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5월4일, 어느 일본인이 경주 북천 건너 금장대 부근(현 경주 동국대 후면)의 구릉을 걷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오사카 긴타로(大阪金次郞)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선덕여왕대 유명한 양지스님과 관련된 석장사(錫杖寺) 터를 조사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문득 오사카의 발에 돌 하나가 걸렸다. 냇돌(川石)이었다. “어, 거참 이상한 돌이네”. 고고학자 특유의 눈썰미가 이 예사롭지 않은 돌에 꽂혔다. 자세히 보니 길이 30㎝에 지나지 않은 냇돌에 새겨넣은 글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우연히 주운 냇돌의 비밀은?=글자는 ‘임신(壬申)’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면밀히 살펴보니 5줄에 모두 74자나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돌의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이듬해인 35년 12월18일. 당시 일본 역사학의 대가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경주분관을 둘러보았다. 수집해둔 몇 편의 비석편 가운데 그의 눈길을 끈 것이 바로 이 돌이었다.
“이거 어디서 주웠습니까?”. 흥분한 스에마쓰는 오사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리고는 새겨진 글자 가운데 첫머리에 임신(壬申)이란 간지(干支)로부터 시작되고 있고, 새겨진 글자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본 결과 두 사람이 서약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바로 ‘임신년에 서로 서약하는 내용을 기록한 돌’이란 의미에서 그 자리에서 이 돌의 이름을 임시로 부르기로 했다. 그는 바로 이 돌에 새겨진 글자를 판독해서 이듬해인 1936년 경성제대 사학회지 제10호에 ‘경주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탁본과 함께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되어 임신서기석이란 용어가 마련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 돌은 돌을 주웠던 오사카의 개인소유였다. 그러다 광복되면서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두었기 때문에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 땅에서 동산문화재는 어떤 경우든 먼저 수집하는 사람의 소유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모름지기 충도(忠道)를 맹세한다”=임신서기석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임신년 6월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늘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집지(執持)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기면 하늘에 큰 죄를 짓는 것이라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 앞서 신미년 7월22일에 크게 맹세했다. 즉 시(詩), 상서(尙書), 예기(禮記), 전(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 한다’
그런데 이 임신서기석의 ‘임신년’이 신라 어느 왕대 어느 시기에 해당하느냐가 가장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글쓴 연대가 확실하게 되면 내용에 따른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임신이란 간지는 60년마다 되풀이된다. 따라서 정확한 연대를 밝히지 않으면 60년, 120년, 180년 앞서 만들어졌을 수도 있고, 뒤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스에마쓰는 이 ‘임신년’은 신라 문무왕 때인 672년이나 성덕왕 때인 732년 둘 중에 하나일 것이며, “내 생각으로는 성덕왕 때인 732년에 무게를 두고 싶다”고 결론지었다.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하나로 통일한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나라가 안정되고 나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어쨌든 일제 강점기에는 스에마쓰의 해석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고 누구나 그렇게 믿어왔다.
◇맹세연도가 732년이냐, 612년이냐=그러나 광복 후 이병도가 다시 이 서기석을 관찰하고 종합적인 해석을 내렸다. 글이 쓰인 연대는 신라 진흥왕 때인 552년이나 진평왕 때인 612년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였다. 스에마쓰 주장과는 무려 120년간의 차이가 있었다. 스에마쓰는 비문의 내용 가운데 시경·상서·예기 등 신라 국학의 주요한 교과목을 습득하고자 한 것을 맹세한 점에 주목했다. 결국 신라에서 국학을 설치하고 한층 체제를 갖춘 신문왕 이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즉 임신년을 문무왕 12년인 672년이 아니면 성덕왕 31년인 732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이병도는 신라에 국학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유교경전이 신라 지식사회에 수용되었음을 강조했다. 특히 비문 내용 가운데 나라에 충성하는 길을 맹세한 점이 돋보인다는 것. 이 충성맹세는 신라 화랑도(花郞徒)의 근본정신이며, 따라서 이 임신서기석은 이 제도가 융성했던 진흥왕 13년인 552년이거나, 진평왕 34년인 612년으로 보는 것이 좀더 타당하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와 같이 동일한 비문을 놓고 그 해석에 있어서 내용은 동일하나 비문이 쓰인 연대는 1세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고고학보다도 문헌사학을 통한 고대사 해석시에는 이러한 명문, 즉 글자가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면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왜냐하면 열악한 기록에만 의존하고 있는 학문세계에 새로운 기록이 나타남으로써 부족한 기록을 보태는 것은 물론 당시의 사회를 복원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최초 발견 당시 전후사정 볼 것 없이 쉽게 접근한 것이 바로 신라가 국학을 설치하고 교과목으로 채택한 경전이 돌에 새겨진 점이었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일본 어용사학자의 선두주자나 다름없었던 비중있는 학자가 발표했기에,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됐던 것이었다. 결국 이 임신서기석의 연대가 통일후 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성덕왕대의 것이라는 스에마쓰의 해석에 반기를 드는 이는 없었다.
◇“임신서기석은 화랑정신의 상징석”=그러나 광복 후 이병도는 스에마쓰의 해석을 분석해 새롭게 조명했다. 신라에는 화랑도의 정신이 있었다. 바로 그 화랑도 정신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나아가 외세인 당나라의 세력까지 몰아냄으로써 삼국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건 역사적인 사실이다. 알다시피 화랑에는 젊은 화랑들이 지켜야 할 5가지 행동강령인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었다.
이 강령을 보면 첫째가 임금, 즉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며, 둘째가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고, 셋째가 벗과는 신의를 지켜야 하며, 넷째가 싸움에 나가 물러서지 않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다섯째가 살생은 가려서 하라는 것이다. 진평왕때 원광(圓光)스님이 마련한 이 강령은 화랑도의 근본사상이었다.
그런데 이 ‘임신서기석’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당시 상당한 교육적 지식을 갖춘 두 사람임이 분명하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은 세속오계의 화랑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이 서기석의 임신년은 진평왕대인 서기 612년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바로 삼국통일 전의 사회정신을 말해주는 젊은 지식인들의 ‘나라에 대한 맹세’라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조유전/고고학자
2003년 08월 1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