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뭔가 확실한 전기가 필요해. 죄다 끝내버리고 싶어. 이 어마어마하게 그로테스크한 농담을 너무 늦기 전에 모조리 끝장내고 싶어. 하지만 시나 몇 줄 긁적대고 편지 나부랭이나 써봤자 별 소용이 없는 것 같아. ㅡ p.51

내게는 이미 과도한 양심이 주입되어 있어, 파괴적인 후유증 없이는 관습을 파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기심에 가득 차 한계선까지 몸을 쭉 뻗고는, 아무런 근심도 거리낌도 없이 성적인 굶주림을 해결하고 쉽사리 온전한 자아를 찾을 수 있는 남자애들을 증오하고, 증오하고, 또 증오하는 수밖에. 나는 이렇게 날마다 질척거리는 욕망에 질질 끌려다니며 욕구 불만에 시달리는데. 정말이지 이런 일 신물이 난다.

… 네게 한때 지나가는 여자가 되는 것만은 참을 수 없기에 이젠 너를 끊어내려 해…. 내가 몸을 줄 사람은, 나의 사상과 정신과 꿈을 먼저 가져야만 해. 하지만 네겐 아무것도 줄 수 없었어.

짝을 찾아 헤매고, 시험을 하고, 시행착오를 하는 이 게임에서는 너무나 많은 상처가 생긴다. 그러다가 별안간 이게 게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뇌리를 강타하면,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는 거다. ㅡ p.53

이젠 고독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릴 고독감이긴 하지만. 고독은 자아의 형체 없는 핵심에서 나온다. 마치 핏속에 질병처럼 은근히 전신으로 확대되더니 이제 감염 경로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ㅡ p.58

이렇게 오랫동안 이 일기장에 글을 쓰지 않은 이유 중엔, 글로 적을 만한 일관된 생각을 단 한 가지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있다. 내 마음은, 역겨울 정도로 적나라한 직유를 들어보자면 마치 파지(破紙)와 머리카락, 썩어가는 사과 심들로 가득 찬 쓰레기통 같다. 너무나 많은 삶들에 접촉했는데, 그 중 너무나 많은 삶들이 흥미진진하고, 내 경험의 영역에 낯설다는 사실 때문에 우울한 기분이다.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가장자리만 갉아먹어보는데, 그게 마음에 거슬린다. ㅡ p.61

나는 나보다 더 깊이 사유하고, 더 좋은 글을 쓰고, 더 그림을 잘 그리고, 스키도 더 잘 타고, 외모도 뛰어나며, 더 잘 사랑하며, 더 잘 살아가는 이들을 질투한다. ㅡ p.63

항상 능동적이고 행복할 것이냐, 내성적으로 수동적으로 슬퍼할 것이냐, 내게는 두 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다. 아니면 둘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미쳐버릴 수도 있다. ㅡ p.71

그래, 분명 너는 지난 18년 동안 함께 살아온 사람들을 몇 줄의 문장들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네들의 인생과 그네들의 소망과 그네들의 꿈까지도 설명할 수 있을까? 해볼수야 있겠지만, 그들의 인생과 소망과 꿈도 결국 너와 다를 바 없을 텐데…. 너 역시 이 설명 불가능한 수수께끼 ㅡ 뒤틀린 긴장과, 비합리적인 사랑과 연대의식과 충성으로 뭉친, 한피를 나누어 출생하고 성장한 이 가족 집단의 일원이므로. 지금의 너를 만들어 낸 데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므로. ㅡ pp.74~75

그런데도 이만큼 완벽하고 흡족한 상대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혹이 또 고개를 든다. 만일 평생 동안 이 선택을 후회하면서 살아야 한다면? 지금 당장, 아니면 머지않아 결행해야만 할 선택인데, 과연 누가 먼저 용기를 낼 것인가? 마음 바쳐 사랑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만 있다면, 헤어짐이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을텐데.

… 나를 따뜻하게 감싸줄 또 하나의 육체가 얼마나 필요한지! 안식 속에 자리잡은 신뢰감은 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말이야! ㅡ pp.111-112

비록 일상의 쳇바퀴에 지독히도 저항하던 사람이라 해도, 반복되는 생활의 궤도에서 탈선하는 순간 불편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어디로 돌아야 할까? 어떤 매듭, 어느 뿌리를 믿고 매달려야 할까? 집에 돌아온 나는 이렇게 낯설고 희박한 대기 속에서 어디에도 마음 붙이지 못한 채 공중에 붕 떠 있다…. ㅡ pp.123~124

어디 있는 누구든, 세상에 행복한 사람이란 게 있기나 한 건가? 아니, 꿈속에서, 혹은 손수 만들거나 다른 이가 만들어준 인공 조형물 속에 살고 있지 않다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없다.

… 도대체 어쩌다 어떻게 네가 성장해 스물한 살 생일에 이르게 되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 나는 사랑받고 싶기에 누군가 사랑하고 싶다. 토끼처럼 두려워, 불빛이 너무 무서워서 자동차 바퀴 밑으로 몸을 던지고 싶은 심정이다. 바퀴들의 맹목적이고 어두운 죽음 밑에 깔려 있으면 나는 안전하다. 아주 피곤하고, 아주 진부하고, 아주 혼란스러운 느낌이다. 오늘 밤에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쓰러질 때까지 걷다가 집에 돌아가는 불가피한 궤도를 완성하지 못한다면 좋겠다.

… 나는 혼자 공부하고 혼자 사고한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행동한다. 두 가지 모두를 사랑하며, 두 가지 모두 내게는 소중하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면, 그가 누구인지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 사랑은 환상에 불과하지만, 진심으로 믿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 마음을 모두 바칠 텐데. 지금은 마치 깊은 협곡 밑바닥에 드리워진 그늘 한 점처럼 모든 것이 너무 멀고 서글프고 싸늘하게만 느껴지거나, 아니면 분홍색 층층 나무처럼 뜨뜻미지근하고 가깝고 생각 없는 것처럼 보인다. ㅡ pp.177~178

삶의 모든 건 빠짐없이 글로 쓸 만한 가치가 있는 거야. 배짱만 두둑하다면, 또 즉흥적인 상상력만 있다면. 창조력에 있어 최악의 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이야. ㅡ p.186

나는 항상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나를 찾는 발소리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실망하곤 한다. 어째서, 어째서, 나는 한동안만이라도 금욕하는 고행자가 될 수 없을까? 왜 항상 작업과 독서를 위한 철저한 고독의 문간에서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며, 또 한편으로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손길과 말, 그 몸짓을 이토록, 이토록 그리워하는 것일까? ㅡ p.235

더는 자포자기도 말고 위안을 찾아 명예를 내던지는 일도 말자. 술로 도피하거나 낯선 남자를 만나 나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도 말자. 약해지지 말고 날마나 속으로 피를 흘린다고 하소연하지도 말자. 날마다 핏방울이 뚝뚝 흐르고, 흐른 피가 모여 엉겨 붙는 고통을 하소연하지도 말자.

… 내가 가장 쇠약해져 있을 때 나를 찾아오는 무수한 절망들 ㅡ p.261~262

ㅡ 실비아 플라스 (김선형 옮김),『일기』, 문예출판사
2010/12/23 00:31 2010/12/23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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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성인의 모든 인간관계는 이전 감정의 재편집이며, 아이가 생후 초기 어머니와 나눴던 유대감과 자라면서 오이디푸스 갈등과 관련해 아버지에게 느꼈던 감정이 바로 사랑의 끌림으로 재현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에게 ‘모든 사랑은 재발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사랑은 무의식의 운명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무의식에서 갈망하던 대상이 바로 그 사람이며, 그리고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자신이 내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어느 날 어떤 대상에게 갑자기 빠져 들게 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우리는 처음에 상대방에게 무조건적으로 빠지는 게 아니라 매우 조건적으로 빠져 든다. 그러니까 운명적인 만남이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특히 첫눈에 반하는 사랑의 경우 그 대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그리고 있던 연인의 모습에 가까운 사람이며, 자신의 내적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중 가장 흔한 것이 부모와 같은 유형을 찾는 경우다. 자신의 부모에게서 느끼는 감정과 유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상대나,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부모상이 엿보이는 상대에게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또 구원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대상, 혹은 반대로 구원받고 싶은 자기를 돌봐 줄 수 있는 대상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ㅡ pp.25~26

사실 열 사람이 어떤 사건을 동시에 목격한다 해도, 그들이 사건에 대해 말하는 느낌은 모두 다르다. 왜냐하면 기억이라는 것은 그것이 저장될 당시의 그대로가 아닐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나 사물이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될 때, 그것은 본질과는 조금 다르게 변형되어 저장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그것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향에 따라 변형되어 기억의 창고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형된 기억이 훗날 그걸 회상할 때 또 한 번 변형될 가능성이 높다. 즉 회상하는 시점의 소망과 욕망, 감정, 느낌 등이 기억을 떠올리는 데 개입하는 것이다.

때로 기억과 상상을 혼동하는 수도 있다. ㅡ p.87

소녀들은 자신을 돌봐 주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신도 어머니가 됨으로써 여성성을 완성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사랑은 소녀의 운명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여성은 일반적으로 인간관계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여성들은 일찍부터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그와 함께하길 꿈꾼다.

하지만 남자들은 다르다. 남성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독립해 자율성을 획득하는 걸 말한다. 그래서 여자처럼 사랑이 그들에게 우선 가치가 아니다. 하지만 요즘은 경제적으로 독립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군대에 갔다 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할 때까지 부모에게 의존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남자들에게 심리적 부담을 지운다. 남자가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는 경제적 독립을 통한 진정한 자율성과 심리적 자유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남녀 모두 사랑보다 일을 해서 그 능력을 인정받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여긴다. 그러다 보니 사랑은 그 이후로 밀려나고 있다. 만혼이 유행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ㅡ p.129

하지만 누구에게나 사랑이 축복인 건 아닌 것 같다. 윌이 처음에 그랬듯 사랑이 다가와도 그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밀어내 버리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 초반에 윌을 지켜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랑받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비례하지 않을까?’

스칼라 같은 좋은 사람이 다가왔는데도 윌은 그 사랑을 거부했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아주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윌은 나중에 스스로 스칼라를 찾아간다. 자신이 더 이상 버림받아 마땅한, 나쁘고 못난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처럼 사랑받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ㅡ p.166

‘신뢰하는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프로이트는 그 답을 아기 때 엄마와 이루는 관계에서 찾는다. 즉 신뢰는 엄마와 내가 분리된 독립체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우울함에 빠졌다가 그것을 극복해 내는 과정에서 배운다는 것이다.

아기는 엄마와의 완전한 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인 생후 2년까지 엄마를 찾는데, 이때 늘 엄마가 옆에서 반응을 보여 주고 안심시켜 준다고 해 보자. 아기는 자신이 혼자 놀고 있어도 엄마가 어디 도망가지 않고 내 옆에 있을 거라는 믿음, 즉 ‘기초적 신뢰(basic trust)’를 갖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최초로 배우는 ‘신뢰’다.

어쩌면 누군가는 최초로 신뢰를 배우는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신뢰를 못 배웠을 수도 있다. ㅡ pp.178~179

정신분석 치료를 시작할 때 환자에게 으레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배우자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좌절을 견디는 능력, 적어도 타인과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이 있음을 말해 준다. 사랑을 마음의 키를 재는 척도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ㅡ p.250

ㅡ 김혜남,『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걸까?』, 갤리온
2010/12/22 23:53 2010/12/2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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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女生徒)

2010/12/22 02:36 / My Life/Diary
 



‘본능’이라는 말과 부딪히면 왠지 울고 싶어진다. 우리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본능의 어마어마한 힘이라는 것을 번번이 확인하게 될 때면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고 멍해진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그저 엄청나게 커다란 무언가가 내 머리 위를 덮으며 내려와서 제멋대로 끌어내 돌려버리는 것이다. 끌려가면서 만족스러워하는 기분과 그것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또다른 감정. 우리는 왜 혼자 만족하고 평생토록 자신만을 사랑하며 살 수 없는 걸까? 지금까지의 자신의 감정과 이성이 본능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잊은 뒤에는 그저 실망만이 남을 뿐이다. 이런 내 자신에게도 저런 내 자신에게도 본능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건 슬픈일이다. 엄마, 아빠를 힘껏 부르고 싶어진다. 그러나 진실이라는 것은 의외로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 곳에 있을지도 모르기에 더더욱 슬퍼졌다. ㅡ p.173

책 읽는 건 그만 때려치워! 관념뿐인 생활이야. 무의미하고 시건방지게 아는 척하는 것도 밥맛이야. 나에게는 생활의 목표가 없다.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좀더 적극적이면 좋으련만 나에게는 모순이 많다. 한껏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에 빠져 있는 척하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그저 시시한 감상에 불과하다. 스스로를 가여워하고 위로하는 것뿐이다. 게다가 스스로를 너무 높이 평가해. ㅡ p.178

아무도 우리들의 괴로움을 알아주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 이 괴로움과 외로움은 아름다운 추억쯤으로 남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어른이 될 때까지 이 길고 긴 시간을 어떻게 지내야 할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홍역 같은 것인가.

하지만 홍역으로 인해 죽거나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냥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우리 중에는 매일 이렇게 가슴 답답해하고 화를 내다가 자기도 모르게 발을 헛디뎌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돌이킬 수 없는 몸으로 평생을 엉망진창으로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마음을 굳게 먹고 자살해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안타까워한다. 아아, 조금만 더 살아보면 알 수 있었을 것을, 조금만 더 어른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될 텐데.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너무도 괴로운 상황을 겨우겨우 참아 넘기며 뭔가 세상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열심히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세상은 그저 아무 영양가도 없는 교훈만 들려주며 위로할 뿐이다. 또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 기대에 배신당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결코 쾌락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너무나도 먼 산을 가리키며 저기에 올라가면 경치가 좋다고 말하면 그것이 거짓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밀려오는 맹렬한 복통 때문에 그곳까지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복통을 보고도 못 본 척 “자 조금만 참으면 돼, 저 산 정상까지만 가면 다 해결돼” 하고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다. 분명 누군가가 틀렸다. 나쁜 것은 바로 당신이다! ㅡ pp.208~209

오늘과 같은 내일이 찾아오고, 행복은 평생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알지만 분명 올 거야. 내일이면 찾아올 거야 하고 믿으며 잠자리에 드는 것이 좋겠지? 털썩 커다란 소리를 내며 이불 위로 쓰러졌다. 아아, 기분 좋다. 차가운 이불 위에 드러눕는다. 등이 시원해져서 무작정 기분이 좋았다.

‘행복은 하룻밤 늦게 찾아온다’는 말이 얼핏 생각난다. 행복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친 이가 더는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가버렸다. 바로 다음날 멋진 행복의 소식이 빈집을 찾아왔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는 이야기다. 행복은 하룻밤 늦게 찾아온다. 행복은. ㅡ p.210

ㅡ 다자이 오사무 (김욱송 옮김),「여학생」,『달려라 메로스』, 숲
2010/12/22 02:36 2010/12/22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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