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04

2010/08/04 00:58 / My Life/Diary
그는 나를 시험해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신문을 들여다본 적도 거의 없었고, 또 최근 들어 책 한 권 들추어 본 일도 전혀 없었다.

“당신은 감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삶도 거부했고, 자신과 사회의 이익도 거부했고, 시민과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의무도 거부했고, 자기 친구도 거부했습니다. 당신에게는 어쨌든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을 따는 것 말고는 그 어떠한 목표들도 단념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추억까지 단념하고 말았습니다. 전 당신이 삶의 치열하고 힘찬 순간들을 살아가던 때를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 자신이 가졌던 훌륭한 인상들을 당신은 모두 잊어버렸어요. 이제 당신의 꿈과 절실한 희망이란 고작 홀수와 짝수, 검은색과 빨간색 그리고 가운데 열두 숫자들 같은 것들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렸어요. 전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제발, 그만 하십시오, 미스터 에이슬리, 제발. 더 이상 떠올리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벌컥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걸 알아 두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잊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잠시 동안 그것들 모두를, 심지어는 추억마저도 머리에서 떨쳐 버린 것뿐이에요. 제 형편이 근본적으로 개선될 때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런 다음에는 제가 죽음에서 부활하는 모습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10년이 지나도 이곳에 계실 것입니다.” 그가 말했다.

ㅡ『노름꾼』,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pp.252-253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 예전의 모습을 타인에게 들을 때마다 순간순간 지금의 나를 본다. 어쩌면 나는 타인의 발화에 의해 존재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모두가 나를 떠나고 누구도 나에게 내 옛모습을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나를 잊게 될 것이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엔 나를 통한 나의 기억보다 나를 통한 타인의 기억이 더 많다. 우리가 손을 맞잡을 때 내게 느껴진 따뜻함은 당신의 따뜻함이었으며 우리가 입을 맞출 때 내게 전해진 사랑은 당신의 사랑이었고 우리가 눈을 바라볼 때 내게 보여진 슬픔은, 그 슬픔은, 다만 당신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추억이여… 내가 말하지 않으면 당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2010/08/04 00:58 2010/08/04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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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친구여…

2010/08/02 02:46 / My Life/Diary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해줄까. 봉우리…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얼마 남지는 않았는데… 잊어버려! 일단 무조건 올라보는거야. 봉우리에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 아무 것도 아냐. 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 잘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거기 부러진 나무등걸에 걸터 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 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 옷자락을 이 아래에서도 똑똑히 알아 볼 수 있을테니까 말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 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주겠지 뭐.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같은 것이 저며 올때는 그럴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2010/08/02 02:46 2010/08/02 02:46

2010.07.31

2010/07/31 17:27 / My Life/Diary
까마귀가 나는 밀밭, 빈센트

불평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고, 반감 없이 고통을 직시하는 법을 배우려다보면 어지럼증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건 가능한 일이며, 심지어 그 과정에서 막연하게나마 희망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삶의 다른 측면에서 고통이 존재해야 할 훌륭한 이유를 깨닫게 될지도 모르지. 고통의 순간에 바라보면 마치 고통이 지평선을 가득 메울 정도로 끝없이 밀려와 몹시 절망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에 대해, 그 양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러니 밀밭을 바라보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게 그림 속의 것이라 할지라도.

ㅡ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1889년, 『반 고흐, 영혼의 편지』, pp.261-262

저거 보이니? 칠흑같이 어두운 밤,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늘어선 밀밭이! 고흐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빛을 보고자 했단다. 미친 사람들은 정말이지 한결같다. 결국 그는 가슴팍에 총을 겨누고 자살을 했다하지.
2010/07/31 17:27 2010/07/3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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