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Und sagte kein einziges Wort)》(1984, 학원사) 를 읽다.

하인리히 뵐(Heinrich Boll) 지음
고위공 옮김


「 나는 그녀가 네 숟갈 가득 커피 가루를 니켈 뚜껑 안으로 쏟아 넣고 뚜껑을 밀어서 닫은 다음 찻잔을 커피 머신에서 빼내고 차 주전자 하나를 그 밑에 놓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조용히 수도 꼭지를 틀었고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김이 소리를 내며 그녀의 얼굴을 스쳐 갔고 흑갈색의 액체가 주전자 안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내 심장이 조용히 고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가끔 죽음이라는 것과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의 생으로 변화되는 순간을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그리고 순간 나에게 남게될 것들을 한 번 상상해 본다. 아내의 창백한 얼굴, 고해소에서의 신부의 밝은 귀, 의식의 화음으로 가득 찬 어두컴컴한 성당에서 갖는 몇 차례의 조용한 미사. 빨갛고 따스한 아이들의 피부, 내 혈관을 흐르는 술, 그리고 몇 번의 아침 식사, -- 그리고 커피 머신의 수도 꼭지를 작동시키는 소녀를 보는 순간 그녀도 함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p.35-36) 」

「 나는 그를 쳐다보며 애써 웃으려고 해 보았으나 거친 딸꾹질만 마치 트림처럼 올라왔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성가신 일이었을 것이다. 깨끗하게 손질한 그의 평복, 세련된 손, 섬세하게 면도한 볼, 이런 것들이 나에게 다 낡아 빠진 우리 집을 의식하게 했다. 맛도 없고 느끼지도 못하는 흰 먼지처럼 십 년 동안 우리가 들이마시는 이 가난. -- 보이지 않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정말로 존재하는 빈곤의 먼지가 내 폐와 심장과 뇌에 쌓여 있고 내 몸의 혈액 순환을 조정하고 있고 나에게 호흡 장애를 일으키고 있다. 나는 심한 기침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p.47) 」

「 주위가 고요한 밤이면 소파에 누워서 울 때도 있다. 애들의 숨소리와 이가 나기 때문에 불편해하며 꼬마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 온다. 나는 울며 기도한다. 시간의 맷돌이 천천히 갈리며 지나가는 것이 들린다. 결혼 당시 내 나이는 스물 세 살이었다. 그 후 십 오 년이 흘렀다. 나이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은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애들의 얼굴만 쳐다보면 나이를 알 수 있다. 애들이 먹어 가는 한 해 한 해가 내 인생에서 없어져 가는 것이다. (p.66) 」

「 "아침 때문이지. 나는 일생을 같이 아침 먹을 사람을 찾고 있었어. 그런데 당신이 나타났지.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당신은 멋진 아침 식사의 파트너였지. 그리고 나는 당신과의 생활이 결코 권태롭지 않았어. 당신도 아마 내가 지루하지 않았을 거야." (p.105) 」


2001.09.10
2001/09/10 05:03 2001/09/10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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