게 단전호흡법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간단한 말로 선(禪)의 목적 등을 설명했다. 통역하는 김교수도 무척 힘들었겠지만 내색은 않고 늘 즐거운 표정이었다.

다시 흑인촌으로 아파트를 옮겼는데 참선을 배우러 찾아오는 신자가 30여명이나 됐다. 그곳에 브라운대학의 프르덴 교수가 찾아 왔는데 그는 일본말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동경대학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하고 하바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스님에게 참선을 배우고 싶다며 스스로 찾아 온 것이었다.

프르덴 교수가 일본말에 능했던 것이 스님에게만 반가운 일일 수 없었다. 30여명의 학생들에게도 해당되는 반가움이었다. 이제 학생들은 어렵지 않게 스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스님이 일본말로 뭔가를 얘기하면 프르덴교수는 담박에 그것을 영어로 옮겨 듣는 이의 귀를 열어 주었던 것이다.

매주 아파트가 메어지도록 사람들이 몰려왔다. 50명, 60명, 90명… 이렇게 참가자가 많은 법회를 열어 나가다 보니 살림살이가 궁핍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보시나 시주가 무엇인지 알 미국신도는 없었고 그것을 강요할 형편도 못 되었다. 할 수 없이 행원스님은 세탁소에 일자리를 얻었다. 영주권이 없다는 이유로 한달 품삯도 2백50불 이상을 받지 못했다. 영주권 있는 사람의 6백~7백불에 비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월급이었지만 달리 항변할 문도 벽도 없었다.

반년이란 시간이 그렇게 지나 갔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매일 찾아 오는 사람에게 참선을 가르치고 금요일 밤에는 정기법회를 가지며 지내는 동안 아예 스님의 법당에 들어 와 살겠다는 사람도 한 두 사람씩 생겼다.

“마음 자리를 하나로 하려는데 같이 못 살 것도 없지. 들어와 살도록 해요.”스님과 그들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와 함께 예불하고 참선하고 그렇게 단체생활을 했던 것이다. 입이 많다보니 먹거리의 소모도 만만치 않았다. 밥에 두부와 김치와 물을 넣고 끓여 주어도 그들은 맛나게 먹었다.

“스님, 오늘은 저희가 식사를 짓겠습니다.”
“그래 보시오.”
그들은 빵이니 우유등속을 장만하고 쌀을 구해다 밥을 짓기도 했는데 제법 밥이 잘 되었다. 함께 살면서 간단한 말과 몸짓의 의사 소통만 가능해 진 것이 아니라 밥짓는 일까지 배우게 된 것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 잘된 밥을 그릇에 퍼담은 한 제자가 다시 물을 붓더니 끓여서 내왔다.

“아니 밥 잘 지어서 이게 뭐야.”
의아해 하는 스님께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전에 스님이 이렇게 끓는 물을 부어 드셨잖아요.”
“하하하, 그것은 찬밥이어서 그렇게 먹은 것이지….”

임연태 기자
2004/12/02 17:30 2004/12/0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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