訓民正音

2007/03/19 04:28 / Other Scraps/Arts
(1) 세종대왕
 
세종 임금은 서기 1397년 5월 15일 (태조 6년 음력 4월 10일) 한성부 준수방(지금의 서울 통인동 137번지 일대로 여겨짐: 경복궁 서쪽 영추문 맞은편))에서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휘(이름)는 도, 자는 원정이다.

세종 임금은 1418년 8월 10일(음력) 아버지 태종의 내선을 받아 조선 제 4대 임금에 올랐다.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취미와 재능이 여러 방면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사를 펼침에 있어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의 어려운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져, 국민을 근본으로 한 왕도 정치를 베풀었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많은 인재를 길렀다. 특히 우리 겨레 문화를 높이는 데 기본이 된, 찬란한 문화 유산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또한 주자소를 설치하고 인쇄활자(독일 구텐베르그가 1455년에 개발한 인쇄 활자보다 앞선 것임)를 개량하여 인쇄술의 발달을 꾀 하였으며, 측우기, 해시계 등을 발명 제작함으로써 농업과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군사적으로 북쪽에 사군과 육진을, 남쪽에는 삼포를 두어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의술과 음악, 방대한 편찬 사업, 법과 제도의 정비, 수많은 업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세종대왕은 1450년(세종 31년) 4월 8일 승하하였으며,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영릉에 안장되어있다. 사적 제195 호이다.


(2)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목적

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문화적 창조의 동기와 목적에 관하여는 '훈민정음' 가운데서 세종대왕이몸소 말씀하였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국지어음 이호중국 여문자불상유통)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고우민 유소욕언 이종부득신기정자다의)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여위차민연 신제이십팔자 욕사인인이습 편어일용이)


(우리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엽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머리글 풀이")

이 말씀이 지극히 간단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 우리가 알고자 하는 바가 다 들어 있음을 알겠다. 곧,
① 우리 나라에는 독특한 배달말이 있으니, 이 말을 적어 내기에 알맞은 글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 알려진 모든 다른 나라가 각각 제 나라 말에 알맞은 글자가 있는데, 우리 나라만은 글자가 없어, 남의 나라의 글자, 한문을 빌려 쓰니,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② 남의 글자 한문은 우리말과 서로 통하지 않는 글자일 뿐더러, 본디 어렵기 짝이 없는 글자이기 때문에, 우리 배달 겨레에게는 이중으로 어려워, 백성들이 다 배워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하늘이 내린 성인이로되, 한학에 정통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세월을 허비하였을 것이니, 시간과 경제의 여유가 없는 일반 대중이야 얼마나 그것이 어려운 일인가 함을 아프게 느낀 것으로 보인다.

③ 일반 서민이 글자를 깨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한다 함이다. 곧 아랫사람의 뜻이 위에 사무치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에게 억울한 일이 많아 정치가 명랑하지 못하니, 어진정치의 이상에 위반함이라고 생각함이다. 정인지의 꼬리글에서도 이를 "죄를 다스리는 이는 그 곡절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로워 하고 있다....<중간 생략>.... 이로서 송사를 들으면 그 속사정을 알 수 있다(治獄者病其曲折之難通, ……以是聽訟, 可以得其情: 치옥자병기곡절지난통........이시청송, 가이득기정)" 이라고 하였다.

④ 이 새 글은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쉽게 익혀서 일상 생활에 편리하게 쓰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라 하였다. 곧 민중 문화의 보급과 생활의 향상을 꾀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위에 든 이유 밖에, 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인을 들 수 있지 아니할까 생각된다.

① 고려 오백 년간에 끊임없이 다른 겨레들로 더불어 겨루는 살림을 하여 오다가, 끝장에는 몽골에게 큰 곤욕을 당하기까지 하였으니, 겨레 의식이 눈뜨게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며,

② 원 나라, 명 나라의 갈음에 즈음하여, 왕조를 세운 조선 왕실에서는 저절로 자아 의식이 생기게 되었으며,

③ 세종대왕이 동북으로 `육진'을 개척하고, 서북으로 `사군'을 차려 놓고, 남쪽 백성들을 옮겨 심었으니, 자아충실의 필요감이 강렬하게 되었으며,으면 그 속사정을 알 수 있다)

④ 세종대왕이 전제, 세제를 개혁하여, 백성과 나라의 부강을 꾀하였으니, 경제적 및 사회적 발전에는 백성들의 지식의 보급이 앞서는 조건이 됨을 실감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원인에서, 만인을 뛰어넘는 밝은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세종대왕은 제 겨레 특유의 말씨에 알맞고, 만백성이 깨치기 쉬운 민중의 글자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할 만하다.
(옮긴이 주: 한자의 음은 옮긴이가 써넣은 것임)

(3) 만든 때와 반포한 때

세종실록'에 의하면, 그 창제는 세종 25년(1443년) 계해 12월이요, 그 반포는 그보다 3년 뒤인 28년(1446년) 병인 9월이다. 곧 `세종실록'(권 102) 25년(1443년) 계해 12월 졸가리에,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이달에 임금이 몸소 언문 스물 여덟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고전을 모방하였고, 첫소리 · 가운뎃소리 · 끝소리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우리 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되었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이른다.)이라고 하고, 또 정인지의 꼬리글(옮긴이 주: 정인지의 해례 서문이라고도 함) 가운데에,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계해년(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처음으로 만드시어..)

라 하였으니, 그 창제의 때를 알겠으며, 같은 책(권 113) 28년(1446년) 병인 9월 졸가리에,

是月訓民正音成 御製曰 國之語音異乎中國 ......
(이 달에 훈민정음이 다 되었다. 임금께서 글을 지어 말씀하기를, 우리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

라 하여, `훈민정음' 전문을 적어 놓았으니, 이로써 그 완성하고 반포한 때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이,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의 때를 적되 날짜는 밝히지 아니하였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 창제의 날은 꼭 적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 반포의 날은 분명한 것이었을 터인데, 이를 밝혀 적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오백 년 뒤 우리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모색과 시비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상고한 바에 따르면 그 해의 9월이 작은 달이었으므로, 위에 적은 `훈민정음' 반포의 기사는 음 9월 29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선어 연구회(1908년 창립, 1931년에 조선어 학회로, 1949년에 다시 한글 학회로 개칭함)에서는 음력 9월29일(양력 10월 29일)로써, `훈민정음' 반포 기념일, 곧 한글날(처음에는 `가갸날')로 정하고 이를 해마다 기념하게 되었으니, 이는 한글 반포 제8주갑인 병인년(1926)에 비롯된 일이다.

(4) 창제의 경과


실록에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및 반포에 관한 극히 간단한 기사 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듯 완미한 과학적 짜임을 가진 글자가 하루 아침에 되었을 리가 만무하니, 필연코 오랜 동안을 두고 고심 연구한 결과로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심 연구의 경과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이 문화적 대발명을 반대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상소문 가운데에,

且今情州椒水之幸 特慮年斂 扈從諸事 務從簡約 比之前日 十減八九 至於啓達公務 亦委政府 若夫諺文
非國家緩急不得已及期之事 何獨於行在 而汲汲爲之 以煩聖躬調攝之時乎


(또 이번 청주 초수(초정)에 거둥하시는데도 특히 연사(농사가 되어 가는 형편)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시어 호종(왕가를 모시고 따르던 일)하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이를 전일에 비교하오면 10의 8, 9는 줄어들었습니다. 계품하는 공무까지도 또한 의정부에 맡겼는데, 저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마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소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 세종실록 제 103 권 세종 26년 음력 2월 20일조-)

라 한 것은, 위대한 창작에 지성을 다하신 성덕의 한 끝을 보여 주는 재료가 된다. 곧 세종이 한글의 창제에 밤낮으로 애썼기 때문에 안질이 나서, 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청주 초정에 거동하실새, 특히 연사가 나쁜 것을 염려하사, 시종이며 모든 절차를 열에 아홉은 덜고, 정무까지도 다 정부에 맏겨 버리게 되었는데, `훈민정음'의 연구 발명의 일만은 요양을 위주하는 행재소에까지 가지고 가서, 쉬지 않고 그 연구에 골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한 지성을 다하신 공으로 말미암아, `훈민정음'이 25년 계해 겨울에 다 되었으니, 오늘날 우리로서 상상하게 한다면, 그 때의 조야 민심은 이를 크게 반기고 기뻐하여, 세종대왕의 성덕의 가이없음을 우러러 기리어 마지아니하였을 것 같지마는, 사실은 이와 반대로, 곧 반대의 의논이 크게 일어났으니, 그 반포 시행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의 파란 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한글재단> http://www.hangul.or.kr/
2007/03/19 04:28 2007/03/19 04:28

육십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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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간지(六十干支)는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를 조합한 것으로, 육십갑자(六十甲子)라고도 한다.

십간은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를 말하며, 십이지는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를 말한다.

십간과 십이지를 조합하여 하나의 간지가 만들어지는데, 십간의 첫번째인 '갑'과 십이지의 첫번째의 '자'를 조합하여 '갑자'가 만들어지며, 그 다음으로 십간의 두번째인 '을'과 십이지의 두번째인 '축'이 결합하여 '을축'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순서로 병인, 정묘, 무진, 기사, 경오, ... , 신유, 임술, 계해의 순서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연도뿐만 아니라 월(月)과 일(日)에도 간지가 부여되는데, 연도의 간지를 세차(歲次)라고 하고, 월의 간지를 월건(月建), 일의 간지를 일진(日辰)이라고 한다.

[편집] 십간

자세한 내용은 '십간' 참고
십간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
음양 양(陽) 음(陰) 양(陽) 음(陰) 양(陽) 음(陰) 양(陽) 음(陰) 양(陽) 음(陰)
오행 목(木) 목(木) 화(火) 화(火) 토(土) 토(土) 금(金) 금(金) 수(水) 수(水)

[편집] 십이지

자세한 내용은 '십이지' 참고
십이지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
음양 양(陽) 음(陰) 양(陽) 음(陰) 양(陽) 음(陰) 양(陽) 음(陰) 양(陽) 음(陰) 양(陽) 음(陰)
오행 수(水) 토(土) 목(木) 목(木) 토(土) 화(火) 화(火) 토(土) 금(金) 금(金) 토(土) 수(水)
동물 호랑이 토끼 원숭이 돼지

[편집] 육십간지의 응용

십간과 십이지는 각각 10년과 12년마다 순환하며, 두 숫자의 최소공배수는 60으로, 하나의 간지는 60년마다 돌아오게 된다. 즉 태어나서 만으로 60세 생일이 되는 해는 자신이 태어난 해와 같은 간지, 즉 갑자를 가진다고 하여, 환갑(還甲 - 갑자가 돌아옴) 혹은 회갑(回-)이라고 한다.

또한, 십간은 10년을 주기로 순환하며, 이는 서력십진법을 쓰는 것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연도의 마지막 숫자가 같은 해는 같은 십간, 즉 같은 천간을 가짐을 알 수 있다. 서기 4년이 갑(甲)임을 기억하면, 1994년, 2004년, 2014년은 모두 갑의 해이다. 2004년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2006년병(丙)의 해임을 쉽게 계산할 수 있다. 또한 이 기산법은 특정 사건의 연도를 짐작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십이지의 경우, 12년을 주기로 돌아오며, 특정해, 혹은 자신의 생년으로부터 기산하면 쉽게 계산할 수 있다. 예를들어, 최근의 1996년은 쥐의 띠로 자(子)의 해이다. 12년 주기로 돌아오므로 2008년 역시 자의 해이고, 2년 앞인 2006년술(戌), 즉 개의 띠이다. 이상의 기산법으로부터 2006년병술(丙戌)년임을 알 수 있다.

계산 예:

  • 경술국치 - 2006년이 병술년이므로, 60년전인 1946년 및 12년 간격의 1934년, 1922년, 1910년, 1898년이 모두 술(戌)의 해임을 알 수 있다. 갑(甲)이 연도가 4로 끝나는 해이므로 경(庚)은 연도가 10으로 끝나는 해임을 알 때, 경술국치는 1910년에 일어난 사건임을 계산할 수 있다.

clear=all>

육십간지
갑자 - 을축 - 병인 - 정묘 - 무진 - 기사 - 경오 - 신미 - 임신 - 계유 - 갑술 - 을해
병자 - 정축 - 무인 - 기묘 - 경진 - 신사 - 임오 - 계미 - 갑신 - 을유 - 병술 - 정해
무자 - 기축 - 경인 - 신묘 - 임진 - 계사 - 갑오 - 을미 - 병신 - 정유 - 무술 - 기해
경자 - 신축 - 임인 - 계묘 - 갑진 - 을사 - 병오 - 정미 - 무신 - 기유 - 경술 - 신해
임자 - 계축 - 갑인 - 을묘 - 병진 - 정사 - 무오 - 기미 - 경신 - 신유 - 임술 - 계해
원본 주소 ‘http://ko.wikipedia.org/wiki/%EC%9C%A1%EC%8B%AD%EA%B0%84%EC%A7%80


육십갑자표(六十甲子表)

육십갑자

육십갑자

육십갑자

 갑자 (甲子)

갑술 (甲戌)

갑신 (甲申)

을축 (乙丑)

을해 (乙亥)

을유 (乙酉)

병인 (丙寅)

병자 (丙子)

병술 (丙戌)

정묘 (丁卯)

정축 (丁丑)

정해 (丁亥)

무진 (戊辰)

무인 (戊寅)

무자 (戊子)

기사 (己巳)

기묘 (己卯)

기축 (己丑)

경오 (庚午)

경진 (庚辰)

경인 (庚寅)

신미 (辛未)

신사 (辛巳)

신묘 (辛卯)

임신 (壬申)

임오 (壬午)

임진 (壬辰)

계유 (癸酉)

계미 (癸未)

계사 (癸巳)


육십갑자

육십갑자

육십갑자

갑오 (甲午)

갑진 (甲辰)

갑인 (甲寅)

을미 (乙未)

을사 (乙巳)

을묘 (乙卯)

병신 (丙申)

병오 (丙午)

병진 (丙辰)

정유 (丁酉)

정미 (丁未)

정사 (丁巳)

무술 (戊戌)

무신 (戊申)

무오 (戊午)

기해 (己亥)

기유 (己酉)

기미 (己未)

경자 (庚子)

경술 (庚戌)

경신 (庚申)

신축 (辛丑)

신해 (辛亥)

신유 (辛酉)

임인 (壬寅)

임자 (壬子)

임술 (壬戌)

계묘 (癸卯)

계축 (癸丑)

계해 (癸亥)

2007/03/19 03:35 2007/03/19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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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9

2007/03/19 03:29 / My Life/Diary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늦긴 늦은 거다.

인생 뭐 있나,
20살 운명에게 10살은 늦은 거고
60살 운명에게 20살은 이른 거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일설에 의하면, 고대인들은 해가 항상 동쪽에서 뜨기 때문에
동쪽에는 진리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해를 찾아 동쪽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는데 일설일 뿐이고.
동쪽을 동쪽이라고 하면 300원이요,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면 3,000원이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머뭇거리면 30,000원이다.

그러니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늦긴 늦은 거다.

2007/03/19 03:29 2007/03/19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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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남산신성비 제1비
 
남산신성비는 591년(진평왕 13) 남산에 신성(新城)을 쌓고 그에 관여한 지방관 및 지방민들에 관하여 기록한 비이다. 제1비가 1934년에 처음 발견된 이래 현재까지 10개가 발견되었다. 10개 모두 비의 첫머리에 ‘신해년(591) 2월 26일 남산 신성을 쌓을 때, 법에 따라 쌓은 지 3년 만에 무너지면 죄로 다스릴 것을 널리 알려 서약케 한다’라는 공통된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신성의 축조에 동원된 사람들이 공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서약식을 행하였던 관례를 이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제3비와 9비를 제외하고, 그 다음에 도사(道使)와 나두(邏頭)와 같은 왕경 6부 출신의 지방관, 촌주와 장척(匠尺), 문척(文尺)과 같은 지방의 지배자, 그리고 축성에 동원된 기술자집단을 기술하고, 마지막에 할당된 공사구간을 몇 보(步) 몇 촌(村)의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제3비는 특별하게 왕경 훼부(喙部)의 주도리 사람들을 동원하여 신성을 쌓은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에 비문의 형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서약 문장 다음에 훼부 주도리가 할당받은 공사구간을 기술하고, 부감(部監)과 문척(文尺)과 같은 공사 책임자, 기술자집단을 차례로 기술하였다. 한편 제9비는 서약 문장 다음에 급벌군(伋伐郡)의 이동성(伊同城)이 할당받은 공사구간, 군상인(郡上人)을 비롯한 이동성의 지배자들, 그리고 기술자집단의 순으로 기재하였는데, 다른 것과 달리 왕경 6부 출신의 도사(道使) 등의 지방관이 빠져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1934년에 처음으로 발견된 제1비는 본래 경북 경주군 내남면 탑리 식혜골 김헌용의 집 앞 도랑에 놓여있었던 것이었다. 남산 중턱에 있었던 것을 가옥을 신축하면서 옮겨 놓았던 것이라고 한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높이 91cm, 최대 폭 44cm, 두께 5~14cm이며, 모양은 기다란 계란형에 가깝다. 서체는 육조풍(六朝風)의 고졸(古拙)한 성격이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비는 아량촌(阿良村), 영고촌(營沽村)과 노함촌(奴含村) 등의 주민들이 신성을 쌓았다는 내용인데, 아량촌 등은 현재 경남 함안이나 의령지방에 해당한다. 여기에 지방관으로 도사(道使), 지방의 지배자로 군상촌주(郡上村主), 장척(匠尺), 문척(文尺) 등이 보인다. 이밖에 축성기술자로 성사상(城使上), 면착상(面捉上)이 보이고 있다.
 

 
제2비는 상반부와 하반부가 따로따로 발견되었는데, 하반부는 1956년에 경주 남산 서쪽 능선의 전일성왕릉 부근에서, 상반부는 1960년 12월에 같은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제1비와 마찬가지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재질은 화강암이고, 상하단의 폭이 좁고 중간폭이 넓은 장방형을 이루었다. 전체 길이 121cm, 중간 최대폭 47cm, 두께 7~14cm이다. 비의 내용은 아차혜촌(또는 아단혜촌), 답대지촌(答大支村)과 구리성(仇利城), 사도성(沙刀城) 등의 주민들이 신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아차혜촌은 경북 의성군 안계면 안정리, 답대지촌은 경북 상주군 화서면 회령, 사도성은 상주지방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여기에 보이는 지방관이나 지방의 지배자들은 대략 제1비의 경우와 비슷하다. 다만 지방의 지배자로 군중상인(郡中上人), 작상인(作上人)이 보이고, 기술자 가운데 면석착인, 소석착인이 보이는 것이 특징적이다.
 

 
제3비는 원래 경주시 배반동 사천왕사 부근 이판출씨의 집에 있었는데, 진홍섭선생이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화강암의 재질로 전체 길이는 80.5cm이고, 폭은 상단이 30cm, 하단이 23cm이며, 두께는 10cm이다. 비의 내용은 왕경의 훼부 주도리인이 신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역부를 동원하고 축성을 감독하는 관리가 부감(部監)인데, 이것은 왕경을 관할하는 6부소감전의 관리인 감랑(監郞), 감신(監臣), 감대사(監大舍) 등과 관련이 깊다. 특히 축성구간이 21보(步)로서 다른 비에 보이는 작업구간과 비교할 때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림 2] 경주남산성
 
 
제4비는 1960년 12월에 제2비의 상반부와 함께 발견되었다. 상반부가 절단된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비문 전체의 내용은 알 수 없다. 비는 고생촌(古生村) 등의 주민들이 신성을 쌓았다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지방관으로 나두(邏頭)가 보이고 지방의 지배자와 기술자집단의 전모는 알 수 없다.
 

 
제5비, 제6비, 제7비와 제8비는 비의 조각만이 남아 전하는 것들이다. 제5비는 1972년 8월 문화재관리국에서 도로예정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던 중 경주시 사정동 흥륜사지의 중문지로 추정되는 곳의 민가를 철거하다가 발견하였다. 제6비는 1974년 3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수습한 것이고, 제7비는 1985년 남산신성 남쪽 성벽 내측의 민묘(民墓) 앞에서 수습한 것이다. 그리고 제8비는 같은 해에 남산신성의 북문지 중간지점 바닥에서 수습하였다. 모두 파손이 심하여 비의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다. 제9비는 1994년 1월 남산신성의 서쪽 성벽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처음 세웠던 상태 그대로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남산신성비와 기재 양식이 달라 많은 주목을 받았다. 비의 내용은 급벌군(현재 경북 영풍)의 이동성도(伊同城徒)가 6보를 할당받아 신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제9비는 다른 비들과 달리 지방관에 관한 사항이 보이지 않고, 지방의 지배자와 기술자의 명단만을 기재한 사실이 특징적이다. 이것을 통하여 축성을 위하여 역부를 징발할 때, 지방의 지배자들이 거기에 깊게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제10비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0년 5월 18일 경주시 배반동 751-3번지 논둑에서 발견하였다. 수습된 비편은 높이 27cm, 폭 16.5cm, 두께 13cm이며, 재질은 붉은 색조의 화강암이다. 현재 비편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3행 5줄의 15자만이 남아있다. 파손된 후 남산에서 1Km 떨어진 현재의 출토지까지 이동된 것으로 추정된다. 10개의 남산신성비는 도사(道使)나 나두(邏頭) 등의 지방관, 다양한 지역, 다양한 명칭의 지방 지배자들을 전하고 있다. 현재 이를 기초로 중고기 군(郡)과 촌(성)과의 상호 관계, 그리고 그들의 성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거나 진행 중이다. 특히 비들이 신성의 축조에 역부를 동원한 사실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현재 중고기 역역동원체계를 살필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자료로 적극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주제어
서약식, 도사(道使,) 나두(邏頭), 촌주, 장척(匠尺), 문척(文尺), 왕경, 훼부(喙部)의 주도리 사람들, 부감(部監), 군상인(郡上人), 군상촌주(郡上村主), 성사상(城使上), 면착상(面捉上), 작상인(作上人), 감랑(監郞), 감신(監臣), 감대사(監大舍), 역부, 징발, 중고기 군(郡)과 촌(성)과의 상호 관계, 중고기 역역동원체계
 
     
   
   
 
2007/03/19 03:09 2007/03/19 03:09

[한국사 미스터리](15)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1934년 5월4일, 어느 일본인이 경주 북천 건너 금장대 부근(현 경주 동국대 후면)의 구릉을 걷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오사카 긴타로(大阪金次郞)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선덕여왕대 유명한 양지스님과 관련된 석장사(錫杖寺) 터를 조사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문득 오사카의 발에 돌 하나가 걸렸다. 냇돌(川石)이었다. “어, 거참 이상한 돌이네”. 고고학자 특유의 눈썰미가 이 예사롭지 않은 돌에 꽂혔다. 자세히 보니 길이 30㎝에 지나지 않은 냇돌에 새겨넣은 글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우연히 주운 냇돌의 비밀은?=글자는 ‘임신(壬申)’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면밀히 살펴보니 5줄에 모두 74자나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돌의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이듬해인 35년 12월18일. 당시 일본 역사학의 대가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경주분관을 둘러보았다. 수집해둔 몇 편의 비석편 가운데 그의 눈길을 끈 것이 바로 이 돌이었다.

“이거 어디서 주웠습니까?”. 흥분한 스에마쓰는 오사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리고는 새겨진 글자 가운데 첫머리에 임신(壬申)이란 간지(干支)로부터 시작되고 있고, 새겨진 글자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본 결과 두 사람이 서약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바로 ‘임신년에 서로 서약하는 내용을 기록한 돌’이란 의미에서 그 자리에서 이 돌의 이름을 임시로 부르기로 했다. 그는 바로 이 돌에 새겨진 글자를 판독해서 이듬해인 1936년 경성제대 사학회지 제10호에 ‘경주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탁본과 함께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되어 임신서기석이란 용어가 마련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 돌은 돌을 주웠던 오사카의 개인소유였다. 그러다 광복되면서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두었기 때문에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 땅에서 동산문화재는 어떤 경우든 먼저 수집하는 사람의 소유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모름지기 충도(忠道)를 맹세한다”=임신서기석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임신년 6월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늘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집지(執持)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기면 하늘에 큰 죄를 짓는 것이라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 앞서 신미년 7월22일에 크게 맹세했다. 즉 시(詩), 상서(尙書), 예기(禮記), 전(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 한다’

그런데 이 임신서기석의 ‘임신년’이 신라 어느 왕대 어느 시기에 해당하느냐가 가장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글쓴 연대가 확실하게 되면 내용에 따른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임신이란 간지는 60년마다 되풀이된다. 따라서 정확한 연대를 밝히지 않으면 60년, 120년, 180년 앞서 만들어졌을 수도 있고, 뒤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스에마쓰는 이 ‘임신년’은 신라 문무왕 때인 672년이나 성덕왕 때인 732년 둘 중에 하나일 것이며, “내 생각으로는 성덕왕 때인 732년에 무게를 두고 싶다”고 결론지었다.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하나로 통일한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나라가 안정되고 나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어쨌든 일제 강점기에는 스에마쓰의 해석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고 누구나 그렇게 믿어왔다.

◇맹세연도가 732년이냐, 612년이냐=그러나 광복 후 이병도가 다시 이 서기석을 관찰하고 종합적인 해석을 내렸다. 글이 쓰인 연대는 신라 진흥왕 때인 552년이나 진평왕 때인 612년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였다. 스에마쓰 주장과는 무려 120년간의 차이가 있었다. 스에마쓰는 비문의 내용 가운데 시경·상서·예기 등 신라 국학의 주요한 교과목을 습득하고자 한 것을 맹세한 점에 주목했다. 결국 신라에서 국학을 설치하고 한층 체제를 갖춘 신문왕 이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즉 임신년을 문무왕 12년인 672년이 아니면 성덕왕 31년인 732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이병도는 신라에 국학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유교경전이 신라 지식사회에 수용되었음을 강조했다. 특히 비문 내용 가운데 나라에 충성하는 길을 맹세한 점이 돋보인다는 것. 이 충성맹세는 신라 화랑도(花郞徒)의 근본정신이며, 따라서 이 임신서기석은 이 제도가 융성했던 진흥왕 13년인 552년이거나, 진평왕 34년인 612년으로 보는 것이 좀더 타당하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와 같이 동일한 비문을 놓고 그 해석에 있어서 내용은 동일하나 비문이 쓰인 연대는 1세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고고학보다도 문헌사학을 통한 고대사 해석시에는 이러한 명문, 즉 글자가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면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왜냐하면 열악한 기록에만 의존하고 있는 학문세계에 새로운 기록이 나타남으로써 부족한 기록을 보태는 것은 물론 당시의 사회를 복원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최초 발견 당시 전후사정 볼 것 없이 쉽게 접근한 것이 바로 신라가 국학을 설치하고 교과목으로 채택한 경전이 돌에 새겨진 점이었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일본 어용사학자의 선두주자나 다름없었던 비중있는 학자가 발표했기에,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됐던 것이었다. 결국 이 임신서기석의 연대가 통일후 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성덕왕대의 것이라는 스에마쓰의 해석에 반기를 드는 이는 없었다.

◇“임신서기석은 화랑정신의 상징석”=그러나 광복 후 이병도는 스에마쓰의 해석을 분석해 새롭게 조명했다. 신라에는 화랑도의 정신이 있었다. 바로 그 화랑도 정신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나아가 외세인 당나라의 세력까지 몰아냄으로써 삼국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건 역사적인 사실이다. 알다시피 화랑에는 젊은 화랑들이 지켜야 할 5가지 행동강령인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었다.

이 강령을 보면 첫째가 임금, 즉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며, 둘째가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고, 셋째가 벗과는 신의를 지켜야 하며, 넷째가 싸움에 나가 물러서지 않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다섯째가 살생은 가려서 하라는 것이다. 진평왕때 원광(圓光)스님이 마련한 이 강령은 화랑도의 근본사상이었다.

그런데 이 ‘임신서기석’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당시 상당한 교육적 지식을 갖춘 두 사람임이 분명하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은 세속오계의 화랑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이 서기석의 임신년은 진평왕대인 서기 612년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바로 삼국통일 전의 사회정신을 말해주는 젊은 지식인들의 ‘나라에 대한 맹세’라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조유전/고고학자

2003년 08월 18일

작성자 : 고고학반 (2004/10/08 09:42:36 PM) (2005/04/17 09:01:05 PM )
이 기사의 저작권은 작성자에게 있습니다.
2007/03/19 02:55 2007/03/19 02:55

<기획탐방> 새용산박물관 전시실을 가다⑤

경주 서봉총 출토 은합(銀盒)

뚜껑과 몸체의 조립식 은 그릇

신라의 4-6세기 문화는 고분에서는 적석목곽분(績石木槨墳)으로 흔히 대표되며, 출토유물로는 황금을 비롯한 금속유물이 유명하다. 이 신라실을 채우게 되는 전시물 역시 대종은 적석목곽분 금속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경주 서봉총 출토품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은으로 만든 합(盒)이라는 그릇. 몸체와 뚜껑 조립식인데 뚜껑 안쪽과 몸체 바닥에는 각각 '延壽元年太歲在卯'(연수 원년 태세 재묘)와 '延壽元年太歲在辛'(연수 원년 태세 재신)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고 있다.

두 곳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연수'(延壽)라는 말은 연호(年號)일 것이며, 이 은합이라는 기물(器物)이 제작된 연대를 지칭하고 있으리라. 태세(太歲)란 목성이 태양 주위를 도는 주기를 기준으로 시간을 헤아리는 부호다.

목성은 12년마다 태양을 한 바퀴 돈다. 이렇게 되면 희한하게도 12간지(干支)와 대응시켜 연대를 구별할 수 있게 된다.

더욱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대목은 이 은합(銀盒)이 제작된 신묘(辛卯)라는 해가 하나(卯)는 뚜껑에, 다른 하나(辛)는 몸통에 표현돼 있다는 사실이다. '辛'이 들어간 10천간(天干)은 '卯'가 포함된 12간지에 대해 음양설에서는 양(陽)이 된다.

천간과 간지를 떼어 놓는 수법으로 연대를 표시하는 이런 방식에서 우리는 다시금 경주에 적석목곽분이 축조되던 그 시대 신라사회에 음양오행설이 얼마나 깊숙하게 침투해 있었는지를 여실히 확인하게 된다.

서봉총 은합에 새긴 명문에 의하면 이 그릇은 천간지지로는 신묘년에 해당되고 연수라는 연호로는 원년이 되는 해 "3월 중에 태왕(太王)이 교(敎.명령)하시어" 제작됐다.

학계의 다수는 이 은합이 고구려에서 제작돼 어떤 경로로 신라에 흘러들어 서봉총에 묻힌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결정적 증거는 없다.

혹자는 '연수'라는 연호가 고구려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주장하나, 고구려가 연호를 사용한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칭하고, 그의 재위 기간 중 일어난 사건을 '영락 ●년"이라는 식으로 기록한다 해서 영락(永樂)을 연호로 간주하고 있으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비문 그 자체가 영락이 호(號)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호(號)란 미칭(美稱)이란 기록이 중국에서는 이미 진한(秦漢)시대부터 쏟아지고 있다. 미칭이란 말할 것도 없이 존칭이라는 뜻. 그 외 다른 고구려 유물에서 연호가 확인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문제가 적지 않다.

이 서봉총 은합이 신라 유물이라는 결정적 증거는 사실 서봉총이 축조되던 그 무렵 같은 신라 무덤에서 이와 거의 똑같은 유물이 다수 출토됐기 때문이다. 서봉총 은합이 고구려 수입품이라면 다른 신라무덤 모든 비슷한 출토품, 심지어 경산 임당동 고분 출토품도 고구려 수입품이라는 결론이 도출되고 만다.

황남대총 유물로는 북분 출토 금으로 만든 등자가 있다. 한데 황금 마구류가 이뿐만 아니다. 여타 소규모 장식품도 금제품이 압도적이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말 등자까지 금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장례는 검소하게 치러야 한다는 절장(節葬)의 사상가 묵자(墨子)의 외침이 신라에는 전해지지 않았던지, 전해졌다 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았나 보다.

봉분 두 개를 남북으로 나란히 잇대어 놓은 쌍둥이 무덤인 황남대총 중에서도 여성을 묻었음이 확실한 북분은 남성이 묻힌 남분에 비해 '황금파티'가 더하다. 이곳에서는 각종 금제 그릇이 출토됐다. 그 모양도 굽다리 접시를 흉내낸 것도 있다.

그에 비해 황남대총 남분은 은색(銀色)이 상대적으로 짙다. 이곳 출토 은제 그릇 넉 점이 전시코너를 장악하고 있는데, 북분 금제 그릇이 그렇듯이 이곳 출토 은제 그릇 중에서도 굽다리 접시가 보인다.

같은 경주지역 적석목곽분인 식리총(飾履塚)은 이곳에서 황금신발이 출토됐기 때문에 이런 명칭을 얻었다. 식리(飾履)란 굳이 그대로 해석하면 장식용 신발이란 뜻이지만, 그냥 신발이라고 보면 된다. 한데 이 황금신발은 신발 밑창만 남았다.

이 식리총 출토품으로는 그 마스코트격인 황금신발 한 켤레 외에도 모양이 서봉총 은합과 매우 흡사한 그릇이 있다. 한데 그 재료는 청동이다. 이 역시 서봉총 은합처럼 몸체-뚜껑 조립식인데 뚜껑 복판에는 봉황으로 생각되는 고리를 장식하고 있다. 초두라고 하는 일종의 세 발 솥(혹은 냄비)도 식리총 대표주자로 나온다. 청동인 이 초두가 보통의 솥과 다른 점이라면 다리미처럼 길쭉한 손잡이가 달렸다는 데 있다. 죽은 사람이 저승에 가서도 두고 두고 음식을 해 드시라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이 외에도 적석목곽분 출토품으로는 일일이 수량을 헤아리기도 힘든 각종 구슬류가 꾸러미 상태로 출품을 기다리고 있다. 중국에서 왔을 것으로 보이는 각종 유리제품도 빼놓을 수 없다.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블로그 2005-8-22) 

<기자수첩> 고구려인은 조선인이 아니다?

<기자수첩> '국사'를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2007/03/19 02:53 2007/03/19 02:53

 

님  진  녹  

 (국립도서관 소장본)


  각셜1)이라. 죠션국  선조?왕 즉위 십뉵년 셰?2) 무?라. 이? 시화연풍?고 국?민안?야 ?셩이 창?고 시졀이 ?평?더니, 평안도 삭쥬 ?에 한 ?람이 승은 최요, 명언 위공이라. 년장 ?십의 일졈혈육이 업셔 ?일 ?탄?더니, 일일은 남방으로 큰 별이 ?러져 광?찰? ?지라. 부인이 ?다라니 일몽이라. 비몽간의 한 ?람이 ?관죠복3)을 닙고 신장이 십삼쳑이요, 쳥의동?로 ?우션을 들고 부인계 드러와 엿?오?,
...




장경남 교수님

2007/03/19 02:37 2007/03/19 02:37

인천을 정말 미추홀이라 불렀을까  
정답부터 말하자면, 彌趨忽이라 기록하긴 했어도  이를 미추홀이라고 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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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인천의 옛 지명이 미추홀이었고 그것이 매소홀로 되었다가 나중에는 소성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한자로 된 옛 기록에 분명히 그렇게 나와 있으니 어떻게 보면 그 말이 맞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 많이 썼던 이두식 표기의 특성을 잘 모르고 섣불리 판단한 결과로 보이며, 삼국시대의 한자 발음과 현대 한국의 한자 발음이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한 데에서 오는 오류이기도 하다.

삼국시대 초기에 인천이 백제 땅이었을 때에 백제 사람들은 "彌趨忽(미추홀)"이라고 기록하였고, 얼마 후 고구려 땅이었을 때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買召忽(매소홀)"이라 기록하였으며, 또 얼마 후에 신라 땅이었을 때에는 "邵城(소성)"이라고 기록했던 것은 사실이다.

위에서 괄호 속에 넣은 한자 발음은 당시의 한자 발음과는 전혀 상관 없는 현대 한국인의 한자 발음일 뿐이다.

당시 인천 지방 사람들의 한자 발음이 중국 어느 지방과 가장 비슷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21세기 한국인의 한자 발음과는 분명히 다른 발음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위의 세 가지 표기 방식은 현대인들이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이두식 표기라는 점이 더욱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이두식 표기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을 기록한 사람만이 그 정확한 발음을 안다는 점이다.

현대 일본어에서 한자 읽는 방식이 옛날 우리 조상들의 이두와 같은 방식이어서, 일본 사람의 이름을 제대로 읽는 사람은 ?사람의 가까운 가족과 예전부터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 뿐이다. 이름에 쓰인 그 한자가 뜻으로 읽어야 할지, 소리로 읽어야 할지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그 가족과 친구들 뿐이기 때문이다.

원래의 이두가 그랬다.
중국어와 어순도 다르고 어휘도 다른 상황에서 그저 글자만 빌려 와서는 글 쓰는 사람이 자기 멋대로 뜻으로도 사용했다가 소리로도 사용했다가 뒤죽박죽으로 쓰는 것이 이두였다.

어차피 남에게 보여 주려고 쓰는 글도 아니고, 나중에 내가 다시 보았을 때에 나만 알아 보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자를 어떤 방식으로 쓰든 별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똑같은 것이라도 기록한 사람에 따라서 제각기 서로 다른 한자로 기록될 수가 있는 것이 이두였다.

심지어는 같은 사람이 쓴 것도 이두식 한자 표기가 다를 수 있다. 삼국유사를 기록한 일연 스님은 신라의 첫 임금 이름을 "赫居世(혁거세)"라고도 했다가 "弗矩內(불구내)"라고도 했다.

하나는 뜻으로 두 글자를 사용했고, 또 하나는 소리로만 세 글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의 경상도 지방 한자 발음을 정확히 몰라서 당시의 정확한 발음을 알아 낼 수는 없다.

그러나 현대 한국인들은 그 한자의 현대 한국 발음으로만 읽어서, 그냥 대충 "혁거세"라고 하고 만다.

당시의 신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혁거세가 누군지 아세요?"하고 물으면 아무도 모른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답답한 것은 "赫居世"의 발음이 "혁거세"는 분명히 아니고, "불구내" 비슷한 어떤 발음일 텐데, 그 정확한 발음을 끝내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수 천 년 뒤에 다른 사람들이 이 글을 읽어 내려고 하니까 답답한 것이지, 실제 이두로 기록한 그 분은 별로 답답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두 방식으로 우리 말을 기록했던 그 분들은 엄청나게 머리가 좋았던 것이 분명하다. 외국의 글자를 갖고 와서 우리의 말을 기록을 해 보겠다는 발상 그 자체가 실로 창의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만약에 삼국 시대에 중국에서 한자를 안 쓰고 로마자를 썼다면 우리나라 이두의 모양도 이렇게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 말 = 나는 학교에 간다
이두 표기 1 = I nun school e go nda
이두 표기 2 = na nun haggyo e ganda
이두 표기 3 = I nun go to school da
이두 표기 4 = ------------------

이 많은 기록들이 모두 같은 말이었다는 사실을 1000년 뒤에 어느 천재가 있어서 알 수 있겠는가?

양주동 박사 정도라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요?

글쎄요.... 전혀 아닌데요....

양주동 박사가 해독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가 다 거짓말일 가능성이 99%이다.

신라시대의 이두 표기를 1000년이나 지난 조선시대의 한자 발음으로 해독해 내려고 했던 그 방법 자체가 처음부터 무리였다.

일본 학자 고쿠라 진페이 박사가 조선 시대에 기록된 한글판 고려 처용가와 삼국유사의 향가 처용가를 대조하여 삼국유사를 기록한 일연 스님의 이두 표기 특징 몇 개를 발견해 낸 것을 보고서는.... (이것이 이두 해독에 관한 세계 최초의 논문이었다)

양주동이 애국심을 발동하여 무리하게 향가 전부를 해독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고쿠라 박사는 그래도 한글판 고려 처용가라도 있어서 신라 처용가와 대조하여 같은 글자가 나오는 다른 이두를 조금씩 알 수 있었지만, 양주동 박사는 그저 용감하기만 했다.

향가가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가 하는 의미 정도는 알아 낼 수 있었겠지만...(이것도 사실은 앞뒤 한문 설명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수준임)

당시의 정확한 발음까지 알아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더군다나 기록자도 다른 "균여전"의 향가들은 더욱 알기 어렵다.
아직도 이두식 표기를 사용하고 있는 일본의 학자들에게 향가 해독을 맡겨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일제시대의 고쿠라 박사는 신라 향가 처용가를 해독한 것이 아니라, 고려 처용가에서 일부 번역되어 있는 일부 기록을 보고 일연 스님의 이두 표기 습관 몇 가지를 발견해 냈을 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솔직히 말하면 이두로 쓰여진 신라 향가 중에 제대로 해독되어 있는 것은 신라 처용가 딱 하나 정도이다.

그것도 고쿠라 박사나 양주동 박사가 직접 해독한 것은 아니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오던 신라 처용가를 고려 시대 때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쓸 때에 이두로 기록한 것이 있었고, 같은 노래에 군살이 좀 붙은 고려 처용가를 조선 시대 때에 한글로 기록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 해독되었다고 하는 처용가의 노랫말은 사실 원래 내려 오던 노랫말이었고, 누군가가 번역해서 그 내용이 알려진 것은 아니다.

지금 이두 표기의 전통은 일본으로 넘어 갔고 우리 쪽에는 거의 흔적이 없다.

하여튼, 어찌 되었든 간에

인천의 세 가지 옛 표기---
彌趨忽, 買召忽, 邵城의 당시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으나....
똑같은 지명을 두고 세 나라의 세 사람이 각기 자신의 이두 표기 습관대로 기록하였을 것이라는 사실 만큼은 거의 확실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표기 방식만 좀 달라졌을 뿐, 지명이 변경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현대 한국식 발음대로 "미추홀", "매소홀", "소성"이라고 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는데, 그러면 무어라고 읽어야 좋을 지가 고민은 고민이다.

현재로서는 정답이 아닌 게 알면서도 그냥 미추홀, 매소홀, 소성이라고 읽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같은 내용을 가지고 정식 한문과 이두 표기로 기록한 책자가 발견되어 이두에 관한 연구가 좀더 진행될 때까지는 별 도리가 없다.

참, 그리고... 또 한 가지 정보....
이두 표기 방식은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사용하였다는 사실도 알아 두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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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등학교 교감)
2007/03/19 02:28 2007/03/19 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