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3대 피아노 소나타 "비창", "월광",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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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태우

  Beethoven
Ludwig van Beethoven
(1770 - 1827)
음악양식으로서의 소나타
서양음악의 작곡기법과 형식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하나를 꼽는다면 그것은 '소나타(Sonata)'가 될 것이다. 이는 성악곡에 반대되는 기악곡을 통칭하는 말로 우리가 접하는 고전음악의 적어도 절반 이상이 독주악기나 관현악이나, 실내악을 위한 기악곡들이며, 이것들은 모두 큰 의미의 '소나타'다. 이것이 피아노와 같은 독주악기를 위한 경우에 우리는 그대로 '소나타'라고 부르지만 그외의 경우에 '교향곡'이라고도 부르며 '현악 사중주'라고도 하며 '협주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컨데 '소나타'라는 것은 빠르고 느린 몇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작품을 일컫는 것이다. 작품으로서의 소나타 이외에 악장의 작곡양식으로서의 '소나타'가 있다. 어떤 음악에 대해 설명할 때 '1악장, Allegro, 소나타형식'과 같은 말을 자주 하게 되는데 소나타들의 첫 악장은 거의 예외없이 소나타형식을 취하고 있다.

피아노와 같은 독주악기를 위한 소나타는 3악장의 구성이 흔하지만, 실내악이나 관현악을 위한 소나타 (현악사중주곡, 교향곡)는 4악장의 구조가 많은데 이 경우 세 번째 악장은 짧은 무곡이 삽입된다. 위에서도 언급됐듯이 소나타의 첫 악장은 소나타형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소나타형식이란 어떤 것인가.

소나타 형식은 비교적 빠른 템포를 취하여 크게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혹은 도입부, 발전부, 재현부)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제시부에서는 제 1주제가 으뜸조로 나타나며 이 주제의 조성을 곡의 조성으로 본다. 제 1주제는 조성에 관계없이 활기차고 생기있는 느낌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주제가 제시되면 그 선율과 화성을 소재로 하여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경과구가 나타나게 되고 이어서 2주제가 시작된다. 2주제의 조성은 1주제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보통은 1주제의 으뜸조에 대한 딸림조나 관계장조(1주제가 a단조였다면 2주제는 C장조가 된다는 식으로)로 나타나게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활기있는 제1주제에 비해 2주제는 서정적이고 '한 숨 돌리는 듯 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고전파시대의 소나타들을 가만히 들어보면 이러한 특징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전개부는 제시부에 포함된 소재들을 음악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 부분이다. 1주제의 화성, 2주제의 화성, 경과부의 선율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다양한 조성이 등장한다. 대위법적인 기술이 등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재현부는 제시부가 다시 등장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 2주제의 조성이 제 1주제와 동일하다. 음악의 오묘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서로 대조적인 분위기와 상이한 - 실제로는 종속적인 - 조성을 가지는 두 가지의 주제가 발전부에서의 복잡한 전조를 거듭하여 그 음악적인 갈등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에 동일한 조성을 가지는 두 가지의 주제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때에는 분위기마저 흡사하다. 대립하는 두 가지 사상이 갈등을 겪은 후에 융화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주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섭리가 아닐까? 음악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깊이있고 도덕적이며 건전한 것이라는 것을 여러 작곡양식을 통해 증명할 수 있지만 소나타형식은 가장 쉽고도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악장은 통상적으로 서정적인 분위기를 가지는 느린 악장이다. 조성은 소나타형식의 1,2주제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1악장의 딸림조 혹은 관계장조이며, A-B-A의 세 도막형식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다. A부분은 아름다운 선율이 가요풍으로 노래되고, B부분은 딸림조로 전조되어 다소 폴리포닉 (몇 개의 선율선이 겹쳐져서 진행되는 양식)하게 진행된다. 되돌아오는 A부분은 첫 머리보다 화성적인 구조가 약간 복잡하다. 소나타형식의 2주제와 마찬가지로 '한 박자 쉰다'는 느낌이 강하다.

마지막 악장에는 론도형식이 가장 많이 사용된다. 템포는 첫 악장보다 훨씬 빠르고 주제의 동기는 짧고 간결하다. 론도(Rondo)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주제를 끼고 몇 가지의 다른 경과부가 계속해서 등장하는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경과부와 경과부사이에는 반드시 주제가 삽입되며 직접 다음의 경과부로 넘어가는 일은 없다.

소나타를 구성하는 악장들은 전체적으로 변증법적인 구조를 지닌다. 대립되는 성격의 악장이 2개 연속하여 등장하고 종악장에서 갈등은 해소된다. 요컨데 정-반-합이다. 악장을 구성하는 소나타형식과 같은 원리이다. 이처럼 합리적인 곡의 구성은 가장 많은 작곡가들의 공감을 일으켰고 서양음악의 '주류'로 자리하게 하였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베토벤은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다. 이것은 건반악기를 위해 작곡된 음악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위대한 유산이다. 비록 최만년에 소나타를 작곡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피아노 소나타는 베토벤의 전생애에 걸친 작곡양식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32곡의 소나타 중 어느 한 곡도 그 수준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는 곡은 없지만 그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세 곡은 '3대 소나타'라고 불리는 8번과 14번, 그리고 23번이다. 이들은 각각 '비창', '월광', '열정'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고 있는데 8번을 제외하고는 작곡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붙여진 이름이며 상업적인 냄새도 풍기고 있지만 이렇게 훌륭한 곡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접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의미에서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베토벤을 진정한 낭만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근거는 평생동안 끊임없이 추구한 새로운 양식에의 시도에 있다. 교향곡에 스케르초를 도입한 것이라든가, 5번 교향곡에서 같은 리듬의 주제를 전곡에 걸쳐 집요하게 다루는 모습과, 주제를 전개시키고 발전시키는 천재적인 솜씨, 피날레에 느닷없이 끼어드는 스케르쪼의 동기, 합창을 도입한 교향곡, 3번 교향곡의 피날레에 등장한 대규모의 변주, 독주악기의 카덴짜로 시작하는 협주곡등등, 그가 시도한 새로운 양식은 수도 없을 정도이다. 피아노 소나타도 예외가 아니어서 '3대 소나타'라고 불리는 소나타들 중 정형적인 소나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은 23번 하나 뿐이며, 8번과 14번에는 당시까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파격이 이루어지고 있다. 각각의 곡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1934, 1933 Mono
Piano Sonatas No. 8 "Pathetique", No. 14 "Moonlight", No. 23 "Appasionata"
BEETHOVEN
Artur Schnabel (piano)
EMI 8CD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1악장 (991KB)
2악장 (706KB)
3악장 (481KB)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1악장 (574KB)
2악장 (257KB)
3악장 (759KB)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1악장 (1.02MB)
2악장 & 3악장 (1.50MB)

MP3 Player가 없으시다면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 op.13 "비창"
이 소나타는 베토벤 자신이 "비창적 대 소나타(Grande Sonate pathetique)"라고 명명한 작품이다. 처음 듣는 순간부터 곡이 끝날 때 까지 한 순간도 귀를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8번 소나타의 작곡양식 자체가 대단히 충격적인 것이다. 8번 소나타는 그의 모든 작품들 중에서 가장 호모포닉(단선율을 위주로하는 화성진행)한 곡이다. 선율은 명쾌하고 왼손의 반주도 극히 단순하다. 두터운 화음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곡의 구성이 너무나 극적이고, 맹렬한 분위기와 감미로운 노래, 연주하는데 필요로 하는 기교를 훨씬 상회하는 압도적인 연주효과로 인해 극히 산뜻한 효과를 얻어 내었고 나아가 대중적인 인기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8번 소나타가 파격적이라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작곡양식의 변화가 아니고 1악장의 제시부 앞에 커다란 서주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느린 속도를 지시하는 Grave라는 악상기호와 곡을 개시하는 c단조의 으뜸화음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이 곡의 제목인 '비창 (혹은 비애)'라는 말은 이 서주의 분위기에 의한 것이다. 서주는 점차 고조되어 오른손의 레치타티보, 빠르게 하강하는 선율로 변화하면서 Allegro di molto e con brio의 소나타형식 제시부로 돌입하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서주의 재료가 소나타형식의 발전부와 코다에 다시 등장한다는 점이다. 왼손의 맹렬한 트레몰로를 타고 등장하는 1주제는 그 예가 없을정도로 공격적이며, 이 주제를 발전시키는 과정은 더욱 극적이다. 2주제는 1주제의 분위기와 대조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으며, 정석대로라면 C단조의 관계장조인 E-flat장조로 작곡되어야 하지만 e-flat단조를 취해 어두운 느낌을 지속시키고 있어 소나타 작곡양식의 전형적인 형태를 조금 벗어나 있다. 하지만 2주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결국 E-flat장조가 나타나게 된다. 곡의 마무리부분에 다시 서주의 주제가 등장하고 제 1주제만을 이용해 악장을 끝맺는다.

2악장은 전형적인 가요 형식의 악장으로 나른하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인상적이다. A-B-A의 전형적인 세도막형식, 주제의 멜로디는 대중음악에서도 자주 인용하는 친근한 것이다. 3악장 역시 전형적인 론도이다. A-B-A-C-A-B-A-coda라는 명확하고 교과서적인 론도이며 첫 악장과 같은 조성이지만 어둡고 비극적인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선율은 어떤 것이나 쉽고, 화성적으로 교묘한 지연(delay)이 이루어져있기는 하지만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해도 음악을 감상하는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피아노 소나타 14번, C sharp단조, op.27-2 "월광"
너무나도 유명한 곡이다. 이 곡을 모르는 사람도 제목만은 들어본 적이 있을정도로 잘 알려진 곡이다. '월광(달빛)'이라는 제목은 베토벤이 죽고 난 뒤인 1832년, 시인이었던 H.F.L.Rellstab가 이 곡의 1악장을 두고 '달빛에 물든 루체른 호반위를 지나는 조각배를 떠오르게 한다'는 발언을 한 데에서 연유된 것이므로 굳이 제목이 주는 이미지와 곡의 이미지를 연관시킬 필요는 없으며, 그렇다고 애써 거부할 필요도 없다. 1악장의 음악적 이미지를 시인이 이야기한 회화적 이미지와 연관시키는 것은 분명 이 곡의 감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좀 더 상상의 나래를 펴서 2악장과 3악장까지 연관시켜 보아도 재미있다.

이 곡 역시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1악장과 3악장이 소나타형식이며 2악장이 짧은 미뉴엣이라는 의미에서는 그다지 특이할 것이 없지만 1악장의 템포가 'Adagio sostenuto'라는 사실, 보통 활기찬 느낌의 1악장과는 달리 꿈꾸는 듯이 느껴지는 나른한 선율이 지속된다는 점이 대단히 특이한 첫악장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모차르트는 첫악장을 주제와 변주로 구성한 전례도 있었다). 또한 소나타형식의 화성전개도 매우 비전형적인 것이지만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악장전체가 숨막힐 것 같은 고요로 가득 차 있으며 선율은 마음이 아플정도로 감상적이고 아름답다. 악장 전체를 통해 한 번도 감정의 기복이 고개를 들지 않는다.

2악장은 활기찬 미뉴엣이다. 완전한 악장의 기능을 한다기에는 앞 뒤의 악장이 너무 대규모적이어서 고요한 첫 악장과 격렬하기 이를 데 없는 종악장 사이를 이어주는 간주곡같은 인상이다. 멜로디는 우아하고 리듬은 재미있다. 두 가지의 미뉴엣, 그리고 첫 번째 미뉴엣의 반복이라는 매우 고전적인 형식이며 미뉴엣의 반복이 끝나는 순간 단절없이 3악장으로 돌입한다.

3악장은 'Presto agitato(매우 빠르고 격하게)'라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속도기호가 붙어있다. 대규모의 소나타형식이며, 기존에 존재했던 어떤 음악보다도 격렬하고 열정적인 음악이다. 서두의 격한 16분음표들의 돌진은 1악장의 서두주제와 분명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분위기는 완전히 반대이다. 숨막힐 듯 긴박한 1주제에 이어 선율선이 제법 살아있는 제 2주제가 등장하는데 관계장조를 취한다는 원칙은 여기서도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1주제의 급박한 분위기는 2주제에 와서 더욱 고조되고 비극적인 느낌까지 준다. 1악장이 가지고 있던 팽팽한 긴장을 3악장에서 분노의 표출에 가까운 형태로 무너트리고 있는 것 같다. 발전부 역시 긴박한 선율의 연속이며 이 급속한 진행은 단 한번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다가 곡이 가장 크게 요동치며 현란 오른손의 아르페지오, 트릴이 나타나는 순간에 갑작스레 adagio로 돌변하면서 한 숨을 돌리게 된다. 이어 다시 presto의 템포가 돌아오고, 2주제를 소재로 한 짤막한 코다로 들어간다. 코다는 두 개의 동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2주제를 소재로 전반부를, 1주제를 소재로 후반부의 종결을 짓고 있다. 역시 두 주제 사이의 타협은 조성적인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나타나지 않는다.

피아노 소나타 23번, F단조, op.57 "열정"
베토벤의 모든 피아노 소나타가운데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반면 그 내용이 쉽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어서 처음 베토벤의 소나타를 접하는 사람에게 있어 8번이나 14번처럼 빨리 친해질 수 있는 곡도 아니다. 이 곡은 연주하기도 무척 어렵다. 이 곡을 칠 때는 건반도 별나게 무겁게 느껴지고(느낌만이 아닌 것 같다) 요구되는 손가락 기교도 상당히 고도의 것이다. 1악장과 3악장의 폭발하는 듯 한 코다는 상당한 팔힘을 필요로 하며 무엇보다 이 곡이 가지고 있는 불타는 듯한 에너지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정말 고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이 곡을 연주해낼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할 정도로 이 소나타는 훌륭하다. 연주하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에게나 금욕적일 정도의 마음가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1악장 첫머리부터 곡은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다. 피아니시모로 두 옥타브의 간격을 두고 동일한 선율을 제시하는 1주제는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 정도이며 처음으로 포르테가 나타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Allegro assai(매우 빠르게)라는 악상기호를 가지고 있지만 그다지 빠른 템포라는 느낌은 받을 수 없다, '운명의 동기(빰빰빰 빠암 하는)'가 왼손에 등장하고 가끔씩 폭발하는 포르테와 왼손의 셋잇단음표가 주는 불길한 초조함 속에서 밝은 제 2주제가 서서히 떠오른다. 이 주제는 1주제의 관계장조인 A-flat장조이므로 3대 소나타중 유일하게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고 있는셈이다. 이후 복잡한 발전부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재현부가 나타난 후 거대한 코다로 들어간다. 음악은 난폭해질 대로 난폭해져서 아르페지오가 건반을 휩쓰는 듯이 지나가고 그야말로 뜨거운 느낌으로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음악적인 고조를 보여준다. 이러한 고조의 절정에서 음악은 갑자기 사그라들면서 템포를 떨어뜨리고 불길한 느낌의 '운명의 테마'가 고요하게 몇 차례 반복되다가 완전히 음악이 정지한다. 그리고 갑작스레 piu allegro(더욱 빠르게), 포르테시모의 '운명의 동기'가 튀어나오고 2주제를 소재로 하여 잠시 진행되다가, 다시 운명의 동기를 소재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1주제를 소재로하여 급격히 힘을 떨어뜨리면서 다시 숨막히는 고요 속에 악장을 끝맺는다. 피아니시모로 시작하여 피아니시시모로 끝을 맺는다는 놀라운 발상이다. '차가운 껍질과 뜨거운 알맹이'라고나 할까?

2악장은 주제와 변주, 음악의 깊이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단정하게 정돈된 분위기 속에서 엄숙하게 주제가 제시되고 변주를 거듭해 나갈수록 음악은 고조되어 나간다. 강약의 대비에 의해 고조되어 나간다는 것 보다 뒤로 갈수록 음악적인 감흥이 넘쳐나는 것이다. 악장의 종결 직전까지 그 흐름을 따라가보면 그 행복감은 정말 참기가 힘들 정도이다. 마지막에는 다시 주제가 재현되고, 의사끝맺음(거짓종지)가 있은 다음 갑작스레 격렬한 7도의 아르페지오가 연주되고(이 효과는 정말 압도적이다) 바로 3악장으로 연결된다.

3악장은 소나타형식의 커다란 악장이다. 앞 악장에서의 격한 화음을 연속해서 두들겨대고 계속 아래로 하강하여 첫 번째 주제를 제시하게 된다. 1주제의 경과부는 상당히 길고 또 비관례적으로 제시부를 반복하지 않는데, 대신 발전부와 재현부를 통째로 반복하게 되어 있다.이 길다란 반복의 목적은 뒤이어지는 코다의 격렬함을 훨씬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3악장의 코다는 베토벤이 정말 대단한 각오로 만들어낸 격한 악상이다. 베토벤은 이 코다의 효과를 위해 3악장의 첫머리 템포를 Allegro ma non tanto(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로 지시했는데, 그것은 Presto의 코다가 주는 효과를 한껏 살리기 위한 포석인 것이다. 코다의 도입은 무곡풍의 완전히 새로운 소재로, 그리고 이어지는 종결은 제 1주제를 소재로 하고 있다. 정말 인정사정없이 밀어붙이는 압도적인 효과를 가진 음악이다.

추천음반
1980, 1973 Digital, Stereo
Piano Sonatas No. 8 "Pathetique", No. 14 "Moonlight", No. 23 "Appasionata"
BEETHOVEN
Emil Gilels (piano)
DG 9CD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좋은 연주가 정말 많다. 이 곡들을 연주한다는 것이 피아니스트들에게 있어서는 필생의 대업이므로 어느 누구의 연주를 듣더라도 좋은 연주를 들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범위를 좁혀서 그 중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연주들을 꼽으라면, 우선 박하우스와 켐프를 그리고 길렐스, 리히터, 솔로몬, 루빈스타인, 브렌델...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좋은 연주가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연주들은 특별히 빼어난 연주들이다.

그 중 굳이 '최고의 연주'를 뽑으라면, 눈 딱 감고 에밀 길렐스를 꼽고싶다. 유감스럽게도 '3대 소나타'가 한 장에 들어가있는 음반은 없지만 낱장으로 발매되어 있는 것도 있고, 가급적이면 부담이 되기는 하겠지만 전집을 구입하는 것을 권한다. 완전한 전집은 아니지만 (길렐스는 전곡 녹음 도중 사망하였다) 녹음되어 있는 곡들은 어느 것이나 최고의 연주들이다. 전곡으로 재발매되면서 음질도 매우 좋아졌으며, 작품번호가 없는 몇몇 곡들까지 추가된 데다 가격도 버짓 프라이스로 책정되어 오히려 경제적이다. 동일한 금액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 중에 최고의 선택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길렐스의 베토벤 소나타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호수처럼 고요하고, 봄바람처럼 따스하며 때로는 믿을 수 없을만큼 과격하다. 특히 "3대 소나타"의 연주는 빼어나다.

위에 MPEG3로 제공된 슈나벨의 30년대 연주는 최초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이라는데 일단 큰 의의가 있는 연주다. 지금 들어도 전혀 위화감 없이 서정미와 열정이 공존하는 훌륭한 연주로 레퍼런스 음반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특히 3대 피아노 소나타중에선 14번 "월광"과 23번 "열정"이 뛰어나다.

한 곡씩 따로 선택하라면, 8번은 박하우스(58년, DECCA), 14번은 켐프(65년, DG)와 폴리니, 23번은 리히터와 박하우스, 아쉬케나지의 연주를 권하고 싶다. 연주 하나하나에 대해 설명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지만 박하우스, 리히터, 아쉬케나지가 연주하는 23번 3악장을 비교하면서 들어보면 정말 굉장하다. 세 명 다 굉장히 빠른 템포를 취하고 있지만 박하우스의 연주는 터치에 대단한 무게가 실려있어서 마치 돌진하는 덤프트럭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리히터의 23번은 어느 모로 보나 최고의 23번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음반인데, 특히 이 곡 특유의 뜨겁고 맹렬한 느낌을 전달하는데 있어서는 어떤 연주도 감히 비교될 수 없다. 아쉬케나지의 연주는 앞의 두 사람과는 맥락을 완전히 달리하는 연주인데 한 부분씩을 뜯어본다면 좀 약해보이는 면도 없지 않지만 곡의 전체적인 균형이 완벽하다는 점이 특히 훌륭하다. 음색도 대단히 세련되어 있고 기분좋게 흐르는 스케일 큰 음악은 상쾌하게까지 느껴진다. 아마 2악장의 연주만을 놓고 본다면 가장 뛰어난 연주일지도 모른다.

14번과 23번은 굴드(67년, CBS)나 호로비츠(72년, CBS)의 독특한 연주도 들어볼 수 있다. 좋은 연주가 너무나 많아서 고민스러운 곡들이지만, 해석도 모두 다양하므로 하나에 치우치지 말고 폭 넓게 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글쓴날짜: 1999/08/04

http://www.goclassic.co.kr/basic/199908.html
2007/06/30 22:03 2007/06/30 22:03

Upward Pateller Fixation

Reprinted from: The Atlanta Equine Clinic

Intermittent upward patellar fixation is a condition whereby the horse�s pelvic limb temporarily "locks" in extension. As a result, there is a delay in flexion of the limb. The delay in flexion can range from milli-seconds to over several minutes. A short delay in flexion may manifest only as a subtle pelvic limb asymmetry or lameness; severely affected horses (with a long delay in flexion) may be unable to flex the affected limb without assistance.

What is the "Patella"? The horse�s stifle joint is analogous to the human knee. Just like humans, horses have a patella, or "knee cap", which slides along the distal aspect of the femur (thigh bone) during flexion of the joint. The patella slides within a groove (called the trochlear groove) and serves as a fulcrum for the extensor muscles and their tendons as they course over the front of the stifle (or knee) joint. The patella is attached proximally to the quadriceps and biceps femoris muscles and distally to the tibia. In humans, the patella is attached to the tibia by one distal patellar ligament. Horses have 3 distal patellar ligaments: the medial patellar ligament, the middle patellar ligament, and the lateral patellar ligament.

How does the horse �lock� the pelvic limb? Horses have the ability to lock (or fixate) the pelvic limb in extension. This is possible due to the unique anatomy associated with the horse�s stifle joint. The proximal aspect of the medial femoral trochlea is shaped similar to a hook or ski jump. By placing the space between the medial and middle patellar ligaments over this hook, horses can "lock" their pelvic limbs in extension. Once locked, minimal effort is required to maintain limb extension. A similar locking apparatus in the thoracic limbs allows horses to sleep while standing. Therefore, patellar fixation while standing is a normal process in the horse.

 

What is �intermittent upward patellar fixation�? Although patellar fixation is normal in the standing horse, it can produce pelvic limb dysfunction if it occurs during exercise. Inadvertent locking of the patella over the medial femoral trochlea prevents normal flexion of the affected limb(s). Consequently, pelvic limb asymmetry and lameness frequently become evident.

What causes upward patellar fixation? There are 3 primary causes of upward patellar fixation in the horse:

  • Lack of fitness: Lack of quadriceps and/or biceps femoris muscle tone results in an inability to quickly pull the patella up and off of the medial femoral trochlea.

  • Straight or upright pelvic limb conformation: This places the medial femoral trochlea further distad in closer proximity with the patella, facilitating patellar fixation.

  • Excessive distal patellar ligament length: This places the patella proximad in closer proximity with the medial femoral trochlea, where it can inadvertently "catch" or "lock"

It should be noted that the factors which cause upward patellar fixation are often interrelated. For example, an unfit horse will generally have increased laxity (and therefore increased length) of the distal patellar ligaments. Furthermore, if unfitness is secondary to another disease process (such as neurologic disease), intermittent upward fixation may also occur secondarily. Therefore, it is important to assess the horse as a whole prior to determining the cause for upward patellar fixation.

What are the clinical signs? Horses with intermittent upward patellar fixation will exhibit clinical signs during their attempt to flex the pelvic limb from an extended position. In acute severe cases, the pelvic limb may stay locked in extension. The horse may not be able to flex the stifle and tarsus without assistance. In some instances, the condition may temporarily resolve only to recur after taking a few steps. These signs are quite obvious and diagnosis is relatively simple if the condition is severe. Most of the time, however, there is only a "catching" of the patella as it slides up and over the hook and the limb does not truly lock in extension. In this situation, there may only be a mild pelvic limb asymmetry or lameness. This type of lameness can be easily confused with other problems and therefore may present a dilemma in regard to accurate diagnosis. Following are common clinical signs associated with mild to moderate forms of intermittent upward patellar fixation:

  • Non-weightbearing pelvic limb lameness
    • This may be distinguished from tarsal (hock) soreness which is usually weightbearing in nature
    • The horse will frequently drag the toe of the affected limb(s) during exercise
      • Visible wearing of the dorsal aspect of the toe/shoe may be apparent.
    • The foot of the affected limb(s) will have a low-arc flight pattern
    • The horse will usually exhibit a shortened cranial phase to the stride
  • Resistance in the canter
    • The horse will resist the canter, particularly if circled toward the more affected limb
    • Resistance may be most noticeable during the transition between the trot and canter, when the horse is forced to extend the pelvic limb for a prolonged period
    • Many horses will toss their head, rear, or stop when asked to canter. This may be due to their "anticipation" of impending upward patellar fixation.
    • The horse would rather trot than canter (which is harder for the normal horse)
  • Consistent lead changes or cantering on the wrong lead
    • The horse avoids prolonged pelvic limb extension with the affected limb. This is particularly apparent when cantering in a circle towards the affected limb.
  • The canter is very rough or "bouncy"
    • This occurs as a result of consistent delay in pelvic limb flexion from the extended position
  • Swelling, heat, and/or pain may be associated with one or both stifle joints
    • Upward patellar fixation causes patellar instability which in turn may result in femoropatellar synovitis
  • The horse drags his hind toes during exercise
  • Resistance and/or difficulty when walking up and down hills, or when backing up
    • These situations force the horse to extend the pelvic limb for a prolonged period
    • Rather then fully extend the pelvic limb(s), the horse may "crouch" while walking
    • Rather than flex the pelvic limb(s) normally, horses will often swing their limbs to the outside
    • This may cause the lameness to be confused with neurologic disease (such as EPM or stringhalt)
  • Lameness is most severe when the horse is first taken out of the stall
    • Many horses will improve as the workout progresses
  • Lameness becomes more obvious following an extended period of stall rest
    • Loss of muscle and patellar ligament tone exacerbate the upward patellar fixation
    • The horse does not improve (and may worsen) as a result of taking time off
  • The horse does not respond to anti-inflammatory (e.g. Phenylbutazone) therapy
    • Intermittent upward patellar fixation is a mechanical problem and is not inflammatory-mediated

As with many cases of pelvic limb lameness, secondary abnormalities such as thoracolumbar ebaxial (back) and proximal thoracic suspensory ligament soreness are also present. These are generally detected during the passive lameness evaluation and are suggestive of chronic pelvic limb asymmetry/ lameness.

How is upward patellar fixation diagnosed? Clinical signs are characteristic and, if the limb is locked in extension (i.e. the case is severe), diagnosis is simple. As previously mentioned, however, most cases are mild and diagnosis may be more difficult. A detailed history and careful clinical evaluation are essential parts of a proper workup. One helpful diagnostic aid involves placing the horse in one or more situations where prolonged pelvic limb extension is normally required. Such situations include walking up and down hills, the trot-to-canter transition, and backing up. When confronted with these situations, the affected horse will either 1) demonstrate upward patellar fixation by temporarily locking the pelvic limb, or 2) cheat by switching leads, swinging the limbs to the outside, avoiding pelvic limb extension, etc.

Many times, a slight hitch or "catch" is visible as the pelvic limb begins to flex from an extended position. This "catch" is most easily detected by visualizing the point of the hock as the horse picks the limb up to advance it cranially. Infrequently, an audible "snap" or popping sound is also evident during exercise (particularly walking).

In many instances, upward patellar fixation can be produced in affected horses by manually forcing the patella upward and outward. The examiner may actually be able to keep the pelvic limb locked in extension using minimal effort.

Since the problem is usually secondary to conformation and/or level of fitness, it is almost always bilateral. However, affected horses historically exhibit clinical signs in one pelvic limb. It is not until the more affected limb is successfully treated that a problem in the contralateral limb is manifested.

How is upward patellar fixation treated? Currently, there are 5 forms of treatment for intermittent upward patellar fixation:

  • Exercise: Lack of fitness results in decreased thigh muscle and patellar ligament tone. With decreased supporting muscle and ligament tone, it becomes easier for the patella to lock on the femur and harder for it to replace within the trochlear groove. In subtle cases of upward patellar fixation where conformation is relatively good, increased exercise alone may result in resolution of the problem.
    We frequently ask the client to grade the level of their horse�s current level of fitness on a scale of 1 to 10 (1=very unfit; 10=extremely fit). We suggest achieving a fitness level of at least 7-8 (if possible) prior to pursuing other forms of treatment. This will rule out unfitness as a major contributor to the problem as well as increase the effect of other therapy.

  • Corrective Shoeing: Since fixation of the patella occurs when the pelvic limb is extended, prolonging the extension phase of the stride can make "unlocking" more difficult. Alternatively, shortening the amount of time the pelvic limb spends in extension allows the horse to unlock his/her patella before the distal patellar ligaments become excessively tight. Since the conformation of the distal pelvic limb and/or the toe length is intimately related to pelvic limb breakover, the farrier can frequently alleviate the problem via corrective trimming/shoeing. Rolling and/or rockering the toe of the shoe, applying a full (egg-) bar shoe, and/or the use of wedged pads (when needed) are commonly used techniques. In many cases, we are able to help the pelvic limbs break over before intermittent upward patellar fixation occurs.

  • Hormonal Therapy: The administration of estrogen has shown to prove benefical for some horses exhibiting intermittent upward patellar fixation. The presence of estrogen within the body of the horse may increase tension of various supporting ligaments. These include the collateral, suspensory, cruciate, and distal patellar ligaments. Increasing distal patellar ligament tension helps to relocate the patellar further distad, thereby making upward patellar fixation more difficult. This in turn may alleviate clinical signs.
  • It should be noted that estrogen is also a powerful behavior modificator in the horse. It is often used for stallions and geldings that are excessively difficult to handle, aggressive towards people or other horses, or overly anxious at shows and other events. Estrogen is very effective at reducing anxiety and resistance as well as improving overall behavior in these horses. Treatment usually consists of 2 injections of estrogen (25mg) in the muscle twice weekly for 4 consecutive weeks, then as needed therafter.

    Administration of estrogen to mares usually causes them to exhibit clinical signs of estrus (heat). Since this change in behavior is generally undesirable, we do not recommend its use in mares.

  • Intraligamentous Infusion of Counterirritant: This form of therapy is usually referred to as "blistering". Blistering involves the inject of an irritative substance into soft tissue(s) in an attempt to create an inflammatory reaction. The irritative substance usually consists of iodine 2% in an almond oil base. This substance can elicit an inflammatory response for up to 30 days depending on the amount used and the location of injection. It is important to remember that fibrosis and scar tissue formation within normal soft tissues will occur as a result of severe inflammation. As you know, scar tissue does not function like normal soft tissue. Therefore, blistering in certain areas may inhibit proper function of associated soft tissue.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Atlanta Equine Clinic typically does not institute blistering as typical form of treatment for soft tissue problems.

    However, in the case of intermittent upward patellar fixation, we gain a biomechanical advantage by replacing normal tissue with scar tissue. The infusion of counterirritant within and around the medial and middle patellar ligaments results in the elicitation of an intense inflammatory reaction by the horse�s body. With inflammation, fibrosis and scarring of the patellar ligaments occur. During the scarring process, soft tissues will contract (shorten). As the patellar ligaments shorten, the patella is pulled up and over the hook of the medial femoral trochlea and into its normal position within the trochlear groove. At this point, it becomes more difficult for the horse to lock the patella and easier to flex the pelvic limb from an extended position. In our hands, this from of treatment has been extremely effective in a vast majority of cases involving intermittent upward patellar fixation.

  • Medial Patellar Desmotomy: The medial patella ligament is one of the key structures (along with the patella and middle patellar ligament) that is required to lock the patella on the femur. Since the problem represents the horse�s inability to quickly disengage the patella from the medial femoral trochlea, surgical resection of the medial patellar ligament results in complete resolution of the problem. Once the medial patellar ligament is resected, upward patellar fixation becomes impossible and the clinical signs associated with this condition disappear. Consequently, this has become a very popular form of treatment for horses with intermittent upward patellar fixation.
    It is extremely important to note, however, that the medial patellar ligament also performs another function: stabilization of the patella within the trochlear groove of the femur. Without tension from the medial patellar ligament, the patella becomes unstable within the femoropatellar joint. Femoropatellar synovitis and frequently osteoarthritis result. Since the stifle is high-motion in nature, chronic inflammation within this joint poses a significant concern in regard to future performance soundness. Persistent femoropatellar joint inflammation typically needs to be addressed on a continual basis and often requires considerable maintenance therapy.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Atlanta Equine Clinic views this form of treatment inappropriate except for the most severe of cases that have proven refractory to the other forms of therapy.



    http://www.eastwindwalkers.com/horseinformation/stiflepage2.html
2007/06/30 15:02 2007/06/3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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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n Joint Diseases of Horses
Factsheet - ISSN 1198-712X   -   Copyright Queen's Printer for Ontario
Agdex#: 460/660
Publication Date: 07/76
Order#: 76-071
Last Reviewed: 08/97
History: The Material in this Factsheet was originally prepared by Robert C. McClure, Gerald R. Kirk and Phillip D. Garrett, Department of Veterinary Anatomy, School of Veterinary Medicine, for publication in Science and Technology Guide, University of Missouri - Columbia Extension Division.
Written by: Robert C. McClure; Gerald R. Kirk; Phillip D. Garrett;

Table of Contents

  1. Overview of joints and diseases
  2. Bone Spavin
  3. Bog Spavin
  4. Ring Bone

Overview of Joints and Diseases

The junction between any two bones is known as an articulation or a joint. There are several types of joints. Some are fixed or practically immovable, such as those found between the skull bones. Others are freely movable and have articular cartilage and joint capsules.

The articular cartilage covers the ends of the bones and reduces friction between bones. The joint capsule surrounds the joint and consists of a tough, outer coat and a thin inner layer which lines it. This inner layer is termed the synovial layer and it produces a fluid known as the synovial fluid. This fluid resembles egg white in consistency and lubricates the joint when the bones move against one another.

Figure 1 is a picture of a cross section of a movable joint.Parts of the outer layer of some joint capsules are thickened to form ligaments. Ligaments connect bone to bone while tendons connect muscle to bone (Figure 1).

Arthritis is an inflammation of a joint involving the bones, the articular cartilages, ligaments and joint capsules. In an infected or irritated joint the amount of fluid increases and produces swelling. Bacteria may enter the joint through a wound of the joint capsule resulting in damage to the bones and cartilages. The joint may then become immovable. To treat this condition the affected joint is rested. Medication is used to counteract the inflammation. If the arthritis is severe, immobilization and resting of the joint is continued for 4 to 6 weeks. The outcome is usual favorable if bone damage or new bone growth has not occurred.

An injury to a ligament is defined as a sprain. Some ligaments hold bones firmly together and allow very little movement; others allow considerable movement. If an abnormal stress or movement is placed upon a joint such as overextension of a joint, the ligament may be torn. The amount of injury depends upon how much force is placed upon the ligament. If the ligament is torn completely away from its attachments to a bone, recovery is difficult. Adequate rest is necessary in hope that the torn ligament may repair itself.

Figure 2 is a picture of a joint mouse. Joint mice are pieces of bone or cartilage found within the joint cavity and may be the result of a fracture. These produce pain when lodged between the articular surfaces and may also produce arthritis. Surgical removal is usually successful (Figure 2).

A "stifled" horse results from the "locking" of the patella (knee cap of man) in the stifle joint. Normally a horse stands for hours without tiring of the hindlimb musculature. This is due to the "locking" mechanism of the hindlimb. The "locking mechanism" consists of the loop formed by the junction of two patellar ligaments with the patella and the bony projection of the lower end of the femur (thigh bone).

Figure 3 is a picture of the medial view of a stifle joint.The stifle joint is locked in an extended or straightened stiff position whenever the horse is unable to "unlock" the loop of ligaments from over the bony projection. Sometimes a slap on the croup will cause the horse to jump and "unlock" the stifle joint. Often his "locking" will reoccur. Whenever surgery is necessary to correct the condition, the medial patellar ligament is cut on the inside of the stifle joint in order to prevent further "locking" (Figure 3).


Bone Spavin

Figure 4 is a picture of the medial view of hock joint.Bone spavin is defined as an inflammation of one or more bones of the hock andmost often causes an arthritic condition of the affected bones. In bone spavin the joint between the bones on the inside of the hock become immovable. Quick stops,such as those which occur during roping and other stresses, along with mineral deficiencies, may produce bone spavin. Horses with full, well-developed hocks tend to have less incidence of bone spavin than those with narrow, thin hocks. Bone spavin occurs on the inside of the hock (jack spavin). It may occur between the bones within the hock joint and cannot be seen or palpated (blind spavin). A large percentage of horses affected with blind spavin recover completely.

Jack spavin is usually a bony growth of variable size.The bony enlargement pushes out against a tendon that lies over the inside hock area (Figure 4).The cause of bony growth cannot be fully explained. When the hock is flexed or bent, pain is produced and as a result the hindlimb is not raised very high. Therefore, the horse drags his foot (Figure 5).Figure 5 is a picture of a horse dragging his foot.

Treatment consists of alleviating as much pain as possible. By cutting the tendon veterinarians can remove one source of pain. However, the outlook for full recovery from jack spavin is usually not favorable even with surgery. The horse will probably be useable, but rest and time are needed for repair to occ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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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g Spavin

There is no bony enlargement; swelling, heat and pain are most evident on the front surface of the hock (Figure 6).

Figure 6 is a picture of the solf swellings on the hock of a horse.The cause may be due to nutritional deficiencies, accidental injury to the hock joint or the hocks being too straight (hereditary). If the condition is caused by conformation or too straight hocks, it cannot be treated successfully. Veterinarians have many factors to consider in order to determine the cause and to advise the best treatment. Anti-inflammatory drugs may help bog spavin caused by nutritional deficiencies or injury. The drugs decrease inflammation and prevent swelling of the joint capsule. A bandage around the hock prevents excessive build-up of fluid and swelling. The horse is rested for 4 to 6 weeks. Adding vitamins and minerals to the diet may relieve bog spavin. Horses 6 months to 2 years of age are most often affected with bog spavin.


Ring Bone

Figure 7 is a picture of the bones of the horse's hoof. This condition is characterized by new bone growth which occurs on the first, second or third phalanx (high or low ringbone). The phalanges are the three small bones extending from the fetlock to the hoof (Figure 7).Ringbone is more common on the forefeet than the hindfeet.

Ringbone is due to an inflammation of the tough fibrous layer which surrounds the bones. The inflammation may be caused by stresses which pull on ligaments attached to the bone. The new bone growth may lead to arthritis and stiffening of the joints between the fetlock and the pastern. If the tough, fibrous layer surrounding the bones is cut (such as in wire cuts), new bone growth may result. The new bone may grow into the joints between the phalanges and produce stiffening of the joints. In early ringbone, swelling and heat are present over the affected areas. To assure a complete diagnosis, it is necessary to take radiographs. Again the veterinarian has many factors to consider in advising the best treatment. If the joints are involved, chances for full recovery are poor. Immobilization of the foot and a long period of rest are often necessary. Corrective shoeing is also advisable in some ca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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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al: (519) 826-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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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기행2] 문학과 예술의 기원을 찾아서
번호 201377 글쓴이 류가미(ryugami) 조회 3804 등록일 2006-12-15 14:57 추천413 톡톡1

기원을 찾아서



▲ 삶과 죽음의 사이클을 나타내는 곡물신 중 하나였던 디오니소스.http://depthome.brooklyn.cuny.edu/ classics/dunkle/tragedy/dionysa.gif 

안녕하세요. 류가미입니다. 한 주일 동안, 별일 없이 잘 보내셨는지요? 오늘 약속대로 문학과 예술의 근원을 찾아 여행을 떠나볼까 합니다. 자 이제 마음속에 한 가지 질문을 떠올려 보세요. 문학과 예술은 과연 어디에서 시작했을까? 독자 여러분들은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내놓으셨나요?

독자 여러분이 어떤 답변을 내놓았건, 여러분의 답변은 다음 세 개의 범주 안에 속할 것입니다. 세 개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답변이 있다면 댓글에 올려주세요. 어쩌면 새로운 문예 이론이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문학과 예술의 기원이 무엇이냐를 두고 비평가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쳤지만 그들의 주장은 크게 묶어보면 다음 세 가지 범주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심리학적 기원설입니다.

이 학설은 인간이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특별한 목적 때문이 아니라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내적 욕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학설은 예술과 문학의 기원을 인간의 본능적인 창조 심리, 즉 예술 충동(art impulse)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 충동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이 학설을 지지하는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모방본능설, 유희본능설, 흡인본능설, 자기표현본능설 등으로 의견이 갈라집니다.

모방본능설은 외부의 사물을 모방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예술의 기원이 되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유희본능설은 문학과 예술이 유희 본능에서 출발했다는 입장입니다. 흡입본능설은 문학과 예술이 남을 즐겁게 해주어서 그들을 끌어들이려는 흡인본능에서 출발했다는 입장입니다. 다시 말해, 새들이 노래 소리로 짝을 불러들이듯 인간들도 다른 이들을 즐겁게 할만한 행위를 통해 다른 이들을 끌어들인다는 겁니다. 자기표현 본능설은 예술과 문학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려는 본능에서 시작되었다는 이론입니다.

두 번째는 사회학적 기원설입니다.

이 학설은 문학과 예술이 심미적이고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 생활과의 깊은 연관 속에서, 즉 사회적 필요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학설을 지지하는 비평가들은 문학과 예술이 사회적 결속과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발생했다고 봅니다. 모내기 할 때 부르는 노동요처럼 문학과 예술은 사람들에게 노동하려는 의욕을 자극하고 사람들 사이의 협동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제의적 기원설입니다.

제의적 기원설은 문학과 예술의 기원을 고대의 종교적인 제의에서 찾을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고대 종교적 제의에서는 시와 춤과 노래가 한데 어우러진 원시적인 가무가 행해졌는데 그 원시적인 가무에서 문학과 예술이 발생했다는 이론입니다. 고대 제의에서 행해진 원시적인 가무를 발라드 댄스(Ballad Dance)라고 합니다. 발라드 댄스는 원래 미분화된 원시종합예술 형태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원시적인 가무 속에 들어 있던 언어는 문학으로 소리는 음악으로 몸짓은 무용과 연근으로 분화되었다는 것이지요.

비평가들은 문학과 예술의 기원을 이처럼 크게 세 가지 학설로 구별하지만, 저는 이 세 학설이 그 중 하나만 옳고 나머지는 틀린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고대의 문학과 예술은 인간의 예술 충동을 표현한 것인 동시에 집단의 노동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독하게도 제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문학과 예술의 기원은 어디일까라는 질문에 대답을 내리기 전에, 잠시 여기서 고대 그리스에서 벌어졌던 디오니소스 축제에 대해서 알아볼까 합니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말 그대로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드리는 제의였습니다. 디오니소스는 원래 신이 아니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모든 신의 아버지인 제우스와 테베의 왕녀 세멜레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세멜레를 질투한 헤라의 농간으로, 세멜레는 제우스가 떨어뜨린 번개에 맞고 죽게 됩니다. 그때 세멜레는 임신을 하고 있었는데, 제우스는 아기를 살리기 위해 세멜레의 뱃속에서 아기를 꺼내 자기 허벅다리에 넣습니다.

아기는 아버지의 허벅다리 속에서 남은 달을 다 채운 뒤에 세상에 태어났지요. 출생 후 그는 뉘사 산의 동굴에서 요정이 가져다주는 소젖을 먹고 자라게 됩니다. 그러다가 거인들에게 사로잡혀 온 몸이 찢기는 불행을 당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제우스의 어머니인 레아의 도움으로 그는 찢긴 몸을 회복하고 다시 부활합니다. 부활한 디오니소스는 신으로 인정받아, 올림포스 산에 사는 열두 신의 반열에 오르게 되지요.

신화를 보면 알 수 있듯, 디오니소스 신은 온몸이 찢긴 채 살해되어, 이듬해 공동체의 먹거리로 부활하는 곡물신의 계보에 속하는 신입니다. 디오니소스에게는 디튜람보스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훗날 디튜람보스는 디오니소스신 뿐만 아니라, 그에게 바치는 찬가를 일컫는 말이 됩니다.

디튜람보스는 두 개의 문을 거친 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의역하자면, 두 번 자궁 문을 열고 나온 자라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 이 말은 처음에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오고 나중에는 아버지의 허벅지(자궁)에서 나온 디오니소스를 가리킵니다.

삼한시대 제천 의식인 영고와 동맹과 무천이 쌀의 파종(5월)과 추수(10월)와 관련이 있듯이, 디오니소스 축제는 밀의 파종과 수확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 같은 지중해성 기후에서는 주로 겨울밀을 키우는데, 겨울밀은 11~12월 사이에 파종해 3~4월 사이에 추수합니다. 다시 말해, 디오니소스 축제는 농사물의 풍작과 다산을 기원하는 제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 국가 아테네는 농사를 짓는 시골과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도시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디오니소스 축제가 시작된 것은 농사를 짓는 시골 마을에서부터였습니다. 시골에서 벌어지는 디오니소스 축제를 디오니소스 소축제 혹은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라고 합니다. 반면 아테네의 시가지에서 벌어지는 디오니소스 축제를 디오니소스 대축제 혹은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라고 합니다.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 당시, 합창과 연극 경연대회가 벌어졌던 디오니소스 극장.http://www.utexas.edu/courses/introtogreece/lect14/jDionysusTheater0411060500.jpg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는 그리스 달력으로 포세이돈 월에 행해졌습니다. 포세이돈 월(the month of Poseidon)은 현재 달력으로 11~12월에 해당됩니다. 대략 겨울밀의 파종시기와 일치합니다. 반면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엘라페볼리온 월(the month of Elaphebolion)에 벌여졌습니다. 이 또한 대략 겨울밀의 추수 시기와 일치합니다.

12월에 행해진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는 남근 모양의 조각상을 든 여자들의 행렬로 시작됩니다. 이 남근상을 든 여자들 뒤로 바구니를 든 어린 소녀들과 길고 커다란 빵을 든 사람 그리고 다른 봉헌물을 든 사람과 물단지를 든 사람과 포도주 단지를 든 사람들이 잇따릅니다. 이런 행렬이 끝난 후에는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합창과 연극 경연대회가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는 훗날 벌어지는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의 원형이 됩니다.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기원전 6세기 경, 도시국가 아테네의 참주였던 페이스시트라토스에 의해서 국가적인 행사로서 그 형태가 갖추어집니다.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와 달리, 국가적 행사였습니다. 사실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아테네 시민들의 단결과 도시 국가 아네테와 지중해 연안에 있는 아테네 식민도시의 결속을 다지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자국민의 단결과 다른 국가와 친선을 다지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행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의 준비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를 주관하는 것은 최고 집행관인 아르콘(Arcon)이었습니다. 도시국가 아테네에는 열명의 최고 집행관이 있었는데, 축제를 담당하는 최고 집행관은 행사를 돕는 두 명의 보좌관과 열명의 감독관에 의해 선출되었습니다.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총 5일에 걸쳐서 펼쳐졌습니다.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첫째 날 아고라에 있는 디오니소스 신전에서 디오니소스신의 나무조각상을 내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디오니소스 상을 든 사제들 뒤로 아테네 시민들과 아테네에 거주하는 외국인, 그리고 아테네의 식민도시에서 온 대표들이 뒤따랐습니다.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와 마찬가지로 이 행렬에는 나무 혹은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남근상을 실은 수레뿐만 아니라 바구니를 든 소녀, 물병과 포도주병을 든 사람들도 뒤따랐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아테네가 최전성기를 맞이한 5세기 중엽에는 아테네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무기들과 각국에서 보내온 축하 선물들이 이 행렬 대열에 참여했습니다.

디오니소스 상을 든 행렬은 시가지에 있는 다른 신들의 사원을 돌아다닌 후, 디오니소스 극장 앞으로 갑니다. 디오니소스 극장 앞에는 제단이 설치되어있었습니다. 행렬이 제단 앞에 도착하면, 디오니소스신의 가면을 쓴 제사장이 황소를 희생 제물로 바칩니다. 희생 제의가 끝난 후에는 디튜람보스 합창 경연 대회가 열렸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디튜람보스는 디오니소스 신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에 대한 찬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디튜람보스를 부르는 합창단(코러스)을 후원하는 사람들은 아테네에서 가장 부유하고 힘있는 유지들이었습니다.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없는 사람이 50명이 넘는 합창단을 후원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후원자들의 자존심이 걸려있었기 때문에 이 디튜람보스 합창 경연대회는 매우 경쟁적이었다고 합니다.

합창 경연대회가 끝나면 다시 황소를 제물로 바치는 희생 제의가 치러졌고 그 후에는 모든 아테네 시민들이 즐기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이 때 술 취한 사람들이 행렬을 이루어 아테네 시가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이 행렬을 코모스(Komos)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도시 디오니스소스 축제의 첫날이 끝납니다.

축제의 두 번째 날부터는 비극, 희극, 사튀로스극의 경연대회가 벌어집니다. 이 연극 경연 대회의 심사위원들은 제비를 통해 뽑았습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디오니소스 극장 제단에서는 어린 돼지가 희생물로 바쳐졌습니다. 두 번째 날에는 5편의 희극이 공연되었고 셋째날, 네쨋날, 다섯째날에는 매일 비극 3편과 사튀로스극 1편이 공연되었습니다. 사튀로스는 디오니소스를 따라다니는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양인 반인반수를 말합니다. 사튀로스극은 이러한 사튀로스를 흉내내는 짧고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말합니다.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와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벌어지는 합창과 연극들은 모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디오니소스 신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왜 아테네 사람들은 해마다 합창과 연극 경연대회를 열어, 디오니소스의 삶과 죽음을 모방하고 싶어했을까요? 죽음과 삶이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표현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본능적인 충동이었기 때문일까요?

또한 디오니소스 축제는 사람들을 독려해 농업 생산성을 높이려는 파종제와 추수제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더불어 아테네 시민의 단결이라는 사회적인 목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디오니소스 신에 대한 제의였습니다. 축제 동안 벌어지는 합창과 연극은 원시종합예술인 발라드 댄스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저는 문학과 예술의 기원은 어디일까라는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볼까 합니다. 예술의 기원은 표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내적 충동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아니면 노동 생산성을 높이고 사회적 결속을 다지기 위한 사회적 목적에서 시작되었을까요? 또 아니면 고대에 신에게 지내던 제의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인간의 내면 심리와, 그들이 모듬살이하는 사회, 그리고 그들이 믿는 종교는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음주에는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 때, 비극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한,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평안한 한주가 되시길.....



ⓒ 류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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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30 07:27 2007/06/30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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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기행3] 그리스 비극, 산양의 노래
번호 204285 글쓴이 류가미(ryugami) 조회 2603 등록일 2006-12-20 16:45 추천387 톡톡1

그리스 비극, 산양의 노래

 

 

안녕하세요. 류가미입니다. 세월이 빨라, 벌써 올해의 마지막달 12월이 되었군요. 봄에 꽃피고 여름에 무르익다가 가을에 결실을 맺고 겨울에 사라져가는 한 해의 주기가 또 이렇게 끝나가고 있습니다.

저 정도의 나이가 되면, 인생에도 이러한 주기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식물들의 한해살이처럼 나도 이런 삶과 죽음의 주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나 역시 모든 인간들처럼 정해진 운명을 따라 예정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셈이지요. 자신이 정해진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 자신이 언젠가 죽게 될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일은 공포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공포스러운 운명 앞에서 나약하기 그지없는 자신과 타자의 존재에 대한 연민을 느낍니다. 사실 그리스 비극이 담고 있는 것도 이러한 공포와 연민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입니다.

지난 시간에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디오니소스의 찬가와 비극, 희극, 사티로스극 경연대회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디오니소스의 찬가는 디튜람보스라고 합니다. 사티로스극은 산양의 뿔과 당나귀의 귀와 꼬리를 단 배우들이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반인반수(半人半獸) 사티로스(Satyros)와 실레노스(Silenos)를 연기하는 짧은 소극이었습니다.

그럼 희극은 뭘까요? 희극은 그리스어로 코모이디아(Komoidia)라고 합니다. 바로 이 말에서 코미디라는 말이 파생되어 나왔지요. 코모이디아(Komodia)는 코모스(Komos)와 오이데(oide)이라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oide라는 단어는 노래를 뜻합니다. 또 코모스는 디오니소스 축제 첫날, 합창 경연대회가 끝난 후, 술 취한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행렬을 말합니다. 이때 술 취한 사람들은 남근상을 들고 행렬을 했습니다. 그리고 남근에 관련된 노래를 불렀지요. 다시 말해 코모이디아는 코모스 행렬이 부른 음탕하고 짓궂고 우스꽝스러운 남근에 관한 노래입니다. 바로 이 노래에서 희극이 발생한 것이지요.

반면, 비극은 그리스어로 트라고디아(tragodia)라고 합니다. 트라고디아는 트라고스(Tragos)와 오이데(oide)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 입니다. 오이데는 알다시피, 노래를 뜻합니다. 그럼 트라고스는 무엇을 뜻할까요? 트라고스는 산양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트라고디아는 산양의 노래라는 뜻이 됩니다.

왜 그럼 비극에 산양의 노래라는 이름이 붙여졌을까요? 대체 여기서 산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 사튀로스극에서 사용되었던 실레노스 가면 http://www.cnr.edu/home/bmcmanus/mask1a.gif 

독수리가 제우스, 부엉이가 아테네를 상징하는 동물이듯, 산양은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듯이, 디오니소스는 곡물신의 계보를 잇는 신입니다. 모든 곡물신들은 겨울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공동체의 먹거리로 부활합니다. 11~12월이 있었던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와 3~4 월에 있었던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가 겨울밀의 파종과 추수와 관련있다는 사실은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산양은 점성학에서 12월 23일 동지 때부터 시작되는 염소자리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산양은 풍요와 번영을 보장하는 태양이 일년 중 가장 약해졌을 시기를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대지가 황폐해지고 곡물신이 몸이 찢긴 채, 대지에 매장되는 시기를 말합니다.

실제로 산양은 험준한 바위산에 살며 끝없이 높은 곳에 오르려는 성향이 있다고 합니다. 산에 올라보았자, 먹잇감 찾기는 점점 힘든데도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높은 곳에 오르려는 산양의 본성은 그들의 생존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산양은 인간과 많이 비슷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꼭 생존에 필요한 것도 아닌데, 높은 곳에 오르려는 충동이 있습니다. 세속적으로 인간은 더 높은 지위를 원하고 더 높은 명성을 원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간이 도달하려는 것은 세속적인 차원을 넘어선 저 무엇입니다.

세속적인 차원에서 높이 오르려는 추구는 결국 어떤 형식으로든지 몰락으로 종결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높이 올라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해진 운명에 따라 예정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높이 오르려는 인간의 충동은 이러한 인간적 한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그 무엇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더 높이 오르자는 인간의 추구는 종교적인 성향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산양이 바위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고 합니다. 산양의 행동은 오르기 위해서 내려가고 얻기 위해서 버리는 묘한 역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인간의 모든 종교는 우리에게 이같은 역설을 가르칩니다. 초월적인 신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선 개인의 야심과 자만심을 희생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어쨌거나 그래서인지 산양은 더 높은 곳에 오르고 싶다는 충동과 더불어 자기보다 더 상위에 있는 존재를 발견하고 그 아래 무릎 꿇는 겸손을 상징합니다.

자, 다시 이야기의 원점으로 돌아가 보죠. 산양의 노래 다시 말해, 비극은 더 높이 오르자는 인간의 의지와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보다 더 높은 원리에 굴복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담은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비극은 상승과 몰락 그리고 그 이후에 찾아오는 영적인 자각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연대회는 비극 경연대회였습니다. 이 비극 경연대회를 통해서 많은 재능 있는 비극 작가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작가라고 불리는 아이스킬로스(BC 525~BC 456), 소포클레스(BC 496~BC 406), 에우리피데스(BC 484?~ BC 406?)입니다.

비극경연대회에서 아이스킬로스는 13번 정도 우승했고 소포클레스는 24번 우승했고 에우리피데스는 5번 우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그리스 고전 시대라고 불리는 아테네의 최전성기에 살았던 동시대 사람이었습니다. 아이킬로스는 소포클레스의 스승이었고 에우리피데스는 소포클레스의 후배였습니다.

이 세 사람들의 작품을 모두 훌륭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저서, ‘시학’에서 언급했듯 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비극작가는 소포클레스였습니다. 소포클레스는 이래저래 복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테네가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번성하던 시절 아테네 근교 콜로누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무기 상인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그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죠. 그에게 비극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 바로 아이스킬로스였습니다.

▲ 소포클레스 http://www.christusrex.org/www1/vaticano/GP-Sophokles.jpg 

소포클레스는 처음에는 비극 작가가 아니라 배우로서 활동했다고 합니다. 잘 생긴 외모와 노래 솜씨 덕분에 그는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BC 468년, 28세 때 비극 경연대회에 나와 스승인 아이스킬로스를 꺾고 첫 우승을 합니다. 그 후 그는 수많은 작품들을 썼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왕(Oedipos Tyranos)입니다.

분명히 오이디푸스 왕은 소포클레스의 비극이지만, 오이디푸스 왕이 소포클레스가 창작한 캐릭터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다른 비극작가들처럼, 소포클레스는 이미 그 당시에 널려 알려진 미토스를 희곡화했습니다. 우리는 미토스(Mythos)를 신화라고 번역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미토스는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허구의 이야기를 뜻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토스가 희곡화되면 어떤 변용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 비극은 하루 동안 한 장소에서 일어났던 한 가지 사건을 그리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시간 장소 사건의 일치, 이것을 삼일치라고 합니다. 이렇게 길고 긴 시간 동안 여러 장소에서 일어났던 미토스(이야기)를 하루 동안 한 장소에서 단일한 사건 안에서 담아내기 위해서는 희곡적 장치들이 필요합니다.

자, 예를 들어 볼까요? 오이디푸스 왕의 신화는 사실 2대에 걸쳐 코린스, 델피, 테베 지역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연대기 순으로 사건을 기록한 오이디푸스왕의 미토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는 젊은 시절 자신의 친구 펠로포스의 어린 아들 크립시포스를 강간합니다. 크립시포스는 강간당한 수치심을 못 이겨 자살하고. 아들을 잃은 펠로포스는 라이오스에게 너는 아들 손에 죽게 될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시간이 흘러 라이오스는 테베의 왕이 되고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라이오스는 델피에 신탁을 묻자 만약 그가 아들을 갖게 되면 그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습니다.

신탁을 받은 후, 라이오스는 아내 이오카스테를 멀리합니다. 그러자 이오카스테는 남편에게 술을 먹이고 그를 유혹합니다. 그리고 열 달 후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신탁이 두려웠던 라이오스는 태어난 지 사흘 밖에 안 된 아들의 두 발목에 구멍을 내서 묶은 다음 양치기를 시켜 키테론 산에 버립니다. 이로써 라이오스는 결혼과 아이들의 수호자인 헤라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 http://bama.ua.edu/~ksummers/cl222/oedipus.jpg 

그러나 왕의 명령을 받은 양치기는 아이를 버리지 못하고 그를 코린스의 양치기에게 넘깁니다. 그 후 코린스의 양치기는 그 어린 아이를 자식이 없는 코린스의 왕 폴리보스에게 바칩니다. 폴리보스 왕은 아이의 부은 발을 보고 그에게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오이디푸스는 활기찬 붉은 머리에 자신만만한 청년으로 자라납니다. 어느날 오이디푸스는 연회에 온 손님들에게 주어온 아이라는 놀림을 받습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오이디푸스는 델피로가 신탁을 청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오이디푸스는 그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신탁을 받습니다. 그 신탁을 받은 후, 오이디푸스는 코린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북쪽으로 방랑의 길을 떠납니다.

그 즈음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커다란 문제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그가 아이를 버린 것에 분노한 헤라가 테베에 이집트의 괴물인 스핑크스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스핑크스는 여자의 얼굴과 사자의 몸과 뱀의 꼬리와 독수리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명한 예언가 테이레시아스는 라이오스 왕에게 헤라의 용서를 비는 제물을 올리라고 경고 합니다. 그러나 라이오스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다시 한번 델피에 신탁을 받기 위해 남쪽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운명은 이 아들과 아버지를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없는 좁은 협곡에서 만나게 만듭니다. 라이오스의 부하들이 오이디푸스에게 길을 비킬 것을 명합니다. 오이디푸스에 마음 깊은 곳에서 웬지 모를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는 라이오스에게 길을 비켜주기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라이오스는 채찍으로 오이디푸스의 머리를 때립니다. 분노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인지도 모르는 채, 아버지와 그의 부하들을 죽입니다. 라이오스가 죽은 후, 테베는 이오카스테의 오빠 크레온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한편 스핑크스는 테베 도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피시움 언덕에서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던집니다. 사람들이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스핑크스는 그를 죽여 언덕 밑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아무도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기 때문에 피시움 언덕 밑에는 시체들이 쌓여만 갔지요. 그 죽은 사람 가운데는 크레온의 아들도 있었습니다. 스핑크스에게 아들을 잃은 크레온은 스핑크스를 무찌르는 사람에게 나라와 왕비 이오카스테를 주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테베에 온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찾아갑니다. 스핑크스는 두발로 서기전에 네발로 걷고 그런 다음 세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는 수수께끼를 내고 오이디푸스는 그것은 인간이라고 답합니다.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자 스핑크스는 수치감을 느껴 스스로 언덕 아래로 몸을 던집니다. 스핑크스를 물리친 오이디푸스는 크레온의 약속대로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고 테베의 왕이 됩니다. 그 후 그는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네 명의 자녀를 둡니다.

시간은 흘러, 오이디푸스가 테베의 왕이 된 지 18년이 되던 해, 갑자기 테베에 역병이 돕니다. 역병이 신의 분노 때문이라고 생각한 오이디푸스는 크레온에게 델피에 가서 신탁을 받아오라고 시킵니다. 델피에서 온 신탁은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찾아 처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찾기 위해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부릅니다. 테이레시아스의 예언과 오이디푸스를 버린 양치기의 증언을 통해,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라이오스의 살해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찌릅니다.

오이디푸스 왕의 미토스는 몇 십 년에 걸쳐 테베 델피 코린스에서 일어난 복잡한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이와 달리, 오이디푸스가 왕이 된지 18년 되던 해, 테베의 왕궁에서,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의 살해자라는 것이 밝혀지는 단 하나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이디푸스 왕의 미토스는 파블라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을 희곡화한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플롯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토스(파블라)가 희곡(플롯)화 되면서 생기는 변용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보다 자세하게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그럼 아무쪼록 좋은 한주일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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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30 07:26 2007/06/30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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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기행4] 오이디푸스, 운명(Moira)와 미덕(Arete)사이에서
번호 212010 글쓴이 류가미(ryugami) 조회 3858 등록일 2006-12-29 08:32 추천374 톡톡2

오이디푸스, 운명(Moira)와 미덕(Arete) 사이에서

 

 

 

안녕하세요. 류가미입니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있습니다. 날씨가 추우니까 마음까지 움츠러듭니다. 더군다나 댓글 붙는 것 보면 시베리아에 혼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몇몇 댓글에는 답변을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잘못하면 연재글이 너무 개인적인 푸념으로 바뀔까 싶어 참았습니다. 원래 푸념이라는 것은 한번 늘어놓으면 굽이굽이 아홉 곡절이거든요.

어쨌든 저는 이번 연재가 독자들과 의사소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갑자기 댓글 다는 것이 어색하더라도 반응이 없어 뻘줌해하는 절 생각해 댓글 달아주세요.

이번 시간에는 지난 번 시간에 이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오이디푸스 왕의 미토스(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소포클레스가 자신의 희곡에서 오이디푸스 왕의 미토스를 어떻게 배치했는지 살펴볼까 합니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의 왕궁에서 시작됩니다.

▲ 1958년 하르케 극장(Hartke Theatre)에서 공연된 오이디푸스 왕 http://drama.cua.edu/HartkeSeason/Archive%20Photos/images/oedipus%20rex%201958_jpg.jpg 

1. 테베의 시민들이 테베 왕궁으로 찾아와 오이디푸스에게 전염병을 해결해달라는 탄원을 합니다.

2. 그때 전염병의 원인을 물으러 간 크레온(이오카스테의 오빠)이 테베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크레온은 오이디푸스 왕에게 역병을 없애려면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추방하라는 신탁의 내용을 전합니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이제껏 찾지 못했는가하고 의아해하고, 크레온은 당시 스핑크스의 혼란 때문에 제대로 살해자를 찾지 못했노라고 답변합니다. 그러자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던 자신이 이 문제도 풀겠다고 장담합니다.

3.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찾기 위해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부릅니다. 오이디푸스는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라이오스의 살해자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늙은 예언자는 좀처럼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오이디푸스가 집요하게 추궁하자 예언자는 라이오스를 죽인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오이디푸스는 크레온과 테이레시아스가 공모해 음모를 꾸민 것이라 의심하고 분노합니다.

4. 바로 그때 이오카스테가 등장해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살해자가 아니라고 안심시킵니다. 그녀는 먼 옛날 라이오스가 자신이 아들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그녀가 낳은 아들을 버렸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라이오스의 버려진 그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입니다.

5.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가 아이를 버리라고 시킨 양치기를 찾으라고 명령합니다.

6. 그때 오이디푸스에게 코린스에서 전령이 찾아옵니다. 그 전령은 코린스의 폴리보스 왕(오이디푸스를 길러준 아버지)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 전령이 바로 테베의 양치기에게서 버려진 오이디푸스를 받아 폴리보스 왕에게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전령은 오이디푸스가 폴리보스의 왕의 친아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7. 그때 오이디푸스의 부하들이 라이오스의 명령을 받았던 양치기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양치기가 라이오스 왕의 부탁을 받고 어린 오이디푸스를 죽이려다가 죽이지 못하고 다른 양치기(다시 말해, 코린스에서 온 전령)에게 넘겨주었다고 말합니다.

8. 모든 것이 밝혀지자,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살을 합니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됩니다.

9. 오이디푸스는 크레온에게 라이오스의 살해자인 자신을 추방시켜 달라고 부탁합니다.

▲ 소포클레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소크라테스 http://faculty.maxwell.syr.edu/gaddis/HST210/Oct9/Socrates%20Bust.jpg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 궁전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한 나절 동안의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한나절 동안에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 2대에 걸친 사연들이 모두 압축되어 있습니다.

드라마투르기(희곡 작법)는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은 주제에 따라 재구성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드라마투르기는 플롯을 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2500년이 지난 지금 봐도 대단한 드라마트루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 작가라도 오이디푸스 왕의 신화에서 이만큼의 플롯을 짜내기는 힘들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시학’의 제7장에서 어떻게 비극의 플롯을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작가의 의도대로 이야기를 재배치하는 플롯이야 말로 비극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합니다. 그는 비극의 플롯은 발단과 전개와 결말의 구조를 가져야 하며 이 과정이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야 재현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박진감을 높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훗날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고전주의 비평가들과 극작가에게 영향을 주어 삼일치 법칙(tree unites)으로 정립됩니다. 삼일치 법칙에 따르면 희곡은 하루 동안, 한 가지 장소에서 한 가지 플롯만을 다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러한 삼일치 법칙은 어색하기 그지없습니다. 사실 이러한 삼일치 법칙은 고전주의가 유행했던 17세기 프랑스나 이탈리아 연극에서나 지켜졌을 뿐입니다. 18세기 극작가였던 셰익스피어만 해도 이러한 삼일치 법칙은 가볍게 무시합니다. 삼일치 법칙에 대해서는 17세기 고전주의를 다룰 때 자세히 하기로 하고 이제 다시 오이디푸스 왕으로 돌아가 봅시다.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 동안 공연되었던 비극이 다루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승과 몰락의 주기입니다. 봄에 싹이 텄다가 겨울에 이우는 한해살이 식물처럼 인간들도 그 상승과 몰락의 주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피할 수없는 주기를 우리는 흔히 운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 요즘 말로 하면 인간의 자아는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몰락과 소멸에 저항합니다. 정신분석학자 융은 ‘심리학과 연금술’이라는 책에서 운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운명이라는 것은 악마적인 의지를 말한다. 꼭 운명이 내(ego) 의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운명이 자아와 맞설 때면 사람들은 운명 속에 담긴 신성하거나 혹은 악의에 찬 힘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 운명에 굴복할 때 운명은 신의 뜻이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운명과 희망 없는 지긋지긋한 싸움을 벌인다. 그럴 때 우리는 운명 안에서 악마를 본다.

사실 고대 그리스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는 신의 뜻 다시 말해 운명을 거스르는 오만함(Habris)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 동안 공연되었던 수많은 비극들 중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이 작품이 결국 질 수밖에 없는 운명과의 싸움을 벌이는 인간의 의지와 미덕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미덕(arete)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자질을 뜻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탁월한 장점을 이용해 운명에 굴종하지 않고 삶을 개척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는 신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용서할 수 없는 죄지만 동시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미덕(arete)입니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 자신의 탁월한 장점으로 삶을 개척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운명의 각본 속에 빠져들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탁월함 자체가 그의 운명을 이루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스핑크스와 맞서서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의 탁월한 자질이 그를 파멸로 몰아갑니다. 만일 오이디푸스가 의문의 핵심까지 파고들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도 풀지 못했을 것이고 동시에 그렇게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갈 출생의 비밀을 캐려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에게 ‘바로 당신의 미덕(arete)이 당신에게 재앙을 가져온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 소크라테스에 대한 기록을 남긴 플라톤 http://www.mala.bc.ca/~mcneil/jpg/plato.jpg  

디오니소스 축제 때, 사람들은 비극을 보면서 인간의 미덕으로도 어쩔 수 없는 저 커다란 운명의 힘에 순종할 것을 배웁니다. 그러나 소포클레스(BC494~BC406)와 거의 동시대에 아테네에 살았던 소크라테스(BC469~BC 399)는 이러한 운명주의적인 시각을 거부합니다. 그에게는 운명보다 미덕이 더 중요하고 신보다는 인간의 영혼(psyche)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소포클레스에 비해서 세속적인 복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소포클레스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페르시아와 맞서 승리했던 페리클레스 시대에 전성기를 보냈다면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도시들이 서로 다투던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대에 전성기를 살았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아버지가 부유한 무기 상인이었다면 소크라테스의 어머니는 아이 낳는 것을 도와주는 산파였습니다.

소포클레스가 빼어난 미남으로 배우로서 인기를 끌었다면 소크라테스는 당대에 가장 못생긴 추남 중에 하나로 손꼽혔습니다. 소포클레스와 소크라테스가 가장 극명하게 차이 나는 점은 소포클레스가 아테네의 민주주의 아버지 페리클레스 밑에서 공직을 맡았다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불경죄로 기소되어 독약을 먹고 죽었다는 것일 겁니다.

죽을 때까지 소크라테스는 책을 쓴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그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들입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주변인물들의 기록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기록들 가운데 누구의 것을 얼마만큼 믿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를 만든 것은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생전에 30편에 이르는 책을 썼는데, 그 책들은 단 한편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사람들이 묻고 답을 하는 희곡 형식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그의 희곡 형식의 글들은 대화편(對話篇, dialogues)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플라톤의 대화편의 주인공은 바로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서의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고 어디까지가 플라톤 자신의 이야기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을 구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어쨌거나 플라톤의 철학을 요약하는 키워드는 아레테(arete), 프시케(psyche) 그리고 이데아(idea)입니다. 아레테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한 사람이 가진 탁월한 자질, 미덕을 말합니다. 프시케는 흔히 영혼으로 번역되는데 요즘말로 하면 자아(ego)라는 말에 더 가깝습니다. 이데아는 만물의 원형이 되는 관념적 실재입니다.

플라톤은 육체(소마)와 영혼(프시케)을 나누고 육체보다 영혼에 더 강조점을 찍습니다. 그리고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을 더 확장해, 육체적인 감각에 의해 지각(知覺)되는 현상세계와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이데아의 세계를 분리시킵니다. 그에게 있어서 육체를 통해 감각되어지는 세계는 진짜 세계가 아닙니다. 그에 따르면 참된 세계는 이성으로만 파악되는 이데아의 세계입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탁월함이 바로 인간의 이성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인간의 미덕은 곧 인간의 이성을 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인간의 미덕은 이성을 발휘해서 감각이 주는 착오에서 벗어나 이데아의 세계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인간의 이성을 신적인 원리(Logos)와 동일시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은 신적인 원리이자 동시에 인간적인 미덕이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플라톤은 인간(arete)의 미덕과 신성(Logos)을 대치시키지 않습니다.

반면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의 말년을 그린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에 순종하며 대지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소포클레스는 인간과 신의 화해는 인간이 자신의 미덕을 버리고 신의 의지를 쫓을 때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미덕과 신의 의지를 대치시킵니다.

어쩌면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플라톤이 레반트에서 전래되어온 도취와 망아를 강조하는 디오니소스교를 싫어하고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에 상영되는 비극을 비판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국가’에서 비극을 쓰는 시인들을 국가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펼칩니다. 아테네에서 추방이라는 오늘날에 정치적 망명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이 비극을 쓰는 시인을 추방하라고 한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자 다음 시간에는 왜 플라톤이 시인 추방론을 펼쳤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까 합니다.



ⓒ 류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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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30 04:20 2007/06/30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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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Camus

2007/06/30 03:42 / My Life/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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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body realizes that some people expend tremendous energy merely to be normal.
Albert Camus
French existentialist author & philosopher (1913 - 1960)
2007/06/30 03:42 2007/06/30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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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기행5]왜 플라톤은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려고 했는가?
번호 216704 글쓴이 류가미(ryugami) 조회 2262 등록일 2007-1-5 08:37 추천336 톡톡1

 

왜 플라톤은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려고 했는가?


 

▲ 아네테의 영웅 테세우스 http://www.sikyon.com/Athens/Theseus/theseus_minos1.jpg

안녕하세요. 류가미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은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물론 여기서 시인은 비극 작가를 말합니다. 그러나 먼저 왜 플라톤이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해야한다고 주장했는가를 알아보기 전에, 테세우스의 이야기 한 토막으로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헤라클레스가 그리스 전역의 영웅이었다면,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영웅입니다. 사실 헤라클레스가 보편적인 영웅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면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자기 죄를 씻기 위해서 했던 12가지 노역은 인간의 보편적인 투쟁을 보여줍니다. 헤라클레스가 싸웠던 것은 바로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헤라클레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노역을 모두 해결하고 나중에는 불멸성을 얻어 신의 반열에 들어갑니다.

반면 테세우스는 아테네에서나 나올 수 있는 영웅입니다. 그가 싸웠던 것은 바로 크레타의 미노스왕, 에게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절대왕권을 휘두르는 독재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테세우스는 다분히 정치적인 영웅이었던 셈입니다. 테세우스는 특정한 한 사람에게 권력이 몰리는 것을 싫어하는 아테네인의 기질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죠.

테세우스는 아폴론 신의 도움으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인질들을 구해내고 아테네로 돌아옵니다. 고고학자들은 미노스왕이 기원전 2000년경에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로 봅니다. 그렇다면 테세우스가 인질들과 함께 30개의 노가 달린 배를 타고 아테네에 돌아온 것도 그때쯤의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해마다 아테네 시민들은 테세우스가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를 가졌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테세우스가 크레타에서 타고 돌아온 배를 앞세워 아폴로 신이 사는 델로스 섬까지 해상 행렬을 벌였던 거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보면 테세우스의 배가 기원전 3세기 경까지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원전 2000년경에 만들어진 테세우스의 배가 기원전 3세기까지 남아있었던 것일까요? 나무로 만든 배가 썩지 않고 천년이상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테세우스의 배가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아테네 사람들이 해마다 배의 손상된 널빤지들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계속 낡은 널빤지들을 새로운 널빤지로 갈다보면 애초에 배를 만들었던 나무 널빤지는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널빤지로 대체된 이배는 원래의 테세우스 배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배인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떤가요?

‘테세우스의 배’라는 역설이 가지는 의미는 대단합니다. 테세우스의 배라는 역설은 identity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identity는 우리말로 정체성 혹은 동일성으로 번역됩니다. identity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다른 것과 구별해주는 변하지 않는 본질을 뜻합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본질을 인식하고 파악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든 존재들은 물질적 조건이 변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변해버린 존재를 그 전과 동일한 존재로 봐야할까요 아니면 다른 존재로 봐야할까요? 예를 들어, 시간에 흐름에 따라 우리 몸은 태어났다 성장하고 늙고 죽어갑니다. 육체가 이렇게 변해가도 우리는 같은 존재일까요 아니면 다른 존재일까요?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러한 질문에 고민했지만 그들이 내놓은 해답은 세 가지 범주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 테세우스의 배 http://www.jimpryor.net/teaching/courses/intro/notes/images/trireme.jpg

첫째는 존재를 이루고 있는 물질적 측면이 바뀌어도 그 존재의 정신적인 측면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는 같은 존재다라는 입장입니다. 말하자면 테세우스의 배의 널빤지가 바뀌어도 그 배가 설계된 원안을 유지한다면 그 배는 같은 배라는 입장입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육체적 조건이 바뀌어도 인간의 정신(영혼)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은 동일한 사람이라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플라톤 이후, 19세기까지 서양철학을 지배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플라톤은 물질적 조건이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는 원래의 설계 도면을 이데아라고 불렀습니다.

두 번째 입장은 물질적 측면이 바뀌면 존재의 정신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은 배의 널빤지를 가는 작업을 거치는 동안 테세우스의 배는 설계되었을 때의 원래 모습을 잃게 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육체가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죽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정신(영혼)도 영향을 받아 변하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19세기 이후에 등장한 유물론의 입장입니다.

세 번째 입장은 존재를 물질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측면으로 나누기 힘들다고 봅니다. 이 입장에 따르면, 존재는 항상 같은 존재로 유지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존재는 뭐라고 논리적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지요. 이것이 바로 불교와 도가(道家) 그리고 서양 신비주의의 입장입니다.

플라톤이 존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그 물질적인 조건이 아니라 정신적인 설계도인 이데아라고 생각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여기서 테세우스의 배에 대한 이야기를 접을까 합니다. 그러면 다시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왜 플라톤은 시인을 국가에서 추방해야한다고 했을까요?

플라톤이 시인 추방론을 주장한 것은 그의 저서 ‘국가(politeia)’에서입니다. 플라톤은 ‘국가’라는 책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펼칩니다. 플라톤은 시인이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데 방해가 되니까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국가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칼 포퍼는 그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의 적’에서 플라톤을 열린 민주주의 사회의 적으로 간주합니다. 플라톤은 우리가 우러러 찬양하는 아테네 민주주의를 혐오했습니다. 사실 그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긴 합니다.

플라톤은 대대로 아테네 정계를 주름잡던 귀족 가문의 출신입니다. 그런데 무장한 아테네 시민들이 페르시아 전쟁에 참여해 승리로 이끌자,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가 거세어집니다. 더군다나 페리클레스가 귀족들의 회의인 아레오파고스를 견제하기 위해 시민들의 회의인 50인 평의회를 강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시민들도 대대로 귀족들만 맡아오던 최고 집정관(아르콘)직에 오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정치적인 특권을 누리던 귀족들 입장에서는 민주주의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자, 많은 아테네 귀족들이 자신의 조국이 아니라 스파르타의 편에 섰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친스파르타 정부를 세웁니다. 이렇게 해서 아테네의 또 하나의 과두정권이 세워집니다. 이때 스파르타의 힘을 입어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바로 그 악명 높은 30인의 참주들입니다. 30인의 참주들은 아테네의 민주정치가 싫어, 전쟁 중에 스파르타 편을 든 아테네 귀족들이었습니다.

30인의 참주들은 페리클레스가 귀족들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 만들었던 모든 법을 폐지합니다. 또한 30인의 참주들은 민주파에 속하는 자신의 정적을 모조리 죽이는 공포정치를 실행했습니다. 1년 남짓 지속된 이들의 정권 동안, 그들에 의해 처형된 사람이 무려 1500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이 숫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죽은 아테네 시민의 숫자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습니다.

30인 참주 중에서 가장 극렬한 반민주파가 바로 크리티아스와 그의 사촌 카르미데스입니다. 그런데 이 크리아티스와 카르미데스는 플라톤의 외가 쪽으로 당숙이 됩니다. 그러나 곧이어 30인 참주정치를 반대하는 민주파의 반정이 일어났고 크리아티스와 카르미데스는 민주파에 의해서 처형됩니다.

▲ 아테네 민주주의 아버지 페리클레스 http://interdenominationaldivineorder.com/gallery/pericles.jpg 

그 후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도 크리아티스와 카르미데스와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민주파에 의해서 기소되어 처형됩니다. 플라톤은 아테네 민주파에 의해 사랑하는 친척들과 스승을 잃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자신이 태어나서 자랐던 아테네보다, 아테네의 적이었던 스파르타에 훨씬 가깝습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달리, 소수의 정복민이 다수의 피정복민을 다스리는 철저한 계급 사회였습니다. 또한 아테네가 상업과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면 스파르타는 계급구조의 동요를 가져오는 변화를 막기 위해서 상업과 교역을 막는 자급자족의 농업국이었습니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 국가란 엄격한 신분적 질서 아래, 각각의 계급이 자신의 미덕을 충분히 발휘하는 나라였습니다. 플라톤은 철학자인 통치자 계급, 군인인 방위 계급, 다수의 시민들이라고 할 수 있는 생산자 계급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계급에는 그에 맞는 미덕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통치자가 이성에서 나오는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고 군인들이 기개에서 나온 용기로 나라를 지키고 생산자 계급이 정욕에 빠지지 않고 절제할 때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시인(비극작가)들이 이러한 미덕을 증진시키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비극 작가들은 실재인 이데아를 모방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데아의 모방물을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최초로 존재했던 것은 그가 이데아라고 불렀던 관념적인 세계였습니다. 이데아는 물질적인 형태가 없는 일종의 설계도면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설계 도면에 따라, 다시 말해 이데아를 모방해서 물질적인 세계가 형성됩니다. 플라톤의 입장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적인 세계는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원래 이데아의 세계에 비해 조악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플라톤이 볼 때, 시인들은 이데아를 모방해서 만들어진 이 세상을 모방하여 자신의 작품을 만듭니다. 말하자면 플라톤에게 예술품은 이데아의 작퉁인 이 세계를 모방한 짝퉁의 짝퉁인 셈입니다.

비극작가들은 이성으로 파악될 수 없는 진정한 실재인 이데아가 아니라 희로애락에 물든 허구의 세계에 더 관심을 두고 있고 개인의 이성과 미덕의 증진 보다는 신과 합일되는 열광을 강조합니다. (잠시 여기서 비극이 상연되었던 디오니소스 축제가 술과 도취의 향연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봅시다.)

사실 명정한 이성을 강조하는 플라톤에게 있어서 격정은 때마다 뽑아주어야 할 잡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비극은 격정들을 말려 없애버리는 대신에 그것을 먹이고 물주며, 격정이 이성을 지배하도록 한다. 그러나 인류의 행복과 미덕을 증대시키 위해서는 반드시 이 같은 격정들은 억제되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비극이 해롭다는 것을 모르고 비극에 열광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비극을 쓰는 시인들이 인간사뿐만 아니라 신들의 일까지 소상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선생님으로 모십니다.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위험한 시인들을 그냥 두고 볼 수만 없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이상 국가에서 시인들을 내쫓을 수밖에요.

그러나 제 생각에 플라톤이 시인들을 추방해야한다고 했던 것은 시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힘 때문이었습니다. 전 시간에도 말했듯이, 비극 경연은 디오니소스 축제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또한 디오니소스 축제는 파종과 추수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축제이자, 신과 화해를 꿈꾸는 종교적 행사였고 또한 사회구성원들의 단합을 촉구하는 정치적인 행사였습니다.

특히 플라톤이 살았던 기원전 5세기 경 아테네에서 벌어지는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무엇보다 아테네 시민들의 단합 대회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축제를 통해서 한국 사람들이 단결하듯, 아테네 시민들은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를 통해서 하나로 단결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경연되는 비극들은 상당한 교육적 효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이러한 비극을 보면서 자기가 사는 사회와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 눈을 떴습니다. 그래서 아테네 민주주의 아버지 페리클레스는 축제기간 동안 국가에서 가난한 시민들도 공연을 볼 수 있게 일당을 지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자질을 가진 시민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성공과 실패는 시민들을 어떻게 교육시키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변동이 없는 엄격한 계급사회를 꿈꾸는 플라톤에게 시민들을 교육시키고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나 비극 경연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교육받은 시민들은 통치자에 그저 복종하는 대신 비판의 눈길을 보낼 것이고 축제를 통해 하나가 되었던 시민들은 언제고 정치적인 문제로도 단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닫혀있는 계급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시인을 추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열려있는 민주사회는 시민들을 교육시키고 단결시킬 시인들을 요구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위대한 사회는 위대한 시인들을 배출했습니다. 페리클레스 시대에 소포클레스가 나왔고 르네상스 시대에 보카치오가 나왔습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셰익스피어가 나왔고 프랑스 혁명전야에 루소가 나왔습니다. 저는 또 이 시대에 또 한명의 위대한 시인이 나와 주기를 고대합니다.

다음주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덧붙임
가미가미/
겨울밀의 파종을 기념하는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와 겨울밀의 추수를 기념하는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기독교의 가장 큰 축제인 크리스마스와 부활절과 시기적으로 일치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 예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레반트에 있었던 곡물신의 숭배와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디오니소스를 비롯한 다른 레반트 출신의 곡물신과는 비슷한 만큼 다릅니다. 예수는 다른 곡물신에게는 없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중세 문학을 다루면서 다시 한번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 류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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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30 03:07 2007/06/30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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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낭만주의, 제국주의의 악몽 -프랑켄슈타인
번호 8212 글쓴이 류가미(ryugami) 조회 1496 등록일 2007-6-11 14:06 추천292 톡톡2

류가미의 문예기행(27) 메리 셸리, 새로운 장르의 어머니


안녕하세요. 류가미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대로, 메리 셸리(1797-1851)의 프랑켄슈타인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합니다. 사실 이 작품만큼 최초라는 말이 많이 붙은 작품도 없을 겁니다. 평론가들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최초의 공포 소설이자 SF 소설이며 또한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프랑켄슈타인은 그 시대에 매우 급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프랑켄슈타인을 쓴 것은 바로 메리 셸리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메리 셸리를 아나키즘과 페미니즘의 결합물이자 낭만주의의 신부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꽤 이상하죠. 하지만 그녀의 집안 내력이 그렇습니다.

▲ 메리 셸리의 어머니이자 페미니즘의 선구자였던 메리 울프스톤 크래프트 http://www.nypl.org/research/chss/victoria/ images/full/ps_cps_cd6_081.jpg 
메리 셸리는 급진적 사상가로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를 설파했던 윌리엄 고드윈과 여성 해방론자였던 메리 울스톤 크래프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또 그녀의 남편은 바로 영국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시인 퍼시 셸리(1792-1822)였습니다.

메리 셸리의 아버지 고드윈은 매우 급진적인 사회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정치적 정의와 그것이 일반 미덕과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고찰, 1793>을 통해서, 정부는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게 부패하기 마련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는 인습적인 정부를 거부하면서 그 대안으로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가 이루어지는 소규모 자립 공동체를 제안합니다. 그는 19세기에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었던 마르크스의 선구자였던 셈입니다.

메리 셸리의 어머니 메리 울프스톤 크래프트는 최초의 페미니스트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 <여성의 권리 옹호>를 통해서, 여성이 남성의 쾌락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관념을 비판하면서 여성도 교육, 직업, 정치에서 남성과 똑같은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녀는 여성의 자존을 주장하면서 남성들만의 ‘반쪽뿐인 세계’에 저항했습니다. 살아생전, 메리 울스톤 크래프트는 ‘나는 새로운 종(種)의 시조가 될 것이다’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메리 울스톤 크래프트는 딸 메리 셸리를 낳은지 열흘 만에 산욕열로 죽고 맙니다. 메리 울스톤 크래프트는 딸에게 메리라는 자신의 이름을 남겨주었을 뿐 전혀 어머니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메리 셸리는 ‘나는 새로운 종의 시조가 될 것’이라는 어머니의 선언에 영향을 받았는지, 오로지 남자에 의해서 창조된 새로운 종의 이야기를 씁니다. 그것이 바로 프랑켄슈타인 박사에 의해서 실험실에 창조된 한 이름 없는 괴물이 이야기입니다.

당대 유명한 사상가들을 부모를 둔 메리 셸리는 그 당시 여자로서는 드물게 지적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개인적은 삶은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죽은 지 얼마 안되서 그녀의 아버지는 재혼을 했고 그녀는 이복형제 자매들과 함께 자라나야 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집에는 수많은 사상가와 문학가들이 드나들었죠. 그 중의 한 사람이 문단의 이단아였던 퍼시 셸리였습니다.

열여섯 살이었던 메리는 스물 한 살 난 젊은 시인과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퍼시 셸리 역시 철학과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이 총명한 처녀에게 온통 정신을 빼앗기죠. 그러나 그들의 사랑에는 큰 장애가 있었는데 그것은 퍼시 셸리가 이미 결혼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퍼시 셸리의 아내는 남편과 메리의 불륜에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하고 맙니다. 그 후 메리는 퍼시 셸리와 결혼하지만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을 곱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그것은 한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결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안정한 환경 때문이었을까? 퍼시 셸리와 결혼 한 뒤, 메리 셸리는 조산을 하고 맙니다. 그리고 일찍 세상에 나온 그녀의 아이를 태어나서 얼마 못가 죽고 맙니다. 메리 셸리는 겨우 열아홉의 나이로 출산과 아이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그 해 프랑케슈타인을 씁니다.

▲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 http://www.german.leeds.ac.uk/RWI/2002-03project2/Images/MarySportrait.jpeg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게 된 사건은 문학사에서는 하나의 전설로 내려옵니다. 1816년 6월 퍼시 셸리, 메리 셸리, 메리의 이복 여동생이자 바이런의 애인이었던 클레어, 그리고 바이런경의 주치의자 비서였던 폴리도리는 레만 호숫가에 있는 빌라 디오다티에 체류하고 있는 바이런 경을 방문합니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오는 여름 날씨 때문에 그들의 아름다운 레만호의 풍경을 즐기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야만 했습니다. 무료했던 그들은 독일의 콩트집 팡타스마고리아니(Fantasmagoriana)에서 영감을 받아, 유령 이야기들을 하기로 했습니다. 단 조건은 그 유령 이야기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날 밤 잠들기 전, 의사인 폴리도리는 메리와 그의 친구들에게 갈바니 전기에 대해서 이야기 해줍니다. 이탈리아의 생물학자 갈바니가 해부 실험 중 개구리의 다리가 해부도에 접촉하여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동물 전기현상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메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학이 보여주는 새로운 전망들에 매혹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자극을 받아 이상한 꿈을 꾸게 됩니다. 그날 밤 그녀가 꾼 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자신이 만든 창조물 주위에 창백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는 신성 모독적인 기술의 신봉자를 보았다. 나는 누운 채로, 위력적인 기계가 작동하자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끔찍한 형체가 딱딱한 몸짓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장인은 자기의 성공 자체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고는 공포에 사로잡혀 재빨리 도망쳤다. 그는 잠자고 있었다. 아니 깨어난다. 그는 눈을 뜬다. 그러자 그 무시무시한 존재가 커튼을 젖히면서 자신의 누르스름하고 흐릿하면서 사색에 잠긴 듯한 시선을 그에게 고정시킨 채 머리맡에 있었다.

다음날, 친구들과 모여 유령 이야기를 할 때, 메리는 이 꿈 이야기를 합니다. 바이런과 퍼시 셸리는 그녀에게 그 꿈을 소설로 써볼 것을 권합니다. 그들의 격려에 힘을 입어, 메리 셸리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소설화합니다. 그날 밤 메리가 꾼 꿈에는 소설 프랑케슈타인의 중요한 테마들은 다 나옵니다. 강박적인 과학자, 금지된 지식과 금기 위반, 창조자에게 버려진 괴물, 괴물로 인해 발생하는 공포 등이 말입니다.

그런데 빌라 디오다티에서 탄생한 공포 소설은 프랑켄슈타인만이 아니었습니다. 바이런의 비서이자 주치의였던 폴리도리는 이곳에서 얻은 영감으로 ‘벰파이어, 설화(The Vampyre, A tale)’를 썼습니다. 메리 셸리가 프랑케슈타인을 창조해내는 동안, 폴리도리는 매력적인 흡혈귀 귀족, 루벤스를 창조해낸 것입니다. 흡혈귀 루벤스는 심미안을 가진 귀족으로 여자들을 유혹해 그녀들의 피를 빠는 바람둥이입니다.

사람들은 흡혈귀 루벤스가 바이런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평소에 바이런은 폴리도리를 심하게 놀렸다고 합니다. 어쩌면 폴리도리는 바이런에게 품었던 자신의 반감을 루벤스라는 흡혈귀를 통해 표현했는지 모릅니다.

루벤스라는 흡혈귀가 중요한 것은 그전에는 단순한 전설상의 인물이었던 흡혈귀를 독특한 개성과 내적인 동기를 가진 현대적인 캐릭터를 재창조해냈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루벤스는 프랑켄슈타인만큼 유명한 괴물, 드라큘라의 원형이 되는 캐릭터입니다. 브람 스토커는 폴리도리가 ‘벰파이어, 설화’를 쓴지 거의 80년 후인 1897년에 드라큘라를 완성합니다.

제네바의 빌라 디오다티에 머무르는 그 짧은 기간동안, 인조인간 프랑켄슈타인과 심미적인 흡혈귀라는 문학사 남을 불멸의 캐릭터가 두 명이나 창조되었다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자 이제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속으로 들어가 보죠.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일찍부터 연금술에 몰두하다가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지식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 듯, 그는 생명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금기를 위반합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시체를 조합해 8피트의 인조인간을 만들고 동물전기를 이용해 되살려 냅니다.

▲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이름 없는 괴물 http://nalts.files.wordpress.com/2006/07/frankenstein.jpg 

이 소설의 제목은 ‘프랑켄슈타인, 새로운 프로메테우스’입니다. 다시 말해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그리스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처럼 인간을 창조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 보다 훨씬 무책임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창조물을 위해 신들이 금한 지식(불)을 훔쳐오지만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창조물을 외면합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창조물이 눈을 뜨자, 창조물의 추악함에 겁을 먹습니다. 그는 자신의 창조물을 실험실에 팽개치고 거리로 도망칩니다. 다시 그가 실험실로 돌아갔을 때는 그의 창조물은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습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창조물을 잊으려고 합니다. 사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로부터 이년 후, 그는 자신의 어린 동생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살해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는 동생을 살해한 것이 자신이 만든 그 괴물이었음을 알아차립니다.

어느 날 우연히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괴물을 만납니다. 그 괴물은 그에게 자신이 사회에서 받은 냉대를 털어놓습니다. 괴물은 한 아이를 알게 되었는데 그 아이가 빅터의 동생인 것을 알고 복수심에 죽여 버렸다고 고백합니다. 괴물은 분노에 차서 울부짖습니다.

“저주 받은 창조자여! 신은 자비심을 가지고 자신을 닮은 아름다운 인간을 만들었는데, 내 모습은 어찌 이리 추악한가?”

괴물은 마지막으로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과 함께 살아갈 배우자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빅터는 또 다른 괴물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이에 분노한 괴물은 빅터의 친구 크레르발을 죽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괴물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창조자인 빅터 프랑케슈타인은 괴물을 거부했고 그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괴물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버림 받은 이름 없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 괴물은 사회적으로는 자기를 증명해줄 아무런 신분도 가지지 못한 소외된 존재입니다. 괴물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자신처럼 사회적으로 고립된 인간으로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괴물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살해합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고향으로 돌아가, 약혼녀 엘리자베스와 결혼합니다. 그러나 첫날 밤 그의 신부는 괴물의 손에 살해되고 맙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복수심에 불타 괴물을 추격합니다. 그렇게 고립된 두 사람은 서로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전 세계를 떠돕니다. 누군가가 괴물을 쫓는 프랑켄슈타인을 남극에서 봤다는 이야기로 이 소설은 끝이 납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19세기 유럽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열망에 빠져 주위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의 목표는 한 가지 자신의 힘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그는 지적으로는 신의 권능에 도전할 만큼 탁월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돌볼 줄 모르는 인간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약혼자와 가족을 떠나 혼자 연구에 몰두합니다. 마침내 그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지만 자신이 피조물이 추악하다고 해서 버립니다. 괴물은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가 사랑하는 이들을 죽이려 합니다. 빅터는 괴물의 의도를 알고 있지만 그의 복수를 막아내지 못합니다.

빅터 프랑켄슡인은 인간을 넘어선 신과 같은 권능을 추구하지만 자신이 창조한 생명을 보호할 줄 모르는 매정한 사람입니다. 그의 파멸은 권력이 사랑을 몰아낸 그 자리에서 발생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권능을 추구하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은, 시장과 원료를 대어줄 더 많은 식민지를 찾아 밖으로 팽창하던 19세기 유럽의 열강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19세기 영국은 지구상에 수많은 식민지를 획득해, 해가 지지 않은 나라라고 불렸습니다. 그 당시 세계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같은 몇몇 나라로 분할되었습니다.

19세기 유럽의 열강은 지구상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괴물을 창조해 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창조해낸 그 괴물은 인간 사이의 유대와 자연을 파괴했습니다. 19세기 팽창하던 유럽의 제국주의는 20세기 세계 1,2차 대전으로 끝이 납니다. 세계를 정복하려는 제국주의의 결말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으로 갈리어 서로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남성들이 권력과 영광을 추구한다면 여성들은 인간 사이의 유대와 친밀감을 추구합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19세기는 남성성에 의해 여성성이 극도로 억압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19세기 비엔나의 프로이트는 많은 여성들이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히스테리는 신체적인 이상 없는데도 자꾸 몸의 통증을 느끼는 증상을 말합니다. 프로이트는 여성들의 고통이 신체적 이상이 아니라 바로 심리적인 억압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한 억압된 여성성을 해방시키려는 페미니즘 운동이 본격화된 것도 19세기의 일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어머니 없이 태어난 이 괴물의 복수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그의 복수는 여성성을 억압하는 남근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니면 생명의 창조라는 신의 영역을 넘본 인간의 오만에 대한 징벌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니면 끝없이 팽창하려는 유럽의 제국주의가 가져올 파멸에 대한 예언으로 읽어야 할까요? 괴물의 복수는 그 모든 함의를 담고 있거나 그 이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낭만주의가 몰락해 가던 19세기 쓰여진 프랑켄슈타인은 낭만주의가 시작되었던 17세기에 쓰여진 신(新)엘로이즈와 달리, 더 이상 인간 본성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성을 따라 행동하고 숭고함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던 낭만주의의 꿈은 19세기 끝없는 탐욕으로 얼룩진 제국주의 안에서 악몽으로 변하고 맙니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괴물에게는 돌아갈 어머니(Nature Mother)가 없습니다. 황폐한 된 인간의 심성을 달래줄 모체로써 자연은 이미 인간의 권력욕에 의해 파괴당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초에 쓰여진 프랑켄슈타인은 그렇게 다가올 세기말적 절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힘찬 도약으로 시작했던 낭만주의는 바닥없는 추락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쯤에서 낭만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접고 다음 시간부터는 사실주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그때까지 평안하시길…….



ⓒ 류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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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30 02:48 2007/06/30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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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기행6]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번호 217807 글쓴이 류가미(ryugami) 조회 2251 등록일 2007-1-6 16:46 추천338 톡톡1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안녕하세요. 류가미입니다. 오늘은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시학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시학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예이론서입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국가’에서 모방이론과 시인추방론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이 ‘국가’를 쓴 목적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 국가를 드러내기 위해서였지, 문예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말 그대로 시(비극)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평론을 담은 책입니다. 그야말로 본격적인 문예이론서인 셈이지요.

플라톤의 관심은 인간이 어떻게 이성(logos)을 통해 이데아를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이 사는 공동체에 반영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의 주요관심사가 철학과 정치학이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룬 영역은 너무 많아 한마디로 요약할 수가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루고 있는 분야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 동물학, 심리학, 정치학, 윤리학, 논리학, 형이상학. 역사, 문예이론, 수사학 등 매우 다양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자랑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나 이 모든 학문을 한 사람이 정통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은 영웅과 천재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는 전능한 힘과 전능한 지혜를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길 좋아합니다. 그리고 전능한 힘과 지혜를 가진 그 사람을 추종함으로써 그의 힘과 지혜를 공유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전능한 힘과 지혜를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환상 속에서 바로 영웅주의와 권위주의가 싹틉니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지구의 중력에 영향을 받듯이, 인간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제약을 받습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남들보다 힘과 지혜를 더 가진 사람도 있고 덜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라는 종의 차원에서 볼 때, 그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인간이 이룬 일은 다른 사람도 따라할 수 있는 것이고 누군가의 독창적인 생각도 다른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특정한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의 업적은 다음 세대로 계승될 수 없고 특정한 누군가만 할 수 있는 생각이라면 그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전지전능해서 그 모든 종류의 학문에 정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그러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보일 수 있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는 새로운 철학을 창시하거나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 기존의 철학과 과학적 지식을 분류하고 종합했던 훌륭한 편집자 혹은 주석가였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정치학과 시학은 플라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윤리학과 논리학은 제논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한 그의 자연과학은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 기간 동안 그에게 보내주었던 수많은 문헌과 표본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영어에는 아리스토크래트(aristocrat)라는 형용사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단어의 뜻입니다. 아리스토크래트는 귀족주의자, 귀족티를 내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단어를 보면 알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마디로 귀족주의자였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가난한 시민이었고 플라톤은 몰락한 귀족 정치가 집안 출신이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의 최고 권력자들의 친구이자 스승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할아버지였던 아민타스 3세의 시의(侍醫)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마케도니아 궁전과 인연을 갖게 됩니다.

기원전 367년 17살 되던 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와서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메이아에 들어갑니다. 아카데메이아가 바로 우리가 학문의 전당이라고 부르는 아카데미입니다. 17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54세가 된 대철학자 플라톤과 만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관계는 기원전 348년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계속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세계는 플라톤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 알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젊은 나이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워낙 책벌레였던 그는 책을 모으는데 돈을 아낌없이 썼습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자기보다 부유하고 더 많은 책을 소유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부러움과 함께 시기심을 느꼈나 봅니다. 플라톤은 책에 의존하면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서 수집을 비판했고 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늙은 염소처럼 지혜가 빠져나갔다고 빈정댔다고 합니다.

스승에 대한 이런 경쟁심 때문이었는지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에 스승이 세운 아카데메이아에 맞서는 학교를 세웁니다. 그것이 바로 리케이온입니다. 이 리케이온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은 장서들을 보관했는데 그 장서가 얼마나 많았던지 실제적으로 리케이온은 아테네의 공공 도서관 구실을 합니다.

플라톤이 죽은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소스에 아카데메이아 분교를 세우기 위해 떠납니다.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소스의 왕 아타르네오스와 절친한 친구가 됩니다. 아소스의 왕 아르타네오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신의 조카딸과 결혼시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왕가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343년 말(또는 기원전 342초) 42세가 된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게 13세 된 그의 아들을 가르쳐달라는 초청을 받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로 가, 3년 동안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을 가르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쳤던 그 아이가 훗날 마케도니아, 그리스, 페르시아, 이집트, 북인도에 걸쳐 대제국을 세운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원했던 그런 학생은 아니었지만, 스승의 학술 연구에는 대폭적으로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동방 원정에 군인뿐만 아니라 예술가, 시인, 철학자, 역사가, 측량기사, 기술자, 지리학자, 수로학자(水路學者), 지질학자, 식물학자들도 원정에 데리고 갔습니다. 알렉산더는 자신과 함께 동방원정에 참여한 문인들과 학자들이 수집한 각국의 문헌과 자료들은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냈습니다.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당시 모든 문헌과 자료의 최종 집결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리스 고전 철학(다시 말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헬레니즘 제국 안에 퍼질 수 있었던 것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과 맺고 있던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50세가 넘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에 돌아와, 스승이 세운 아카데메이아와 견줄만한 학교를 세웁니다. 그것이 바로 리케이온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케이온에 지붕 덮인 산책로를 거닐면서 학생들을 가쳤습니다. 그리스어로 이런 산책로를 페리파토스(peripatos)라고 하는데, 이 말에 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은 페러퍼테틱(peripatetic)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소요학파(逍遙學派)라고 하지요.


알렉산더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관계는 알렉산더의 후계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사이에도 이어집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그의 제국은 그의 부하들에 의해서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 세 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통치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들의 그의 제국을 나누어 통치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을 별로 없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왕이 되어버린 그들은 통치에 필요한 지식들을 관리해주고 자신의 후계자를 지도해줄 학자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초청했던 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소요학파였습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은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학교와 도서관에서 활동하며 헬레니즘 문화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고,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한 뒤에도 그의 철학은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학문을 체계화하고 보급한다는 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 낫지만 독창성면에서 그는 스승 보다 훨씬 떨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미학 역시 플라톤의 모방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 세계를 이데아의 모방물로 보았습니다. 플라톤은 비극이 이데아의 모방물에 불과한 현상 세계를 모방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현상 세계에서 ‘전에도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 세계에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모방한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전에 일어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역사(Historia)에 대비해 미토스(Mythos)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미토스는 신화라고 번역됩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미토스를 이야기 혹은 허구라는 단어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미토스에는 신화, 이야기, 허구라는 뜻보다 더 보다 많은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토스는 시간과 공간 속에 한정된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개연성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술이 표현하려는 미토스, 다시말해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개연성은 무엇일까요? 미토스는 일상적인 경험과 자아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어떤 것을 말합니다. 칸트나 료타료는 그것을 숭고(sublime) 개념으로 표현합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그것을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미토스는 결코 모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경험할 수 없는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개연성을 모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이 실재의 모방일 뿐만 아니라 미토스의 모방일 수 있다고 한 것은 예술이 존재하는 사실을 재현해 줄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허구를 표현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플라톤이 예술이 이미 존재하는 것을 모방한다는 모방 이론(혹은 재현이론)의 시초였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표현한다는 표현 이론의 시초였던 셈입니다.


예술을 실재의 모방으로 보았던 플라톤이 예술의 중심에 미술을 놓았다면 예술이 실재 일어나지 않은 일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 예술의 중심에 음악을 놓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재현 예술의 제일 앞에는 미술이 있었고 표현 예술의 제일 앞에는 음악이 있었습니다.

플라톤이 예술이 집단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두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플라톤은 비극이 민중을 교화시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고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개인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의 6장에서 한 아래의 말은 문예이론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발언 중 하나입니다.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을 통하여 감정을 카타르시스(catharsis)시킨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주인공은 신, 혹은 운명이라고 불리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고통당합니다. 비극을 보면서 관객들은 개인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이 절대적인 힘에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민과 공포를 통해 스스로의 감정을 정화(catharsis)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화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에서 발견한 가치였습니다.

카타르시스라는 말은 원래 도덕적 의미로서의 순화(purificatio)라는 뜻과, 종교적 의미로서의 정화(iustratio), 또는 속죄 (expiatio)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학적 의미로서는 배설(purgatio)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라는 말 속에는 도덕적인 순화와 종교적인 속죄 그리고 의학적으로는 쌓였던 긴장의 배설이라는 뜻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인간의 격정을 자극하지만 인간의 격정을 광기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완화시키고 조절하고 해소시킨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정화 과정을 통해서 천박한 자신의 감정을 고상하게 만듭니다.

플라톤은 문학과 예술을 존재하는 사실의 재현으로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기에 덧붙여 문학과 예술을 존재하지 않는 것의 표현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대립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모습을 바꾸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사실 플라톤의 모방이론은 고전주의와 사실주의 그리고 인상주의의 계보를 타고 내려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 이론은 낭만주의와 표현주의에 이론적 바탕이 되었습니다.

16세기 고전주의자들은 미의 이데아를 가정하고 그것을 모방하려고 애썼습니다. 반면 18세기 낭만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예술이 공포와 연민을 일으키는 숭고한 어떤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세기 사실주의자들은 낭만주의자들의 감상을 퇴폐로 규정지으면서 객관적이고 냉정한 눈으로 사회현실을 모방하려고 했습니다. 20세기 표현주의자들은 18세기 낭만주의자들처럼 경험을 초월한 숭고한 것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20세기에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숭배하는 동구 쪽에서는 표현주의를 서구의 타락한 예술이라고 비판합니다.

21세기가 되어도 사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한쪽에서 예술이 사회의 풍기를 해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플라톤 같은 사람들도 있고 예술이 인간의 감정을 정화한다고 주장하며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떤 것일까요? 예술은 존재하는 실재의 모방일까요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표현일까요? 예술은 집단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개인적인 것일까요? 정치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지독하게 사적인 것일까요? 그러나 예술은 그 모두이거나 그 모두를 뛰어넘는 어떤 것일 겁니다.


ⓒ 류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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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30 02:32 2007/06/30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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