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 경주마
Secretariat




동전 던지기
시크릿테리엇(Secretariat)이 태어나기 전 해인 1969년 가을 벨몬트파크의 뉴욕 경마협회장 Alfred.G.Vanderbilt의 사무실에 몇 사람이 모여 동전던지기 내기를 하고 있었다. 경마계에서 동전던지기 일화라면 우선 Derby경주의 명칭을 정한 내기가 떠오르지만, 이곳의 게임도 어쩌면 경마계의 작은 지각변동을 이루어 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 버지니아주 메도목장의 Mrs. Helen ‘Penny’ Tweed(목장 창설주 Chenery의 딸이자 나중의 Secretariat의 생산자 겸 마주), Ogden Phipps(Bold Ruler의 마주), 그리고 당대 최고의 목장 클레이본의 Arthur Boyd ‘Bull’ Hancock Jr(생김새와 목소리가 워낙 거인스러워서 애칭으로 Bull Hancock으로 불림), 마지막으로 사무실 주인 반드빌트(Native Dancer의 생산자 겸 마주) -의 동전던지기는 메도목장이 소유하고 있는 씨암말 2두(Somethingroyal, Hasty Matelda)와 Ogden Phipps 소유의 Bold Ruler 사이에서 태어난 망아지에 대한 ‘Foal Share’(씨수말과 씨암말에 각각 투자하여 태어난 망아지를 나누어 가지는 제도) 계약을 이행하기 위함이었다. 그해 봄 Something royal은 암망아지를, Hasty Matelda는 수망아지를 생산했다. 지금은 Something royal의 경우 Bold Ruler의 자식 수태가 확인되었으나 Hasty Matelda는 불임으로 판정되었다.

Penny와 Phipps가 내기를 해서 이긴 사람이 Something royal의 암망아지만 갖고, 진 사람은 나머지 2두를 갖게 될 상황이었다. 반드빌트가 동전을 던지고 Bull Hancock이 심판관이었다. 연장자인 Phipps가 동전의 뒷면을 선택했고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보고 행콕이 “뒷면이다”고 판정했다. Penny가 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하느님 고맙습니다”하고 기도했다. 내년 봄에 태어날 망아지가 Secretariat였고, 더불어 최고 마주의 지위도 예약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Nasrullah와 Prince quillo의 Nicks
이 닉스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메도목장과 클레이본목장의 관계를 이해해 보기로 하자. 양 목장의 창업주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으며, 그 관계는 후세에도 계속 이어졌다. 메도목장의 창업주가 은퇴한 후 그의 자식들 중 큰아들과 큰딸은 이미 금융업계에서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 목장 후계자의 유산을 거절했고, 어린 막내딸 Penny가 목장을 떠안았다. 그리고 행콕의 후세들은 Penny의 혈통공부와 경주마 비즈니스의 가정교사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Penny의 손에는 항상 혈통서적이 들려 있었으며,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Seth Hancock에게 물었다. Lucien Laurin 조교사의 아들 Roger도 가정교사를 자임했다 (Roger는 후일 은퇴 예정인 60세의 아버지 루신 조교사를 설득하여 Secretariat의 조교사로 복귀시킨다).

사진 속 Penny의 모습에서 사람을 끄는 매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여인에게 당대 최고의 고수들이 모여든 것은 Secretariat라는 걸출한 스타를 만들어 내라는 ‘신의 명령’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클레이본목장은 유럽에서 Nasrullah와 Prince quillo를 수입해 위닉스의 기초를 마련했고, Penny는 가정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 닉스를 완성시켰다. 물론 Secretariat가 태어나기 1년 전에 Riverman, 2년 전에 Mill Reef라는 챔피언이 태어났지만 이 이론이 일반화되기 전이었다.

Bold Ruler와 Something royal
많은 사람들은 Bold Ruler의 단거리 스피드와 Something royal의 지구력 결합을 위닉스의 성공 요인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다. 물론 Prince quillo계통은 분명히 지구력의 화신이다. 그러나 Bold Ruler는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가 4세 때 챔피언 스프린터이기는 했지만 중거리 소화능력도 충분히 있었다. 혈통표에서 보는 것처럼 나스눌라의 스피드에 모마의 부마인 Discovery의 장거리 능력도 충분히 물려받았다.

Dosage Profile도 26-8-8-11-1(D.1:2.38)이어서 2,000m 거리도 소화할 수 있다. 그의 경주 성적표에도 이 사실이 잘 나타난다. 3세 때 프리크니스 스테이크스(1,900m)를 거머쥐었으며 2,000m경주에 4번 출주하여 3번 우승했고, 1,800m 코스 기록을 2번이나 수립했다. 만일 스피드와 지구력 결합 하나만을 성공의 비결로 지적한다면, 필자가 Northern Dancer의 글에서 소개한 Type To Type이론 중 거리적성이 비슷한 것끼리 짝지우라는 원칙에도 반하는 것이다. 물론 경주마의 혈통이론이라는 것이 지구상의 과학 중 정확성이 가장 떨어지는 분야라는 점도 있긴 하지만…. 그러면 Penny가 선생님들로부터 터득한 성공의 열쇠는 무엇인가?

Bold Ruler는 만성 관절염 환자였다. 자식들 중 다리가 허약한 망아지가 한 둘이 아니였으며 씨수말로서 활동이 왕성한 시기인 17세 때 암으로 사망했다. 한마디로 ‘건장함’의 결여가 그의 약점이었다. Penny는 Prince quillo를 이용해 이 약점을 보완한 것이다(경주마 생산업계에서 건장함의 대명사는 당연히 Prince quillo의 몫이라는 데 이견이 없음)





Secretariat의 탄생
혈통표 중 부마 Bold Ruler는 이미 잘 알려져 있어 생략하고 모계쪽을 살펴보기로 한다. 창업자 Christopher Chenery는 1947년에 모마의 모마인 Imperatricer라는 스테이크스 승리마를 당시 3만달러의 거금을 투자하여 구입한다. 그 말은 생애 4두의 스테이크스 승리마를 생산했으며, 1952년에 태어난 Something royal은 단 1회 출주 후 번식마로 전용된다. 지식이 부족한 생산자들이라면 경주성적으로 봐서 분명히 이 씨암말을 지나칠 것이다. 그러나 모마의 우성 유전력과 Prince quillo의 결합으로 이미 최고의 씨암말로 대접받았으며(1959년에 챔피언 Sir Gaylord 생산 등) 1965년부터 리딩사이어 Bold Ruler에게 시집보내졌다. Ogden Phipps도 이 사실을 알고 ‘Foal Share’를 제의한 것이다.

1970년 3월 30일 0시20분 메도목장 분만 마방에서 Something royal과 Bold Ruler의 3번째 망아지가 태어났다. 그 망아지는 분만 20분 만에 스스로 일어나 걷기 시작했으며, 45분 만에 어미젖을 빨기 시작했다. 크고 강하고 잘생겼다. 목장일기 한 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다.

“1970. 7. 28. 세 다리가 희고 잘생긴 수망아지. 뒷다리가 잘 뻗어 있으며 훌륭한 어깨와 완벽한 후구, 누구나 보기만 하면 매료될 것이다.”

20세기 최우수 경주말을 선정할 당시 Man O’War와 Seretariat 사이에 상당한 경합이 있었다.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아 전문위원이 선정한 말을 Man O’War, 경마고객이 선정한 최고는 Secretariat로 나뉘었다.

여기에는 마격의 우수성도 포함되었을지 모른다. 그는 일찌감치 챔피언감으로 지목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Secretariat의 마체 형태를 교본으로 삼거나 “지구상에 존재한 서러브레드 중 가장 완벽에 가까운 마체였다”고 평가한다.

세 다리가 흰 것과 관련하여 생산자들 사이에 옛날 속담이 다시 회자되었다. “흰 다리가 하나면 그냥 크는 대로 버려두고, 둘이면 아내에게 선물하고, 셋이면 아들에게 물려주고, 넷이면 빨리 팔아 버려라. 네 다리와 코에 흰 선이 있으면 머리를 쳐 까마귀 밥이 되게 하고…. 제일 좋은 것은 당연히 Secretariat처럼 세 다리와 코에 흰 줄이 있는 것이다.”

- 다음호에 계속 -


글 / 김종식 푸른목장
2006/01/04 01:33 2006/01/04 01:33

Phar Lap
기상천외한 경주작전





뉴욕 타임스의 부고장(訃告狀)
1932년 4월 6일 뉴욕 타임스 1면에 경주마 한 마리가 산통으로 죽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말 이름도 생소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보도는 극히 이례적이었다.

그 말이 바로 뉴질랜드에서 출생하여 단 한 차례 미국 원정경기 후 의문사한 ‘Phar Lap’이다. 미국에서 20세기 최우수 경주마 100두를 선정한 내용을 살펴보면 켄터키더비마 126두 중 겨우 28두가 뽑혔고, 최고 명문인 Northern Dancer계도 5두에 불과하다. 그리고 미국 이외 지역에서 태어난 말은 Phar Lap을 포함해 5두뿐이다(아일랜드 2두, 프랑스 1두, 아르헨티나 1두). 그러나 나머지 4두는 출생지만 다를 뿐 미국에서 경주를 계속했으며, 오직 Phar Lap만이 한 차례 원정 경기로 22위에 랭크되었다. 미국인들이 그들의 자존심을 접으면서 왜 이 말을 최고 경주마로 선정했으며, 세계 굴지의 신문을 통해 부고장을 돌렸을까?

자이언트의 탄생
Phar Lap은 1926년 10월 28일 뉴질랜드 Seadown Stud에서 태어난 밤색 거세마이다. 그의 혈통표에는 부계쪽에 영국 더비를 거머쥔 Bend Or(3대, 1877년생, Northern Dancer의 8대조), Spearmint(3대, 1903년생)가 들어 있으며, 모계는 St. Simon(5대, 1881년생)의 후손이지만 그 라인은 이미 쇠퇴해 버린 지 오래된 것 같다.

호주 조교사 Herry Telford와 미국인 사업가 David Davis가 공동으로 약 800달러에 구입한 거세마였으나 체고가 17.1핸드(173.7㎝)이고 흉위가 2m가 넘는 거구였다. 그가 이긴 경주에서 측정한 평균 보폭은 732∼824㎝에 달했다(국내의 평균 보폭은 650∼700㎝임).

‘Phar Lap’이란 마명의 근원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단지 자바의 방언으로 ‘lightning strike’(번개처럼 빠르다)란 뜻으로, 혹은 어미의 아비인 ‘Winkie’에서 유래한 ‘밤하늘의 윙크’로 받아들여지지만 ‘Red Terror’의 별칭으로 자주 불리기도 했다.

호주에서의 경주마 시절
1929년부터 1932년까지(미국 원정경주 포함) 51전 37승으로 30만1,402달러를 수득했으나, 대부분의 명마들처럼 3세 후반기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호주인들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할 당시부터 무장 경호원과 경찰견의 경호 속에서 지낸 그의 위세는 멜버른컵(Melbourne Cup, 2mile) 경주의 설명만으로 충분할 것 같다.

‘톰소여의 모험’을 지은 마크트웨인은 “지구상에서 말과 관련된 최고의 축제가 바로 이것”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경마전문가들은 지구 남반구의 최고 경주이기는 하지만 가장 잔인한 핸디캡 경주라 일컫기도 한다. 4세 때 Phar Lap이 이 경주에 참가했을 때 워낙 인기가 높아 전체 국민들 중 심사가 뒤틀린 사람은 경마예상지 판매업자뿐이었다. 5세 때 경주에서는 필자가 생각해도 거짓말 같은 사건이 발생한다. 당해 그가 유일하게 3착이하의 착외로 밀린 경주가 바로 이 경주다.

부담중량이 무려 150파운드(68㎏)였는데, 우승한 말의 부담중량은 겨우 98파운드(44㎏)에 머물렀다. 경주마 자원이 워낙 부족했던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런 일들이 가끔씩 있었다.

세계 최고 상금 수득마 Cigar의 전성기 때도 부담중량은 130파운드에 불과했다. 한쪽은 적당한 부담중량 부여로 전 국민의 영웅을 만들어내고 경마를 대중화시켜 나가는 반면, 다른 쪽은 고객의 흥미 충족에만 급급하여 어린 망아지의 다리가 부러지는 것조차 기꺼이 감수하려는 상황들이 경마제도를 잘 모르는 필자로서는 정말 안타깝기만 하다.

하여튼 Phar Lap은 호주에서 28만 2,200달러를 수득하고 주위에 적수가 보이지 않자 세계 최고 상금 획득을 목표(당시 최고 상금 수득마는 37만6,744달러를 번 미국의 Sun Beau, 93위)로 미국 원정길에 오르게 된다.

기상천외한 경주작전
1만마일의 바닷길을 화물선 바닥에서 3주 동안이나 참아낸 그는 마침내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했다. 얼마동안 컨디션을 조절한 후 10만달러의 우승상금이 걸린 Agua Caliente Handicap 경주에 출사표를 던졌다(불행하게도 경주 직전 상금 규모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최고 상금 수득의 꿈은 좌절되었다). 경마장의 모든 환경이 다를 뿐 아니라 발주기 또한 지금 것의 전신인 Maxwell 발주기여서 Phar Lap에게는 처음 보는 쇠덩어리였다.

경마진행자의 적응 훈련 권유를 무시하고 시골길이나 낮은 언덕을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이국의 풍경들을 감상하는 것이 그의 훈련 방법이었다. 진행자의 귀찮은 권유가 계속되자 원형마장에서 등 위에 새끼염소 4마리를 태우고 서커스하듯 빙글빙글 돌았다. “워낙 온순하고 영리해서 그런 훈련은 필요없소” 하고 조교사는 한마디 던졌다(그가 죽은 지 70년이 지난 지금 Phar Lap에 대한 재평가는 그의 경주능력보다 오히려 ‘영리함’ 때문에 최고의 경주마 반열에 올려 놓는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음).

경주 당일에도 몇 경주 앞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공터에서 이리저리 달려보았다. 발주요원이 기겁을 하고 기수에게 “당신 말은 최고 인기마이니 얼른 내려 그를 쉬게 하시오”라고 했으나 Phar Lap은 재빨리 멀리 도망가 버렸다. 경주 며칠 전 조교사 Telford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출발지점에서 시시한 미국말들이 튕겨내는 흙먼지를 Phar Lap의 얼굴에 묻힐 수는 없으니 천천히 출발하여 외곽으로만 달리게 하여 2,000m 거리 중 마지막 800m만 갤럽하겠다고 희한한 경주작전을 공개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했다.

1,800m 트랙 중 중앙 관중석을 지나는 200m 지점에서 앞무리와 정확히 50야드(45m) 떨어져 있음이 측정 결과 드러났다. 그것도 외곽 펜스에 붙어서…. 1,200m를 남겨놓고 후미그룹에 합류한 뒤 800m를 남겨두고 기수는 채찍을 뽑았다. 그리고 여유있게 승리했다. 경주 후 여러 경마장에서 고액의 상금을 걸고 그를 초청하려 하였다. 어떤 사람은 트랙에 실크카펫을 깔아 줄 테니 그 위를 한 번만 달려 달라고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일반인의 출입을 막은 채 부어오른 근을 비밀리에 치료하고 있었다.

의문의 죽음
느닷없이 뉴욕 타임스에서 Phar Lap의 죽음이 보도되었다. 부검 결과 사인은 이슬에 젖은 알팔파를 먹어 산통이 발생한 것이며, 소량의 극약 성분도 검출되었다. 독극물 성분은 목장 관리인이 주위 나무에 살충제를 뿌리던 중 일부가 바람에 날려 그의 마방까지 침투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다른 곳에서 Phar Lap을 주연으로 출연시키는 영화 제작에 관하여 논의하던 마주도 급히 달려와 주위의 설명을 듣고 부검 결과에 동의했다.

그러나 호주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1999년 브리더스컵 경주를 참관하러 온 호주 경마관계자들도 환담 중 Phar Lap의 이야기가 나오자 정색을 하고 “당신네 미국 사람들이 우리의 영웅을 죽였소” 하고 고함을 쳤다) 믿지 않는다.

호주에서는 Phar Lap의 독살을 소재로 소설이 쓰여지고 그를 추모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되었다. 그리고 이른바 양심선언이란 것도 수없이 나왔다. 남미계 폭력배들이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으며, 훈련을 마치고 마방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총이 발사되었으며, 심지어 타살이라고 계속 주장하던 당시의 전담관리사도 50년이 지나 신문기자들을 모아 놓고 호주에서 가져간 영양제가 부족할 것 같아 물을 타 먹여 그가 죽었다고 대성통곡하는 등….

반면 미국에서는 Damon Runyon이라는 소설가가 2차대전 당시 연합군 병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Phar Lap은 분명히 세계 최고의 경주마다”며 “미국의 어떤 사람이 감히 그를 죽일 마음을 품었겠느냐”고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Phar Lap은 지금도 살아 있다
그의 부검 후 14파운드에 달하는 심장(경주마 평균 심장은 9파운드임)은 뉴질랜드로 보내져 영구 보관 중이며, 몸체는 박제되어 멜버른 빅토리아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1999년 가을 마주 David의 손자집에서 우연히 Phar Lap의 우승 트로피가 하나 발견되었다. 그 트로피는 소더비 경매에서 예상가격 9만달러를 훨씬 상회하는 27만달러에 팔렸다. 그는 호주인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양심선언이 나오면 신문들은 그것을 대서 특필하고, 그들은 다시 분노하기 시작한다. “Phar Lap의 사인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라고….


글 / 김종식 푸른목장 대표
2006/01/04 01:25 2006/01/04 01:25

황제의 휴식
16연승의 기록 남긴 명마 Cigar


모마(Solar Slew)와 생후 10일째의 Cigar.


말띠 경주마의 탄생
시가(Cigar)는 4년간 총 33회 출주하여 1착 19회, 2착 4회, 3착 5회의 전적으로 999만9,815달러를 획득한 세계 최고 상금 수득마이다. Northern Dancer의 손자인 Palace Music을 부마로, Seattle Slew의 딸 Solar Slew를 모마로 하여 태어난 그는 흔히 일류마의 전력에서 볼 수 있는, 삼관마 경주 경력도 없을 뿐 아니라 4세 가을 때까지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그렇고 그런 존재였다. 조기완성형을 요구하는 현대 경마세계에서 퇴출을 면한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고의 경주마로 부상할 때 심심한 호사가들이 Cigar의 사주를 보았다. 1990년생 말띠, 수호신은 전쟁의 여신 마르스(Mars), 부와 품위를 상징하는 다이아몬드가 그의 보석이다. 그러나 북미지역에서 태어난 같은 말띠는 4만4,000두가 넘었으니 진정한 성공의 열쇠는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이다.

마격(Conformation) 연구가 Cecil Seaman의 자료에 의하면 Cigar의 마체구조는 그가 데이터로 보유하고 있는 최고 경주마 4만5,000여두 중 큰 심장뿐 아니라 체장도 평균치 228.6㎝보다 9㎝가 더 길었다. 어깨뼈 또한 평균치보다 4㎝ 정도 길고 잘 경사져 있었으며, 다리뼈도 모든 부분이 평균치 보다 길었고 완벽할 정도로 균형이 잡혀 있었다. 특히 엉덩이뼈에서 시작된 뒷다리는 웅장할 정도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보폭이 길며 폭발적인 파워가 용출되었다.

금연가의 Cigar
마주 겸 생산자 Allen E. Paulson은 파일럿 출신의 항공분야 사업가였다.

매년 100두 이상씩 태어나는 망아지의 이름을 지을 때 하늘에서 내려다본 거점지점의 지명을 따 마명을 짓곤 했는데, Cigar는 미국 남부 멕시코만의 마을 이름이다(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 우승 트로피를 받을 때 카메라 앞에서 시가를 물고 있기만 했다).

생산자 앨런은 엄청난 부자이다. 1985년 켄터키에 서러브레드 생산공장 Brookside Farm을 세울 당시 소유하고 있던 항공사의 지분을 크라이슬러 회사에 매각한 금액이 6억달러를 훨씬 넘었다. 매년 1,000만~2,000만달러를 망아지나 씨암말 구입에 쏟아부었고, Cigar가 데뷔할 당시 600두 이상의 말을 소유하고 있었다.

규모뿐 아니라 품질 수준도 놀랍다. ‘금으로 도금하고 통로에 실크카펫을 치장한 제트기가 제일 잘 팔린다’는 기업 경영철학을 그대로 도입했다. 그러나 몇백만달러에 구입한 망아지가 단 한푼의 상금도 벌지 못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며, Cigar의 모마 Solar Slew도 당해 2세 암말 최고가인 51만달러에 구입하였으나 겨우 5,000달러 정도 벌여들여 앨런의 눈밖에 나 교배시즌에는 공동 소유 씨수말 Palace Music과 교배된 상태로 켄터키에서 메릴랜드로 쫓겨났다(메릴랜드 Country Life Farm의 씨수말 2두를 공동 소유하여 하위급 씨암말의 씨수말로 활용함). 그래서 Cigar의 고향은 메릴랜드이고 망아지 때도 한쪽 구석의 패독에서 그럭저럭 지냈다.

MP에서 AP로
Cigar가 벌어준 1,000만달러는 투자액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니 사업가 앨런은 경주마 사업에서는 실패한 셈이다. 그러나 그는 명예와 즐거움을 얻었다.

마사의 둥근 천장에는 크리스털 칸델라를 달았고, 목장 안에 테니스장을 만들어 가족·친구들과 휴가를 즐겼다. 한번은 목장 매니저에게 골프장을 만들어 달라고 보채다 거절당하자 곧바로 캘리포니아에서 골프장을 구입해 버렸다. 초기 Cigar의 성적이 신통치 않자 아내 마들렌 파울손(Madeleine Paulson)에게 선물해 버렸다. 그래도 혈통은 최고라고 하면서…. 하지만 나중에 Cigar가 모래주로로 전향하여 첫 경주에서 승리하자 그가 생산한 최초의 암말(Filly) 챔피언 Eliga를 씨암말로 주고 도로 빼앗았다. 그리고 시가를 물고 2년간 최고 마주의 포즈를 취했다.

지난해까지 미국 경마 사진 기수의 복장에서 A.P란 글자가 자주 보였는데, 이것은 아내의 복색 M.P(Madeleine Paulson)에서 A.P로 바뀐 약간 치사한 장면을 기억나게 하는 모습이다.

잔디주로에서 모래(Dirt)주로로
모래나 잔디에서 다른 곳으로 바꾼 후 성공을 거두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660만달러를 수득한 John Henry도 잔디주로로 옮긴 후 제대로 달리기 시작했고, Vigors는 모래주로로 전향한 후 슈퍼스타가 되었다. Cigar도 잔디주로에서 모래주로로 옮긴 후 최고 경주마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사정이 약간 다르다. 3세 봄부터 잔디경주에 출주하기 시작했으나 4세 가을까지는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1번 출주하여 Allowance경주에서 한 번 이겼을 뿐이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잔디주로의 말은 평평하고 넓은 굽을 가지고 있으며 달릴 때 무릎을 높게 든다고 하는데, Cigar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조교사 William I. Mott에 의하면 4세가 되던 해 가을 모래주로로 전향하기 전까지 Cigar의 마체(특히 무릎)는 성숙되지 않았다. 조교 때도 모래주로에 나서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부마인 Palace Music이 유럽·미국의 잔디주로 GⅠ경주에서 승리한 까닭에 자식도 당연히 잔디주로 말로 간주됐을 듯하다. 주위에서 왜 모래주로로 바꿔 보지 않느냐고 충고할 때도 Mott 조교사는 묵묵히 잔디만 고집했다. 무릎이 약하고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교사는 4세 가을까지 이기기 위한 훈련은 시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마체가 성숙되기 전까지는 모래와 잔디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지하실 구석에 몇백년 동안 잠재워 둔 포도주가 제 맛을 내듯이.

마침내 4세가 되던 1994년 10월 모래주로 첫 도전인 Allowance경주에서 승리하고 한 달 후 곧바로 NYRA(New York Racing Association) GⅠ경주에 현역 최고 기수인 Jerry Bailey를 태우고 모래주로 16연승 북미지역 타이기록 수립의 대장정에 돌입하게 된다(그때까지 Cigar의 기수였던 Mike Smith는 NYRA경주 때 최고 인기마인 Devil His Due로 옮겨가고 Jerry는 대타로 등장했다). 4세인 1994년 10월부터 96년 7월까지의 16연승 대기록 행진에는 GⅠ경주 10승과 Dubai World Cup이 포함되며, 94년도 연도 대표마 Holly Bull과 95년도 켄터키 더비와 벨몬트스테이크스의 Thunder Gulch가 희생양이 되어 경주 은퇴를 강요받기도 했다(위 2두의 마필은 각각 Cigar와의 경주에서 왼쪽 앞다리를 다쳐 경주마 생활을 마감하였다).

20분간의 기립박수
매디슨스퀘어 가든에서 화려한 은퇴식을 가졌으나 생식능력이 없어 Kentucky Horse Park에서 사진 모델로 전락하여 쓸쓸한 여생을 보내고 있지만, 미국민들에게는 경주마 시절 모든 영광을 다 누렸다고 기억되고 있는 Cigar는 결승전 전방까지 페이스를 조절하려는 Jerry의 손가락을 끊어 낼 듯한 엄청난 파워를 지녔다. 5세 때 10전 10승 중 8승이 GⅠ경주였으며, 6세 때 Dubai World Cup 승리를 포함한 8전 5승의 전적으로 2년 연속 연도대표마에 선정되었다. 5세 때 브리더스컵 클래식 경주(2,000m)에서의 우승기록 1분 59초 58은 아직도 이 경주의 최고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6세 때인 1996년 6월 13일 15연승을 기록 중인 Cigar를 위해 시카고에서 Arlington Citation Challenge경주를 특별히 마련했다.

여기에는 50년 전 16연승의 위업을 달성한 Citation의 조교사 Jimmy Jones도 초대되었다. 130파운드(58.9㎏)의 부담중량으로 거뜬히 승리한 Cigar는 3만4,000여명의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내는 바람에 가뿐 숨을 몰아쉬며 20분간이나 한자리에 서 있어야만 했다.

황제같은 은퇴생활
14연승 때인 Dubai World Cup경주 전후부터 Cigar의 앞다리와 굽은 상당히 망가진 상태였다. 게다가 중동까지의 장거리 여행으로 피로가 누적되었다. 조교사 Mott가 마방에서 쉬고 있는 Cigar를 찾을 때마다 그의 커다란 눈은 항상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가요. 쉬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은퇴 직전 Jockey Club Gold Cup경주에서 3세마 Skip Away에 머리차로 지고(Skip Away는 Cigar를 이긴 후 승승장구하며 960만달러를 획득하여 Cigar에 이어 역대 2위의 수득상금마가 된다) 은퇴 경기가 된 6세 때의 브리더스컵 클래식에서 Alphabet Soup에 이어 3착으로 골인한 후(코차+머리차) 앨런은 대답했다. “그래, 이제 그만하자. Cigar, 널 사랑한다.”

일본중앙경마회(Japan Racing Association)로부터 Cigar를 3,000만달러에 팔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있었으나 앨런은 거절했다. 그를 멀리 떠나 보내면 더 많이 보고 싶어질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투자자의 모습에서 진정한 Horse Man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그후 매매가액 2,500만달러의 75% 지분을 쿨모어 목장의 Ashford Stud에게 양도했다. 쿨모어 목장은 Cigar를 맞이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제일 근사한 마사를 지었다. 필자는 1999년 초 그 목장을 방문하여 1,000만달러짜리 Cigar의 호화저택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생식능력이 없었다. 2년간 최고 전문가들에 의해 검사받고 치료받았으나 허사였다. Cigar는 그 목장에서 조금 떨어진 Kentucky Horse Park에 있었다. 그날 오후 늦은 시간에 그를 찾아 갔을 때 이미 1일 3회의 쇼를 끝내고 낡은 마방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Cigar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당시 그의 눈망울은 너무 크고 시렸다. 금방이라도 굵은 눈물방울이 맺힐 것만 같았다. 돌아서는 필자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던지….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앨런이 그를 정말 편히 쉬게 해 주었구나’

쇼가 끝나고 패독에서 Cigar가 달리기 시작하면 15년 선배인 John Henry가 그 뒤를 따르고 그 뒤에는 더비마 Bold Forbes가 따라 달린다. Cigar는 은퇴해서도 황제처럼 쉬고 있다.


글 / 김종식 푸른목장 대표
2006/01/04 01:18 2006/01/04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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