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14

2010/09/14 00:53 / My Life/Diary
H를 만났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10년만의 마주봄. 천천히 깜빡이는 눈.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 동그랗게 웃는 얼굴. 그대로더라. 볼살이 조금 빠졌고 더 이상 주근깨도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랑하지 못해서 그리웠다. 이젠 서로 손끝조차 닿지 못하지만. ㅡ 마주보고 밥을 먹어서, 즐거웠어요, 정말. 김광진의 <편지>가 불리고 어느새 10년이네요. 나도 이젠, 안녕. 행복해 주세요, 부디.

내 20대가 끝났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2010/09/14 00:53 2010/09/14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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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8

2010/09/08 00:23 / My Life/Diary
브라자였어. 은색 브라자.

집에 오는 지하철 속, 22시 13분. 나를 밀치고 내 앞 구석에 비스듬히 선 아줌마. 50대일까. 60대일까. 큼직한 가죽 가방을 왼쪽 어깨에 매고 있는데, 흘러내린 가방끈 따라 어깻살이 보이더라. 그리고 그 어깻살 위로 느슨한 듯 걸쳐져 있는 끈.

브라자였어. 은색 브라자.

싸구려 큐빅이 붙은 검은 집게로 붙든 머리카락은 풀어 내리면 등까지 내려올 것 같더라. 머리가 얼마나 작았는지 집게가 무거워 보일 정도였어. 눈도 작고, 코도 작고... 어깨도 작았지. 그리고 그 어깨를 무심히 가로지르는 빛 한줄기.

브라자였어. 은색 브라자.

계속 소리를 내면서 껌을 씹더라. 가끔 조용할 때면 자기가 신은 빨간 샌들을, 빨갛게 칠한 발톱을 내려다 보고. 다시 소리를 내면서 껌을 씹어.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나가고. 사람이 들어오고 문이 닫히고. 터널 속을 달리기 시작하면, 지하철 밖을 내다봐. 그러다 문득 차창에 비친 내 눈과 마주치지. 나는 시선을 피하다가 이제는 회색이 되버린 브라자 끈을 보게 된거야. 그 아줌마는 슬픈 여자니까.
2010/09/08 00:23 2010/09/0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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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2010/09/06 22:11 / My Life/Diary
  그런데 그 뒤 누나가 흘린 눈물은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얄궂게도 일본에 두고 온 약혼자도, 애절하게 사랑을 고백했던 그 젊은이도 둘다 맺어지지 못했다.
  평생 혼자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누나는 나중에야 평범한 철도원 아저씨와 결혼을 했다. 사람들의 운명은 그렇게 뒤죽박죽이 된 것이다.
  누나는 평생을 살면서 아마 모르긴 해도 이루지 못한 두 남자를 때때로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 했을 것이다. 다행인지 누나는 빨갱이였던 애인 둘은 잃었지만 다른 많은 여인들처럼 생과부 신세는 면했기에 자식들을 낳고 그런 대로 평생을 살았다.

ㅡ 권정생,「아홉 살 해방의 기억들」,『우리들의 하느님』, p.246

1. 스스로에게도, 서로에게도 자신이 없는 거지. 너 아니면 안 돼, 라고 할 사람을 기다리다 늙어버린 아이들. 유치한 외면. 상처 받기 보다는 그리움이란 껍데기 몇 장씩 곱씹으면서 살아가는 게 쉬우니까. 이 사람이 아니면, 뭐, 다른 사람. 적절한 시간과 공간에서 관계를 맺게 된다면, 결국 아무에게든 끌리는 거 아니겠니? 아아ㅡ 절망. 절망. 경악.

“사람들은 평생 동안 좋은 일이 생기기를 희망하며 살지. 그러나 좋은 것에는 나쁜 것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우주의 법이 그러한데 그걸 몰라. 그래서 나쁜 일이 일어나면 놀라고 고통스러워 하지. 평생 좋은 것을 좇고 나쁜 것을 피하느라 돌고 도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ㅡ 만공 선사,「좋은 것들」,『부처를 쏴라』, p.112

2. 모래알 만큼의 아픔도 느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탓에, 아주 사소한 행복마저도 잃어버린 거야. 그러자 행복이 없음을 불행이라 여긴거지. 그래, 나는 어느 한구석 아픈 곳이 없더구나. 눈물이 마른 게 아니라 흘릴 아픔이 없었어. 편안하게 절망했던 거야.

실은 그때 나는 새빨간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한 구실을 붙여 서양행을 거절한 것이다. 그 여자 때문에 나중에 무척 고생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서양에 가기보다 가난하고 바보 같은 여자와 고생하는 편이 인간적 사업으로 어렵기도 하고, 또한 영광스런 일이라고까지 생각하기 때문이다.

ㅡ 다자이 오사무,『나의 소소한 일상』, p.285

3. 월정사에서 편지가 왔어. 단기출가학교에 합격했으니 10월 1일날 입산하라는. 30일을 지낸 이후에는 정식 출가도 가능하다며... 사실 신청서를 쓸 생각이 없었어. 일은 원래 이번 달 말까지였지만, 1년 정도는 다시 한번, 속는 셈 치고 근근이, 근근이 사랑하면서, 열심히 살아볼까... 근데 신청 마지막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도 모르겠네. 오래된 습관처럼, 즉흥적으로, 써 넣고 보니 23시 40분. 조금만 늦었어도 보내지 않았을텐데. 내가 나를 선택 속에 던져버렸지. 9월 남은 나날 동안, 내가 무슨 결정을 할지 나도 모르겠네. 다자이는 확실한 병신인데...

4. 오대산에는 10월이면 눈이 내린데. 내복과 털모자, 털장갑, 털신발을 꼭 가지고 오래. 아ㅡ 쏟아지는 눈을 보면, 다 잊어버릴 거야. 아ㅡ 나는 말이야ㅡ 눈 속에서라면ㅡ, 비참하게 죽어도 좋아ㅡ!

5. 우리는 닮았어.
2010/09/06 22:11 2010/09/06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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