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새로운 이론과 사상]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욕망이란 이름의 인간을 사유하기
이정우 _ 철학아카데미원장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캉(1901~1981)은 사르트르·메를로-퐁티·레비-스트로스·바슐라르 등과 더불어 20세기 중엽에 활동했다.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 맥락에서 새롭게 재창조했으며, 거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성찰을 가미함으로써 현대 사상의 핵심 인물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


라캉의 사유는 깡길렘·푸코가 그렇듯이 ‘정상과 비정상’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푸코와 깡길렘이 한 사회·한 시대가 비정상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어떤 논리·개념·장치들·배경들을 깔고서 그런 구분을 행하는가에 관심이 있다면(인식론적-과학사적 관점), 라캉은 처음부터 모든 인간은 비정상이라고, 더 정확히 말해 정상과 비정상이란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아픈 존재’(헤겔)인 것이다.

이 점에서 통상적으로 함께 ‘구조주의자’로 분류되지만, 그리고 라캉 자신이 말년에 자신의 담론을 수학화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지만, 라캉은 레비-스트로스의 투명한 합리주의와 대조된다. 그러나 라캉은 그 아픔이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본 점에서 역시 구조주의자이다.

라캉 사유의 성과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이으면서도 거기에 구조주의 언어학의 성과를 도입해 무의식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를 시도한 점에 있다.

정신분석학은 ‘무의식’ 개념을 기본으로 한다. 우리가 의식하는 세계, 의식으로 행하는 경험 아래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가 놓여 있다(그러나 ‘무의식’이라는 실체는 없다. 의식의 공백으로서, 의식의 배면으로서 발견되는 어떤 차원일 뿐이다).

라캉에게서 무의식은 어린 아기가 상징의 세계, 표상의 세계에 진입하면서 형성된다. 그러한 진입 이전, 즉 아기와 엄마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그 후의 상징과 표상의 세계에 억눌리면서 무의식이 형성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의식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아래에는 어린 시절에 발생했던 그러한 진입과 더불어 그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실질적으로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의식 세계가 상징의 세계, 표상의 세계라면 그 세계는 필연적으로 기표(記表)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표는 기의(記意)와 맞물린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소쉬르에게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고전적인 전제 위에서 활동했던 소쉬르와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사이에는 거대한 담론사적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더 정확히 말해,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기표-기의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며 때로 그 관계를 일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한다면(예컨대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떠다니는 기표’) 반대로 라캉의 경우 기표와 기의는 애초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 즉 이른바 ‘누빔점’이 존재한다.

기표는 그 안에 어떤 경험 내용을 담고 있다. “눈이 내린다”라는 기표는 눈이 내리는 현상(지시대상) 및 그 현상에 대한 경험 내용(기의)을 담고 있다. 그러나 라캉은 기표와 기의가 흔히 일치하지 않음을 말한다. 정치가가 “저는 대권 욕심이 없습니다”라고 극구 강조하는 것은 사실 은근히 대권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조심할 것은 이 정치가가 지금 의식적으로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 그 사람은 자신이 욕심이 없다고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무의식 속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즉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일치하지 않는가? 바로 무의식 때문이다. 기표는 대권 주자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그 정치가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지만, 대권 주자의 무의식의 움직임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라캉에게 인간이란 병자든 아니든 기본적으로 이런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의식과 기표, 그리고 그 기표가 명시적으로 가리키는 기의의 세계가 있는 반면, 또한 무의식에서의 움직임이 존재하는 것이다.

무의식은 ‘그것(Es)’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그것’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를 뒤집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로. 라캉은 근대 철학의 대전제인 주체의 투명성, 주체가 “주어졌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주체의 밑에는 ‘그것’이, 무의식이 존재하며 주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거울 단계’, 상상과 상징 사이


어린 아기의 주체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가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라고 한다. 어린 아기는 아직 신체적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 이를 ‘조각난 몸’의 환상이라 한다. 이는 생물학적으로는 환상이지만 심리학적으로는 환상이 아니며, 누구나 겪게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이 환상은 후에 ‘정신분열증’이 생길 수 있는 잠재적 바탕을 이룬다고 한다).

이 조각난 몸의 환상은 ‘거울 단계’에서 극복된다. 거울 단계에서 아기는 거울에 비친 영상을 보고서(또는 어머니나 다른 아기들에게 비친 자신을 보고서) ‘동일화(identification)’의 과정을 겪는다. 아기는 동일화를 통해서 조각난 몸의 단계를 극복한다. 이 단계가 ‘거울 단계/국면’이다.

그러나 아직 본격적인 주체가 형성되지 않은 단계이다. 아기는 아직 이자(二者)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즉 이때에 아기는 아직 상징의 세계에 들어간 것이 아니며, 엄마와 자기를, 다른 아기와 자기를 혼동하는 전이성(transitivity)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아기가 자신과 세계를 연속적으로 이해하는 지점이며, 라캉은 ‘상상적’ 단계라 부른다.

이 단계는 나르시스의 그것이기도 하다. 물 속의 자기 영상에 반했던 나르시스처럼 이 단계의 인간에게는 아직 타인이나 상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우 행복한 단계이다. 그러나 그 행복은 자신이 통일된 어떤 존재라는 일정한 ‘오인(誤認)’에 근거하고 있다. 라캉에게 주체란 기본적으로 오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아기는 이제 이런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건너가게 되며, 이 과정을 통해서 본격적인 한 ‘인간’ 혹은 ‘주체’가 형성된다.

아기는 타인의 세계, 사회 세계에 들어간다. 그 결정적인 측면은 곧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다. 라캉은 이 차원을 상징계라고 부른다. 이것은 달리 말해 아기가 이제 기표들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기표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의 장 속에서 주체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주체의 형성은 곧 상징계로의 진입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란 타인과의 관계 하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계로의 진입은 자기소외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제 아기는 상징계라는 타자, 사회라는 타자 속에 들어가면 동일시의 환상에서 깨어나 차가운 자기소외(自己疏外)의 장으로 들어선다(이 단계에서 아이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즉 타인의 시선을 매개해 스스로를 이해한다). 나르시즘의 단계, 거울 단계는 곧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며, 그 단계를 통과함으로써 아기는 이제 자기와 타자를 뚜렷이 구분하면서 하나의 주체로서 정립된다. 그러나 이 구분은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로서 세운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계에서 어떤 자리를 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레비-스트로스는 근친혼의 금지야말로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문화로 이행하게 한다고 말했다. 연속적 자연으로부터 불연속적 규범으로 넘어옴으로써 혈연과 결혼이 구분된다. 라캉에게서는 바로 거울 단계가 이 ‘자연과 문화의 돌쩌귀’ 역할을 한다. 아기는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 유기체에서 인간으로 화한다. 이 점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와는 달리 모든 형태의 생물학주의를 물리친다.

라캉의 사상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함축을 띤다. 주체가 자기동일적 투명성의 존재가 아니라 자기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타자 즉 상징계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은 근대적 주체 개념과는 판이한 주체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기토가 해체된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안돼(non)’


아기는 이자 관계에서 삼자 관계로 넘어간다. 이때 아버지가 출현한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상징계의 은유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없는 고아의 경우라도 상관없다. 아버지는 곧 법(法)의 세계이며 달콤한 상상계와 대비되는 차가운 상징계를 상징한다. 아버지가 등장한다는 것은 곧 아기가 상징계로 진입한다는 것을 뜻한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건너가면서 ‘균열(die Spaltung)’이 생긴다. 그 과정을 통해서 무의식이 구조화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름’이다. 이름이 주체를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작용한다. 즉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리비도/성욕이 규범에 종속된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했듯이, 아기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증오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과정은 의식적 과정이 아니라 무의식적 과정이다.

아기에게 어머니는 하나의 결핍으로서 나타난다. 즉 어머니에게는 남근(phallus)이 결핍되어 있다. 이때의 남근은 생리학적인 남근이 아니라 아버지의 상징, 법의 상징, 상징계의 상징이다.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이 바로 이 팔루스이다. 아기는 바로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자 한다. 즉 자신을 팔루스에 동일화한다. 아기는 어머니의 결핍을 채움으로써 어머니와 더불어 충족한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남자아이 중심의 설명이다.

아버지의 이름(nom)/기표는 곧 아버지의 “안돼(non)”이다. 즉 아버지/상징계는 금지로서 등장한다. 무엇의 금지인가? 바로 근친상간의 금지이다. 그것은 곧 연속성에 대한 갈망을 불연속으로 떼어놓는 과정이다. 연속의 자연에서 불연속의 문화로(이 점에서 레비-스트로스와 통한다).

그런 분리를 거부할 때 아버지/법은 제재를 가하게 되며, 이 때문에 아기는 ‘거세(castration)’ 공포를 느낀다. 그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아기는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며 ‘자아의 이상(the ideal of me)’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상상계에서의 ‘이상적 자아(the ideal I)’와 다른 것이다. 이상적 나는 상상계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나이지만, 나의 이상은 상징계 속에서 타인의 눈길을 통해 형성되는 나의 모습인 것이다.

이 나의 이상을 가지게 되는 것은 곧 프로이트가 말한 ‘초자아(super-ego)’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비로소 주체가 성립한다. 그러나 이 주체는 상징계에 자리를 잡은 주체이지 상식적 의미에서의 주체가 아니다.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언표하는 주체(말하는 주체)와 언표되는 주체(말의 주체)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자아가 억압되고 소외되기 때문이다. 이를 ‘원억압(原抑壓)’이라 부른다. 이것은 의식적 억압과 구분된다. 이러한 억압은 필연적으로 ‘욕구불만(frustration)’을 불러일으킨다(이 욕구불만도 의식 차원에서의 욕구불만과는 구분된다). 상징과 도덕이 욕구불만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불일치’라 하는 것이 나을 듯이 보이는) ‘부정(negation)’의 개념이 등장한다. 이렇게 도덕과 윤리는 균열·틈·입벌림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신경증과 정신병은 바로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성립한다. 즉 상징계에 대한 ‘거부’로부터 발생한다. 여성이 잘 걸리는 히스테리는 자신이 거세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남성에게서 잘 발견되는 강박증은 반대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지나친 기대 때문에, 즉 스스로를 계속 팔루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병들에 대한 치료는 기본적으로 상징계에로의 정상적인 진입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기표에 숨은 기의 그리고 ‘그것(Es)’


주체는 상징계에 들어감으로써 그리고 기표들의 장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게 되며, 하나의 ‘인간’이, ‘주체’가 된다. 물론 인간·주체라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는 근대 주체철학의 그것과 정반대이지만. 요컨대 기표의 상징적 질서가 주체를 구성한다. 이것이 라캉의 기본적인 ‘구조주의적 사유 양식’이며 그를 레비-스트로스에 이어준다. 그러나 이 상징계의 구체적인 내용은 레비-스트로스와 현저하게 다르다.

인간은 언제나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타인이 자신에게 ‘똑똑한 사람’이기를 요구하면, 자신은 타인의 욕망하는 그것을 욕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욕망이 지향하는 것은 곧 기표이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기표가 지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상징계, 같은 구조라 해도 레비-스트로스의 경우와 라캉의 경우는 현저히 다르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가 욕망이라는 기름기가 제거된 수학적이고 명징한 구조라면, 라캉의 구조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욕망 이외의 것이 아니다. 라캉에 이르러 이제 욕망이란 특수한 의미, 부정적인 의미를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 본성으로, 세계의 성격 그 자체로 대두된다.

요컨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현상학의 입장)이 아니다. 기표들의 장이 존재하고, 그 기표들의 장에 의해 주체―의식적 주체 이전에 무의식적 주체―가 구성되고, 그로부터 의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언어의 법칙이 먼저 존재하고 각 개인의 무의식이 그 언어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다.

무의식이 언어적 규칙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언어적 규칙성은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이 무너진 상황에서의 규칙성이라 했다. 그렇다면 그 규칙성은 무엇일까?

한 가지 조심할 것은 기표가 떠다닌다고 말했다 해서, 기표와 기의 사이의 어떤 일정한 관계도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경우 정신분석학을 ‘과학’으로 정립하려 한 라캉의 시도는 좌절될 것이다. 라캉은 구조주의자인 한에서 합리주의자이며, 따라서 구조를 좀더 역동적으로 파악하려 한 것이지 합리적 파악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럴 경우 ‘구조’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구조’라는 말을 쓰는 한 문자 그대로 어떤 구조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라캉에게서 기표와 기의는 일정 지점(‘누빔점’)에서 만난다. 그 지점을 잡아내는 것이 라캉 사유에서 합리주의적 측면이다. 그러나 기표는 궁극적 기의에 끝내 닻을 내리지 못한다. 영원히 알 수 없는 기의의 심연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이 라캉이 합리주의에서의 한계를 긋는 부분이다.

라캉은 이 언어학적 구조들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은유와 환유라고 생각한다. 은유는 압축이다. “불타다”와 “사랑하다”는 “뜨겁다”라는 공통 요소를 함께-중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압축(condensation)이다. 또한 은유는 치환을 특징으로 한다. “부자가 되다”가 ‘돼지’로 치환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이란 바로 이런 은유의 언어로 되어 있다고 했다. 은유는 동시성을 기반으로 한다. “불타다”와 “사랑하다” 그리고 “부자가 되다”와 ‘돼지’ 사이에는 어떤 시간적 선후도 없기 때문이다.

환유는 다르다. 환유는 이행이다. “잔을 들다”는 “술을 마시다”의 환유이다. “잔을 들다”와 “술을 마시다” 사이에는 이행/이동의 관계가 성립한다. 환유에서 두 항은 치환되기보다는 조합된다. 그리고 환유에는 시간적 요인이 개입한다. “잔을 들다”는 “술을 마시다”의 앞에 오며, 또 그래야만 환유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참고로 제유는 부분으로서 전체를 나타내는 경우이다. 사각모는 대학을 나타낸다).

정신분석학자는 기표들(예컨대 환자의 말)을 분석함으로써(즉 그 언어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그런 말들이 뜻하는 환자의 ‘인생’)을 밝혀내고자 한다. 그런데 기표들과 기의들의 관계가 매끈한 일대일 대응을 이루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난점들이 발생한다. 라캉은 모든 열쇠는 결국 기표들이 쥐고 있으며, 우리는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만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의는 기표에 잡히지 않고 계속 미끄러진다. 물론 분석가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기의를 찾아낼 수밖에 없다. 분석가는 기표들이라는 낚시 바늘을 던져 기의들을 낚아낸다. 기표들과 기의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것이 성공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칸트의 물자체처럼, 메이에르송의 ‘탈합리적인 것’처럼 저편에 머무른다. 이곳을 라캉은 ‘실재계’라고 한다. 그것은 언어에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 세계 자체, 인생 자체일 것이다. 라캉의 사유는 상상계에서 출발해 상징계로 가지만 결국 실재계에서 끝난다. 아마 인생의 ‘의미’는 영원히 기호로 포착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 보다.


욕망과 운명


프로이트는 “그것이 있던 곳에서 나는 생성하리라(Wo es war, soll ich werden)”고 했다. 나의 생성을 좌우하는 것은 무의식이다. 그것도 어릴 때 형성된 무의식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워즈워스)라는 말은 정신분석학에서 또 다른 뉘앙스를 획득한다.

그것은 나=자아에게 타자이다.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 타자=다름은 나의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나는 내 안에 나의 타자=무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정신분석학이 던져주는 가장 충격적인 메시지이다.

타자란 무엇인가? 타자는 언어, 기표의 장소, 상징계이다. 이 상징계는 어린아이가 상상계에서 그곳으로 옮겨갈 때 어린아이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다. 어린아이는 상상계의 달콤함과 환상을 포기하는 대신 상징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선다. 또 타자란 상호주체성의 장이다. 상호주체성은 개별적인 주체들 사이에서 추후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상호주체성의 장 내에서만 주체들은 주체들일 수가 있다. 상징계에 들어서는 동시에 개인들의 무의식에는 상호주체성이 각인된다.

헤겔에게서 한 인간의 주체성은 타자를 통해서만, ‘자아 속의 이상한 자아’로서의 타인을 통해서만 형성된다(인정투쟁). 라캉에서도 자아는 자신 속의 이상한 자신으로서의 타자=무의식을 통해서만 형성된다. 상징계는 팔루스이며 상징계를 채우고 있는 욕망은 팔루스에의 욕망이다. 팔루스는 욕망의 기표이다. 욕망은 팔루스라는 기표를 통해서 형성된다. 그런데 욕망(desire)은 욕구(need), 요구(demand)와 다르다. 욕구는 생리학적 필요이지만, 요구는 타인에 대한 간청이다. 어린 아기는 사탕을 욕구하지만 엄마의 사랑을 요구한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이에 비해 욕망은 보다 근원적인 것이다. 욕망은 어떤 구체적인 맥락에서의 부재가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에서 온다. 결핍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이미 형성되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이다. 인간은 그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며 따라서 그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그 원초적 결핍으로부터 욕망이 나온다.

욕망의 근원적 기의는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이미 상징계로 들어선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래서 욕망의 기표는 팔루스이다. 그러나 욕망 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 팔루스를 욕망하는 것은 주체가 되기 위한 것, ‘인간’이 되기 위한 것, 일종의 타협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형태로든 정신병을 앓기 때문에 거치는 통과의례이다. 그러나 도대체 욕망이 근원적으로 지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실재계를 영원히 알 수 없듯이 이 또한 알 수 없다. 라캉은 이곳을 ‘신화의 세계’라 부른다. 인간은 어떤 쪼개짐으로써, 갈라짐으로써 인간이 된다. 로고스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이 동시에 분열의 경험이라는 것이 인간의 얄궂은 상황이다. 따라서 욕망의 근원적 기의는 그 어떤 쪼개짐도, 갈라짐도 없는 그 어디일 것이다. 이런 욕망을 가지고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라캉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이다.

라캉은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한편으로 욕구와 유사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성애적(性愛的)” 측면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다. 충동은 생리학의 영역에서 정신분석학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존재한다.

인간이 욕망의 존재인 한, 인간은 번뇌의 존재이다. 도덕이나 윤리는 상징계를 받아들임으로써 성립하며, 따라서 인간의 영원한 번뇌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라캉에게 번뇌를 해결하는 길은 우리가 왜 그렇게 번뇌의 존재일 수밖에 없는지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번뇌의 실체를 알게 되며 그로부터의 공허한 몸부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라캉의 사유는 불교와 접맥된다.


라캉 사유의 의미


자크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받아들여 그것을 보다 넓은 지평에서 참신하게 재창조했다. 라캉이 프로이트와 구분되는 점은 프로이트와는 달리 극히 철학적인 성격의 담론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라캉을 통해서 정신분석학과 철학은 교차하게 되며, 그로써 주체·자기·욕망…을 비롯한 숱한 문제들이 새로운 지평에서 논의되게 되었다. 이 점에서 라캉이 현대 사상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하겠다.

라캉의 사유는 오늘날 슬라보예 지젝을 필두로 하는 ‘슬로베니아 학파’에 의해 계승되어 계속 확장되고 있다. 또 라캉의 사유는 문화예술 분야에 두드러진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현대 사상을 수놓고 있다.

Copyright 월간 넥스트 All right reserved. 2005년 07월

2007/04/07 11:00 2007/04/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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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프리즘] 한국문학에 나타난 동성애
병리성 혹은 낭만적 이상화의 클리세
김은하 _ 중앙대 강사 / 문예창작  

기괴한 남색가로든, 속 깊고 다정한 동성친구로든 간에 한국문학(문화)에 동성애자나 동성애가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적어도 해방 이후부터 1990년대 이전까지 게이·레즈비언들은 문학 동네에서 유령으로도 떠돌지 못한 채 ‘부재’했다. 물론 그들은 드물게 서사의 장으로 불려나오기도 했지만, 늘 병리성의 상징이거나 인간의 추악한 심연의 대리표상이었을 뿐이다.

이상화된 동성애자와 가부장제의 회한


최근 영화 <왕의 남자>(이준익, 2005)나 <브로크백 마운틴 Brokeback Mountain>(이안, 2005)의 대중적 성공이 가히 ‘어메이징’한 변화로 여겨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영화들은 동성애자가 주인공이고 동성애가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상’ 가족과 이성애자를 불러 모으고 심지어 가슴 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맑은 눈물을 흘리게 했다.

이는 분명 동성애를 ‘구역질나는 비역질’이나 유년기의 성적 트라우마와 연관짓던 관행, 즉 동성애자에 대한 이성애자의 폭력적인 상상력과는 다르다. 특히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부정적인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이상적인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악의에 찬 재현과 구분되는 이상화된 이미지가 등장한 것이다.

두 작품은 잘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촌스러운 인상을 남기는데, 무엇보다 거기에는 낭만적 사랑의 신화가 훼손되지 않은 채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게이 주인공들은 사랑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연인의 죽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자신도 이미 죽어버렸음을 감지한다. 우리 시대에 사랑의 탈낭만화가 가속화되고 있음을 고려해 본다면 관객들이 흘린 눈물은 되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회한이자, 희미한 옛사랑에 대한 애도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영화들은 게임으로서의 연애와 섹스가 넘쳐나는 시대의 얄팍한 표면을 비추고 과거로의 퇴행과 향수의 욕망을 자극한다. 물론 이 눈물은 들춰봐도 그러한 사랑의 기억을 찾을 수 없는 허전함일 수도 있다. 과거란 실상 적당히 조작된 것이고, 향수는 무지와 은폐에서 비롯되는 속성이 있지 않은가? 어쨌든, 이 작품들의 배경은 상당히 고전적인데, 그곳은 역사책 속의 한 페이지 같은 조선이거나, 로데오 경기가 펼쳐지고 굵다란 시가를 문 ‘싸나이’들이 있는 옛날의 서부다.

이렇듯 고전적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숭고한 사랑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뚜렷하게 부각시키며 이성애 제도를 재생산한다. <왕의 남자>의 공길은 예쁘고 감성적이며, 늘 위기에 처해 남성들의 구출 환타지를 완성시켜주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여성이다. 장생은 비록 천한 광대지만 강인한 육체와 지력 그리고 연인에 대한 순도 높은 열정을 갖춘 신사의 전형이다.

다른 한편으로 <브로크백 마운틴>은 남성들의, 여성적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을 보여준다. ‘조잘대는’ 아내들이 주도하는 부부 모임에서 남자들이 주고받는 거의 유일한 대화는 집을 벗어나 낚시를 가고 싶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우회적으로 남성을 밥벌이꾼으로 추락시킨 산업화에 대한 염증, 양육을 비롯한 급증하는 가정적 의무, 남성의 공적 지위를 위협해오는 여성들의 약진 등 거세 위협에 직면한 현대 남성들의 고뇌와 공포를 표현한다.

이렇듯 이 두 편의 영화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이성애적 제도에 대한 퀴어적 냉소의 참신함보다는 이성애 문화에 대한 향수와 여자들의 시대에 대한 환멸 때문은 아니었을까? 영화는 동성애자라는 미지의 캐릭터를 통해 남자다운 남자와 여자다운 여자가 있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 혹은 회한을 드러낸다.

이성애제도는 기괴한 드래그 퀸(drag queen:여성복장을 즐기는 남성)의 퀴어 공동체가 아니라 꽃보다 예쁘거나 터프한 게이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를 통해 차이의 목소리가 드높아진 시대와 손해 보지 않을 타협을 했다. 그러한 타협과 양보(?)는 미덕인가? 동성애/동성애자를 이상화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은폐하는 일이다.

최근 영화나 소설은 동성 관계에 대한 낭만적 환타지를 엿보인다. 예를 들어 동성애 영화는 아니지만 자매애적 연대를 그리고 있는 <싱글즈>에서 돈 없고 혼기 찬 처녀들이 비록 고물차를 탔지만 전도양양한 왕자를 버리고 동성 친구를 선택하거나, 미혼모가 되기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은 조금도 지난하지 않다. 이들이 이성애 제도에도 흔들리지 않은 우정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서른이어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모든 것을 소비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동성애 역시 스펙터클한 상품일 수 있다. 동성애 영화에 대한 열광이 반드시 성소수자로서의 이들의 인권에 대한 윤리적 의식을 고양시키거나, 가부장적 이성애 제도에 대한 반성으로 귀결되지는 않는 것이다.


거세공포의 문학과 ‘열정’의 시기 그리고 동성애


앞서도 말했지만,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의 소설에서 동성애자 찾기란 ‘윌리를 찾기’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필자는 이른바 제도권 밖의 게이, 레즈비언 문학에 대한 별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 글은 문학이라는 제도가 인준해 준 작품들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편협하다. 참고로, 동성애/동성애자가 언급되는 정도도 있지만 꽤 비중 있게 그려진 작품 중 필자가 이 글에서 거론하지 않은 작품을 밝혀둔다. <나는 너무 멀리왔을까>(강석경), <마짠 방향으로>(배수아), 《내가 사랑한 캔디》(백민석), 《그녀의 여자》(서영은), <송어와 은어>(송경아), 《꽃을 던지고 싶다》(이명랑), <남자의 기원>, <다섯 번째 질서와 여섯 번째 질서 사이에 세워진 목조마네킹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전경린), <푸른 수염의 세 번째 아내>(하성란)).

한국 현대소설은 일제 식민지, 미군정기, 분단, 반(半)식민 근대화, 전체주의적 근대화를 겪으며 일정한 서사적 관습을 형성하는데, 이때 한국 소설이 발견해 낸 문제적 인물은 오욕에 찬 역사로 인해 주체성이 훼손당하고, 이를 복구하고자 하는 남자였다. 그는 어머니나 누이가 이국 병사에게 겁탈당한 기억 때문에 수치스러워 하거나, 미군의 원조 덕분에 이룩한 산업화의 부정성을 고뇌하며, 분단과 이후 전체주의적 근대화 과정에서 사상의 자유를 억눌린 남자였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개발과 독재의 정치와 격렬하게 투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수치스러운 식민의 기억을 지워버릴 만한 민족 국가에 대한 국가의 열망을 내면화하며 가부장권을 강화하거나 좀더 남자다워져야 할 필요가 있는 남성들이었다. 

국가에 협력하든 저항하든 남성다움은 이들의 열망의 대상이었다. 한국 현대문학은 보수와 진보, 자유와 실천의 대립구도가 무색하리만큼 여성·섹슈얼리티·무의식·자연·사적 영역 등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문학은 이성애적 제도 위에 스스로를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재생산해 냈다. 특히 근대적 민족 국가 건설을 향한 집단적 소망은 섹슈얼리티를 엄격한 규제 대상으로 만들었다. 《별들의 고향》(최인호, 1972)의 문호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섹스와 소비를 상징하는 경아가 죽어야만 했다. 문호의 입사식(入社式)은 자신이 근대적 생산에 협력하지 않고 섹스에 탐닉했다는 반성과 함께 이루어진다.

또한 <壯士의 꿈>(황석영, 1974)에서 산업화와 욕망의 부정성을 상징하는 ‘따루마 감독’은 “알록달록한 홈스펀 저고리” “빨간 구두” “희고 보드라운 살결” 긴 머리의, “불알이 없는” 남자로 묘사된다. 이 작품은 도시(산업화)의 부정성을 거구의 장사인 일봉이 도시로 와 포르노 배우와 남창을 전전하다 급기야 성기능 상실자가 되는 과정을 통해 비판한다.

소설은 그가 귀향을 서두르면서 순간적으로 성적 기능을 회복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데, 이러한 성적 비유들은 한국현대문학의 근저에 거세 콤플렉스가 자리잡고 있음을 암시한다. 남성성은 이성애제도의 산물이자 그것을 보완하는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문학은 매우 가부장적이다. 이는 문학 작품 속의 여성의 주변화나 동성애자의 부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국문학이 다양한 차이들에 주목하지 못했다는 점은 여성 캐릭터는 ‘창녀’ 아니면 어머니 밖에 없고, 동성애자는 전무한 데서 증명된다. 

그러나 한국문학사에는 동성애자가 반드시 병리성의 징후이지 않은 때도 있었다. 이광수의 초기 소설 <윤광호>(《춘추》 1918년 4월)는 동경 K대학 경제과 학생인 윤광호가 동성의 P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거부당하고 자살하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또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장편 소설인 《무정》(이광수, 1917년)에는 기생 영채와 그녀가 형님처럼 따르는 명기 월화가 육욕에만 눈 먼 호색한들에 대한 혐오와 원치 않는 삶을 사는 데서 오는 슬픔으로 서로를 끌어안는 장면이 버젓이 등장한다.

이들의 성애는 암시적이기보다는 제법 노골적이다. 그러나 서술자는 윤광호나, 스스럼없이 서로의 육체를 어루만지는 여성들을 향해 비난의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이들이 눈 뜬 관능은 오히려 사람다운 자각으로 조명된다. 사춘기에 접어든 윤광호가 어느 날 발견한 것은 자기 속의 “크고 깊은 공동(空洞)”(289면)으로 비유된 깊은 고독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열정으로서의 사랑이다. 열정을 가진 개인의 발견은 근대의 부르주아지가 형식과 의무에 매인 삶을 산 봉건적 세대와 스스로를 구별 짓는 지점이었다.

최정희의 《녹색의 문》은 비록 발간된 시기는 1953년이지만, 식민지 근대화기를 소설의 배경으로 취하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여성 간의 제법 진한 성애 장면이 등장한다.  개인의 열정은 공적이거나 이타적인 욕망으로 전환되지 못해 비판받기는 해도, 소설 속 인물들은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했다고 반성하지는 않는다.

언론은 1931년 명문가의 딸인 홍과 부호의 며느리인 김이 동반 철도자살을 하자 이를 “과도기에 처해 잇는 조선 여성 중의 애매한 타입을 가지고 엄벙하니 떠도는 여성 중의 한 사람의 파국”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기혼녀인 김의 자살이 부모에 의한 강제 결혼 생활에서 기인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백면아의 이 글은 이들의 죽음에서 봉건적 조선의 폐해를 통찰해내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동성애 관계로 적극적으로 읽어내지 않는다. 이는 동성애를 이성애제도에 대한 갈등과 전복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당시는 식민지 시기 최초로 근대적 여학교가 세워지고 여학생들이 가족을 벗어나 동성과의 관계라는 최초의 사교관계를 경험하면서 여학생 동성애가 문젯거리로 등장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당대의 담론들은 여성 동성 관계가 여성들의 이성애적 탈선을 막아줄 것이며, 얼마 되지 않아 없어질 일시적 풍조라고 해석한다. 동성애에 대한 관대한 시선은 이성애 제도가 그만큼 강고했음을 의미한다. 어쨌든 저 혼란스럽고 전복적이며 열정적인 시대를 거쳐 해방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동성애자는 실종되어 버린다. 식민지 근대화를 주도한, 스스로를 봉건적 아비와 구별 짓고자 한 오빠의 시대가 가고, 국가 재건과 근대화라는 총력전에 앞장 선 아버지들의 시대가 온 것이다. 오빠와 아버지의 거리가 그리 먼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페미니즘의 레즈비어니즘 끌어안기


동성애가 문학 작품을 통해 적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이후 여성 작가들에 의해서였다. 90년대 문학은 문학사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 주목해 볼 때 매우 이질적인 시대라 할 만하다. 이 시기의 문학의 주류를 형성한 이들은 30대의 여성 작가였고, 성·사랑·가족은 이들의 주된 서사의 장이었다.

이는 이전 시기 문학을 주도한 남성 작가들이 주목해 온 전쟁·분단·노동·이념·변혁·산업화·전통 붕괴·농촌 해체 등과 같은 비교적 큰 이야기와는 다른 것이었다. 여성 작가들은 동성애/동성애자라는 제재를 전략적으로 활용해 가부장제의 억압성을 환기하거나 그것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다.

페미니스트 문학은 가부장제에 의해 훼손된 여여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여성적 주체성을 되찾기 위한 시도로서 레즈비어니즘을 수용했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의 존재는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결정된다. 이를 테면 여성들은 거주, 가사, 경제적 조건, 사회적 지위 등의 장치를 통해 아버지나 남편과 유착 관계를 맺고 모든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지위를 구비한 남성들로부터 물질적 보호를 받기 위해 그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타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창조성의 상실은 여성되기의 절차이며 무력함은 여성적 미덕으로 미화된다. ‘아버지의 법’을 수행하는 정상적인 여성이 되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연대와 상호이해보다는 서로에 대한 적대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녀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자매이다. 또한 서로 한 몸으로 살았던 시절을 잊고 서로를 수치스러워 하며 유기하는 어머니와 딸이다. 

레즈비어니즘은 단지 동성 간의 육체의 교류가 아닌 서로를 동반자로 받아들임으로써 남성의 피보호자-타자라는 여성의 무력한 위치를 벗어나는 계기로 조명된다. <하나코는 없다>(최윤, 1994년)는 삶의 심연 앞에 직면한 남성들이 어떻게 여성을 타자화함으로써 그 위기를 피해 가는지 보여준다. 이니셜로 표기된 동창생들은 자신들의 이너서클이 지루해졌을 때, 사귀던 여자와의 심리전에 지쳤을 때, 삶의 무의미성에 직면 할 때 ‘하나코’를 불러낸다.

그들 각자는 그녀에게 구애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기도 하지만 서클의 결속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그녀를 각각 한 발짝만큼의 거리를 둔 채 공유한다. 그들은 동창이면서 동시에 사업적 파트너이기도 하다. 하나코는 지나치게 똑똑하지 않으면서도 지혜롭고, 대단한 미인은 아니지만 매력이 있으며, 친구이면서 연인 같아서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되는, 남자에게 아무 것도 청구할 권리가 없는 첩이다. 하나코라는 별칭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훼손되는 여성의 주체성을 암시한다. 소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디자이너로 성공한 하나코의 곁에 사업적 파트너이자 동반자인 동성 친구가 있음을 밝힘으로써 레즈비어니즘을 페미니즘과 결합시킨다.    

이렇듯 <하나코는 없다>가 레즈비어니즘을 여성 간의 육체적 접촉으로만 규정하는 포르노적 시선을 차단하며 여성들을 서로의 감정과 내면생활을 공유하는 동반자로 제시하는 데 비해 근친상간 못지않은 금기인 동성의 육체를 끌어안는 위반을 범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여성들의 에로틱한 성적 행위는 모성의 몸으로 규정당하면서 억눌린 여성의 성적 욕망을 되찾고 거울과 저울 사이에서 사물화된 여성의 몸을 자유롭게 하는 제의가 된다.

<밤의 수영장>(강영숙, 2002년)에서 한때 수영선수였던 여자는 지금은 비대한 육체를 향한 타인의 경멸적 시선 탓에 손님이 빠져 나간 수영장에서 코르셋에 갇힌 몸을 풀어놓는 수영장 직원이다. 여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때는 인어같이 날렵했지만 지금은 빈곤과 양육 노동에 짓눌린 뚱뚱한 여자를 만나 서로의 육체를 끌어안음으로써 “오랜 세월 짓눌린 살들”을 물 밖의 세상에 부드럽게 풀어놓는다.

<세번째 유방>(천운영, 2004년)은 세 번째 유방을 가진 여성들의 동성애를 통해 여성의 몸의 주권을 탈환하려는 판타스틱한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여성의 유방은 아기·연인·법원·의학·포르노 작가·예술가·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해 그 의미가 확정되어왔다. 그것은 아기에게 생명을 주는 좋은 것으로 칭송받는 동시에 유혹의 미끼로 비난받는다. 남성 사회가 소유할 수 없는 여성의 주체성을 상징하는 세 번째 유방과 서로의 육체를 매개로 자신의 육체를 나르시스틱하게 향유하는 여성동성애자들의 섹슈얼리티는 여자의 유방을 소유함으로써 수컷다움을 회복하려는 남성의 기획에 부딪힌다. 비록 여자는 남자의 칼에 찔려 죽지만, 남성이 끝내 차지하지 못한 세 번째 유방과 여성동성애는 남성지배가 관철되는 몸을 여성주체성을 재구축하는 장소로 재전유한다.

<무궁화>(정이현, 2003년) 역시 여성의 성기와, 국가를 상징하는 무궁화를 병치시킴으로써 개인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특히 동성애/레즈비언의 서로를 향한 욕망을 질시함으로써 처벌해온 가부장적 국가에 대한 반격을 시도한다. 주인공은 기혼녀인 연인이 끝내 사회적 시선의 폭력이 두려워 떠나버리자 동성의 사랑을 허용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도발을 감행하듯 자신의 성기를 카메라 렌즈에 담아 사랑하는 너의 사진 옆에 붙여둔다.   


지배적 관습에 대한 반란


페미니스트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차용된 레즈비어니즘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데 비해 스토리의 작위성과 관념성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플라스틱 섹스>, <여자가 여자일 때-플라스틱 섹스 Ⅱ>, <어두운 열정―플라스틱 섹스 Ⅲ>(이남희, 1997년)는 성·사랑·가족 등 미시적 영역의 변화를 발빠르게 읽어내면서 새로운 시대의 전망을 찾으려는 열망이 진지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작품은 페미니스트의 계몽적 의도가 앞설 때 그것이 역설적으로 레즈비어니즘을 신비화하는 우를 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초록이 자신들의 사랑을 부인하는 은명에게 분노해 그녀의 소설이 담긴 노트북을 가지고 달아나자, 은명이 초록이를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몸과 정신의 괴리를 엿보고, 이를 화해시키려는 관념적 사색으로 채워져 있다. 사실 이 작품은, 몸은 이미 개종되었지만 머리가 몸의 해방을 가로막는 족쇄이기는커녕, 머리는 이미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정치적으로 올바른 대안으로 선택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는 80년 세대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은명의, 신세대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90년 이후 성정치 운동의 포문을 연 신세대 레즈비언을 향한 호기심과 이에 대한 지적 성찰은 전망이 사라진 시대 앞에 선 80년 세대의 절망과 고뇌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문제는 성급하게 레즈비어니즘이 대안으로 호출되면서 페미니스트의 마술지팡이로 수단화된다는 것이다. 이십대의 레즈인 초록이는 은명의 젊음에 대한 선망과 뒤섞여 지독히 매력적이고 개성적인 인물로 진술된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한 여성들의 애절한 회고에도 불구하고  독자 스스로가 그것을 판단하고 동의할만한 객관적 근거는 허약하기만 하다. 집 나와 뚜렷한 직업 없이 세상을 떠도는 어린 레즈비언이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조금만 더 나이 들면 쓸쓸히 동사할 수 있다는 공포로 영혼을 잠식당할지도 모른다. 동성애자를 질시하는 것만큼이나 대안적 삶을 요구하는 것 역시 혹독한 강요일 수 있다.

위에서 거론한 <무궁화> <밤의 수영장> <세번째 유방> 역시 작위성을 면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선명히 드러나는 이론적 구도, 다소 생뚱맞거나 뻔한 결말, 정치적으로는 올바르지만 정서적 울림을 주지 못하는 등의 한계가 엿보이는 것이다. 동성애자의 경험과 감수성을 의도적으로 내세운다고 해서 이성애 제도에 기반한 관습적 상상력에 균열이 일어나리라고 보장할 수도 없다. 본격적인 동성애 소설이 더 짙은 작위성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성소수자나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의식은 덜 두드러진다 할지라도, 이성애 제도의 관습적 상상력과 충돌하는 동성애/동성애자 캐릭터나 그들의 경험은 남성성/여성성의 젠더 도식에 혼선을 가져와 가부장 제도를 잠식할 수 있다.

오정희의 <완구점 여인>(1968년)은 소녀가, 휠체어 여인과의 동성애적 관계를 통해 성에 대한 관능과 혐오, 죽은 동생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깨어진 가족을 대한 애절한 상실감을 경험하며 세계와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자각해 내는 과정을 담아낸다. 도벽에 시달리고 청결한 학교 복도에 뻣뻣이 선 채 오줌을 누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 소녀의 성장 담화는 관습적인 소녀의 성장담과 충돌하며, 여성되기의 통과의례를 겪는 사춘기 소녀의 지난한 성장통을 여실히 보여준다.

소녀의 계모에 대한 혐오의 시선이 연민의 감정과 복잡하게 뒤섞이는 과정은 여성의 정체성이 모성으로만 규정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走者>(주자, 1969년)는 비록 성소수자로서의 확고한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지만 동성 연인의 자살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편으로 자신의 게이 정체성을 부인하는 남성의 갈등을 통해 역설적으로 성소수자들의 허약한 관계와 불안한 내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인간 주체를 섹슈얼리티를 통해 낙인 찍고 인격화하는 이성애제도로부터 탈주하듯 질주하는 남자에게서 사회적 타자들이 겪는 소외와 억압을 읽을 수 있다.

<절규>(윤이형,문학사상 4월호) 역시 가족과 세상이 받아들여주지 않는 사랑을 하는 레즈비언과 가부장적 아버지와 가족으로부터 상처 입은 이성애자 여성의 소외를 절규의 모티프 위에 겹쳐 놓음으로써 사회적 타자들의 연대와 공감의 상상력을 확대해 나간다. 이는 동성애 모티프가 이성애 문화에 기반한 한국문학의 외연을 확장하고 내연을 새롭게 하는 해체의 일환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성애, 이성관계에 대해 이미 쓰라린 실망을 맛 본 우리 시대는 동성애나 동성 관계에 대한 판타지를 부여함으로써 또 다시 그들을 타자화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렇듯 우리 시대에 동성애가 소환되는 방식은 실상 그다지 새로운 것도 아니다. 과도한 단순화일 수 있지만, 한때 정치적 세대들은 역사와 자기 세대들에 대한 환멸을 페미니즘이나 에콜로지 같은 새로운 요술램프에 기대어 극복하고자 했다. 문제는 전망에 대한 강박적이거나 야단스러운 기대는 결국 조만간에 또 다른 환멸과 혐오로 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한국문학의 관습이 동성애라는 하위담론과 만나 어떻게 소통하고 변신을 모색할 지를 신중하게 지켜 볼 일이다.


Copyright 월간 넥스트 All right reserved. 2006년 06월

2007/04/07 10:56 2007/04/0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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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새로운 이론과 사상]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 이론
분리의 경계선 가로지르는 어머니 몸
박주영 _ 순천향대 교수 / 영문학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현대 사상과 이론을 매우 다양하게 섭렵하여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을 전개한다. 크리스테바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이론, 러시아 형식주의와 바흐친의 대화 이론을 심도 있게 연구했으며, 롤랑 바르트(구조주의)·루시앙 골드만(문학이론)·레비-스트로스(사회 문화 인류학)·자크 라캉(정신분석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다양한 사상적 영향 속에서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 이론이 갖는 특징은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조명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이 가부장적인 관점에 토대를 두고 있다면,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정신분석의 기본틀을 수용하면서 모성의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대 어머니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은 전(前)오이디푸스적 어머니와 가부장적 상징계의 아버지, 그리고 아이가 이루는 삼각구조를 토대로 한다. 전통적인 정신분석 담론이 그려내는 아버지는 엄격한 이미지를 지니며 법의 세계를 상징하고, 상대적으로 어머니는 수동적이고 침묵하는 이미지 안에서 몸을 표상한다.

프로이트와 라캉에 따르면 전오이디프스적 어머니는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분리해야 하는 존재이며, 아이는 전오이디프스적 어머니와의 분리 이후 아버지의 상징질서에 진입하여 주체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문명을 공격적인 욕구충동(drive)의 억압으로 규정하는데, 이때 욕구충동이란 아이가 어머니의 몸과 맺은 전오이디푸스적 관계에 내재하는 본능적인 충동을 의미한다. 아이가 문명화되는 과정은 초자아를 형성하여 사회적 주체가 되는 것으로, 이때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볼 때 아이는 아버지의 중재를 통해서만 어머니의 몸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상징적인 법을 대변하는 아버지는 아이가 어머니와 분리되지 않는다면 거세하겠다는 위협을 가한다. 남아는 이러한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어머니와의 최초의 동일시를 포기하고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억압한다.

한편 여아는 이미 거세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거세 위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이는 여아가 남아와 달리 초자아를 충분히 발달시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 여아는 페니스를 소유하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페니스를 소유한 아버지에 대한 선망을 통해서 주체성을 획득하고자 하지만, 여성은 아버지의 거세 위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한 의미에서의 주체성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성차에 따른 주체에 관한 기본적인 해석이다.

프로이트가 생물학적 차이에 기초하여 성차에 따른 주체를 해석하는 반면, 라캉은 생물학적 차이를 강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라캉 역시 주체가 상징질서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점에 초점을 둔다. 라캉은 어머니를 생물학적 욕구(need)의 영역에 한정시켜 놓고, 아이가 언어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 거부되어야 하는 존재로 어머니를 설정한다.

라캉에 따르면 아이에게 어머니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존재이다. 그러나 점차로 아이가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결핍(lack)을 경험하게 될 때 어머니의 존재는 명확해진다. 거세(결핍)의 위협―라캉은 프로이트의 거세의 위협을 욕구충족의 결핍으로 전환시켜 설명한다―속에서 아이는 결핍을 요구(demand), 즉 언어로 대체한다.

궁극적으로 아이의 욕구는 요구하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충족되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욕구에 언어가 개입하게 됨에 따라 ‘욕구’와 ‘욕구를 표현하는 요구’ 사이에는 간극이 발생한다. 따라서 언어의 획득과 함께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이 원하는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 욕구와 요구 사이의 이러한 괴리를 라캉은 ‘욕망’(desire)이라고 명명한다. 욕망은 완전히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아이는 아버지의 위협과 금지를 통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세계로 들어선다. 어머니의 몸은 아이에게서 멀어져 심연으로 떨어지고 그 자리에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상징계가 들어선다. 아이가 언어를 획득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몸과 분리된다는 것을 뜻한다.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 이론은 침묵하는 어머니를 복원하여 모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크리스테바의 주된 관심은 프로이트와 라캉이 간과한 어머니의 위상과 의미, 다시 말해 주체가 상징질서에 진입하기 이전의 어머니의 몸과 이후의 어머니의 몸에 관한 논의에 놓여 있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에서 어머니의 몸은 주체가 분리를 체험하는 근원적인 공간이다. 하지만 크리스테바가 역설하는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의 몸은 상징계에 진입한 후 사라지거나 상징계 밖에 존재하는 몸이 아니다.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의 몸은 주체와 분리된 후에도 주체의 무의식 속에 흔적으로 남아, 상징계 질서가 수립한 ‘분리의 경계선’에 침범하여 그 선을 순간적으로 와해시키는 전복적인 힘으로 남아 있다. 다시 말해 크리스테바의 이론에서 어머니의 몸은 전오이디푸스적 영역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상징계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상징질서를 위협하는 공포의 힘으로 존재한다. 


‘입과 항문과 성기’를 넘어서기


《공포의 힘들 : 애브젝션에 관한 에세이》에서 크리스테바는 억압된 어머니의 몸이 결코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채 주체가 상징계에 진입한 후에도 상징계를 분열시키는 파괴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크리스테바는 ‘애브젝트’(abject)와 ‘애브젝션’(abjection)이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통해 적합한 주체와 주체성이 형성되기 위해 어떻게 부적합하고 더럽고 무질서한 것들이 배제되어 왔는가를 분석한다.

애브젝트가 더럽고 천하며 역겨운 대상을 의미한다면, 애브젝션은 애브젝트에 대한 주체의 반응을 의미한다. 보통 우리가 역겹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는 오줌·똥·토사물·침·신체의 털 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청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보거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을 찡그리고 눈살을 찌푸리거나 토할 것 같은 메스꺼운 느낌을 주는 대상들이다. 애브젝트가 더럽고 역겨운 대상이라면, 애브젝션은 주체가 그 대상에 대해 갖는 육체적이면서 상징적인 어떤 느낌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빈번히 애브젝션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식사 중에 누군가 배설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갑자기 식욕이 저하되면서 구토증상과 함께 비위가 상하는 경우가 좋은 예이다.

그렇다면 애브젝트와 대면한 주체가 애브젝션을 체험하면서 애브젝트에 저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러움과 청결함의 구분은 문명형성의 기본틀로서,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문명은 불순한 근친상간적 요소들을 추방(expulsion)하는 것에 기초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문명화과정에서 배제된 애브젝트는 원초적 억압의 대상을 상징하며, 따라서 원시와 문명의 경계를 표상한다. 프로이트가 가부장적 상징질서에 주체가 진입하는 것을 문명화과정으로 설명한다면, 라캉은 주체의 상징질서에로의 진입과정을 언어획득과정으로 설명한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가 아버지의 법(역할)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와의 관계에만 머무른다면 심리적·언어적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 프로이트와 라캉 이론의 공통점은 분리의 논리에 입각하여 원시와 문명 또는 어머니의 몸과 아버지의 법에 대한 분명한 경계설정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테바는 명확한 경계를 설정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억압되고 경계에서 제외된 ‘애브젝트’는 결코 완벽하게 제거되지 않고 무의식 속에 계속 남아 있으면서 끊임없이 주체를 위협하며 체제와 정체성을 어지럽히는 전복적인 요소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상징질서가 요구하는 주체와 대상 간의 명확한 경계가 애브젝션에 의해서 흐려지고 모호해지는 것이다. 경계가 흐려진다는 것은 분리를 갈망하지만 동시에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애브젝션을 유발하는 애브젝트는 단순히 청결함이 결여된 것이 아니라 정체성·체제·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소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애브젝트는 그 자체가 애매모호하고 간극에 위치한 경계나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복합적인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애브젝트는 상징계에서 요구하는 적합한 것과 부적합한 것, 질서와 무질서, 청결한 것과 불결한 것의 명확한 구분과 구별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애브젝트는 애매모호하고 안과 밖의 구별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분류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유의 표면에 생성된 얇은 막, 삶을 감염시키는 죽음을 상징하는 시체, 자생적으로 생겨나며 다른 생명체를 흡수해 버리는 감염과 오염 등은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애브젝트의 좋은 예이다. 이 밖에 썩은 고기, 추방되어야 하는 금기나 부정물(不淨物), 법을 위반하는 범죄, 기독교에서 죄라고 부르는 도덕적 위반행위도 애브젝트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애브젝트는 도덕과 윤리의 확고부동함을 뒤흔들고 적합한 것과 부적합한 것의 경계를 허물며 혼돈을 자아내는, 애매모호한 대상 아닌 대상을 암시한다. 또한 애브젝트는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에 대한 관계를 뜻하며, 경계 또는 주변부에서 제외되어 ‘내던져진 대상’(jettisoned object)을 뜻한다. 하지만 내던져진 상태에서도 애브젝트는 상징질서를, 즉 주체와 사회의 정체성을 위협할 수 있으며, 이미 수립된 경계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점에서 애브젝션은 억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배제이자 추방을 뜻한다. 애브젝션이 ‘추방하는 것’ 또는 ‘배제함’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자연을 상징하는 육체의 영역과 당혹·수치·죄책감·욕구 등이 작용하는 사회적·상징적 영역 간의 대립구도를 암시한다. 보편적으로 역겨움에서 나오는 구역질·토사·경련·질식 등은 이성적 사고가 수용할 수 없는 육체적 과정과 영역을 보여준다. 부패한 음식물이나 더러움·찌꺼기·오물에 대한 혐오감이 생길 때 주체가 경험하는 근육의 경련이나 구토증상은 오물이나 시궁창 같은 더러운 것들을 멀리하고 피해갈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보호막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애브젝션은 사회의 규범과 규율에 따라 단일화되고 통제되는 몸의 영역과 감각들을 가로지르는 부산물이다. 애브젝션이 몸 전체를 ‘가로지르는’ 효과를 갖고 있다는 것은 경계를 설정하기 모호하고 경계를 흐린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애브젝션은 심리적이면서 생리적인 것으로, 그 안과 밖을 구별하기 어려운 흡수와 배설의 순환구조에 토대를 둔 아이의 구조화된 육체적 경계이다. 흡수되고 배설된 대상―음식물·오줌·똥·토사물·눈물·침―은 나중에 성감대(입·항문·눈·귀·생식기)로 전화되는 다양한 육체의 영역과 관련을 맺는다.

크리스테바는 애브젝션을 세 가지 형태로 분류한다. 음식물과 관계 있는 구강, 배설물과 연관되는 항문, 그리고 성차(性差)와 관계가 있으며 성욕을 의미하는 생식기가 그것이다. 구강 혐오감은 애브젝션의 가장 고전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는 음식물에 대한 혐오감과 관계가 있는데, 우유 표면에 생긴 얇은 막에 대한 역겨움은 구강 혐오감의 좋은 예이다.


부정(不淨)한 어머니의 몸


크리스테바는 오염된 것과 성스러운 것 사이의 경계형성과 구별짓기를 파악하기 위해서 성서 ‘레위기’에서 묘사하는 혐오감의 논리에 주목한다. 이것은 메리 더글라스(Mary Douglas)가 《순수와 위험》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는데, 크리스테바는 더글라스의 인류학적 고찰을 토대로 구강과 항문 애브젝션이 더러운 음식, 부정한 것에 대한 사회적 금기와 관계 있음을 밝힌다.

더글라스는 ‘레위기’에서 다양한 음식에 연관된 혐오감과 금기는 명백히 분류할 수 없는 동물들에 대한 금지에 기초한다고 설명한다. ‘고유하고 적절한’ 환경에서 자란 동물들만이 깨끗한 음식으로 분류되어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날아다니는 새, 아가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 네 다리로 걷고, 새김질하고,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진 동물들은 ‘깨끗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다른 동물 서식처의 경계를 넘나드는 동물들과 이동의 형태가 다양한 동물들은 섭취해서는 안 되는 ‘불결한’ 것으로 분류된다. 이를테면 뱀은 땅이나 물속에서 미끄러지듯 기어다니기 때문에 깨끗한 것으로 분류될 수 없다. ‘깨끗한’ 것은 논리적 질서 또는 분류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고, ‘불결한’ 것은 질서를 벗어나는 것, 혼합과 무질서에 연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결한 것과 깨끗한 것의 분류가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정의되기는 하지만,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의 구분은 비교적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더글라스는 육체의 주변부에 내재하는 위험이 각 문화마다 상대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육체의 주변부는 모든 문화에서 체계의 외연(外緣)을 이루는 경계로 작용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더글라스의 고찰이 ‘개인의 통합’과 ‘분리’의 구조로 ‘레위기’에 묘사된 혐오감의 논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본다.

크리스테바는 특히 경계를 가로지르는 동물을 불순하게 여긴다는 사실이, 경계의 침범에 대한 사회적 공포를 반영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심리적 불안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배설물에 관련된 개인적인 혐오감과 사회적 금기들은 경계와 영역을 가로지르는 것에 대한 심리적·사회적 공포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똥·침·정액 등 몸에 흐르는 유동체이자 배설물은 유한성에 대한 주체의 공포감을 일으키는 육체적 부산물의 좋은 예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이 물질적인 유기체임을 인정하기 어려운 주체에게 자신이 물질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은 죽음의 필연성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똥은 몸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를 만들면서 줄곧 불결한 것과 깨끗한 것의 대립을 나타낸다. 몸의 내부에 있을 때는 존재의 조건이지만, 일단 외부로 배설되면 불결한 것과 오물을 상징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각각의 주체는 배설물의 상징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배설물은 단지 주체 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하게 외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없다. 피고름으로 엉겨 붙은 상처, 땀이나 썩은 것에서 풍기는 달콤하고도 자극적인 부패의 냄새들이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고름과 오물과 배설물들은 주체가 힘겹게 죽음을 떠받치고 삶을 유지해 나가도록 하는 삶의 조건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몸을 가로지르는 오물과 배설물은 주체의 삶의 조건이기도 한 경계를 표상한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배설물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주체의 몸이 경계 저 너머로 완전히 나가떨어져 시체가 될 때가지 배출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배설물에 대한 애브젝션의 극단적인 형태로서 죽은 시체를 직면하는 것을 좋은 예로 든다. 시체는 주체의 필연적인 미래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를 나타내면서 죽음의 영역을 삶의 중심으로 옮겨놓기 때문에 시체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시체가 자아를 외부로부터 위협한다면, 여성의 생리혈은 자아를 내부에서 공격한다고 밝힌다. 생리혈은 사회적 금기의 결과 개인적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본질적인 애브젝트이다. 여기서 크리스테바는 더글라스와 같은 인류학자들의 사회·문화적 고찰을 정신분석 관점에서 해석하여 모성의 위상에 대한 논의로 발전시킨다. 말하자면 생리혈은 여성과 남성 간의 구별이 아니라 남성과 어머니 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생리혈은 생명의 요소를 지닌 것으로 여성에게는 다산성과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휘는 현실에서 이러한 생산적이고 매혹적인 측면보다는 심리적 공포를 조장하는 혐오감을 지닌 것으로 더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생리혈에 대한 공포는 어머니와 태아의 연결, 즉 각각의 존재로 분리되지 않고 그렇다고 동일하지도 않은 두 존재의 연결을 거부하고자 하는 반응이다. 크리스테바는 ‘레위기’에서 여인의 분만과 분만에 따른 피를 ‘부정’(不淨)한 것으로 묘사하는 것에 주목하면서, 남아의 할례의식은 모성의 불결함과 오염으로부터 분리되고자 하는 의식이라고 지적한다. 할례의식은 다산성을 보유한 풍요로운 어머니의 ‘몸’이 모성적인 세속적 권력을 이루어 상징체계의 질서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데 대한 가부장적 권위의 불안감과 강박증을 드러낸다.

크리스테바의 말을 빌리면 이처럼 더럽혀진 어머니의 몸을 상기하고 그것과의 분리를 꾀함으로써 여성과 남성, 즉 개개인이 ‘깨끗하고 적합한’ 사회조직의 토대를 만들면서 점차로 법과 도덕에 종속되어가는 ‘말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를 창조하는 공간


생리혈을 배출하고 출산의 경험을 지닌 어머니의 몸이 오염된 육체를 표상한다면, 어머니 몸의 내부 역시 불순물로 가득 찬 곳이다. 어머니의 몸과 출산은 어머니 몸 내부의 물질들이 그 안의 육체를 분리시키는 난폭한 밀어내기라는 이미지를 통해 상기된다. 혐오감을 주는 어머니의 몸은 더 이상 영양을 공급하지 않는 태반으로부터 태어난 육체가 갖게 되는 환상이라고 크리스테바는 강조한다. 이제 어머니의 몸은 오염된 것이므로 아이는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와의 최초의 동일시를 참을 수 없게 되며, 따라서 어머니의 몸을 밀쳐내고자 시도한다. 자율적인 인간주체가 되기 위해서 아이는 어머니를 거부함으로써 어머니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지만, 어머니와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때 아이는 어머니를 애브젝트로 만들어놓음으로써―더욱 정확히는 애브젝트로 여기도록 교육됨으로써―분리를 용이하게 만든다.

주체가 되기 위해서 상징계의 경계선상에 있는 어머니의 몸은 반드시 애브젝트가 되어야만 한다. 이처럼 모성을 애브젝트화하며 위협으로 간주하게 된 것은 상징계에 의해서 금지되었던 것, 또는 상징질서로 들어가기 위해서 배제시켜야 하는 것으로서의 모성설정에서 유래된 것이다.

프로이트 이론이 주장하듯 근친상간에 반대하는 오이디푸스적 금지이건, 라캉이 해석하듯이 어머니의 욕망 또는 주이상스(jouissance)에 대한 금지이건, 크리스테바에게 사회를 구성하는 금지는 결국 어머니의 몸에 대한 금지이다. 어머니의 몸은 출입금지구역을 의미한다.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배설물을 배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브젝트도 건전한 사회를 위해 추방되어야 한다.

크리스테바는 주체에게 어머니의 몸은 공포의 ‘대상’이라고 강조한다. 경계가 불분명한 어머니의 몸은 주체가 출생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분리 불가능성을 상징하며, 이때 아이는 어머니의 몸이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공포감을 가져다주는 육체’라는 환상을 갖게 된다. 주체는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의 몸을 증오한다. 안과 밖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아이와 어머니의 분리가 모호한 어머니의 몸은 아이에게 분노와 두려움을 자극하는 육체를 암시한다.

정신분석 담론에서 일반적으로 묘사하는 모성은 결코 자애롭고 온화한 어머니의 이미지가 아니다. 오히려 주체가 상징질서에 진입하기 위해서 반드시 버려야 하는 더럽고 혐오스러운 몸이며 주체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무서운 몸이다.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적 페미니즘 이론은 경계선상에 있는 전오이디프스적 어머니가 상징질서를 균열시키면서 주체의 안정성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무한한 사랑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모성의 신비화나 어머니와 아이의 낭만적인 전오이디푸스적 관계는 크리스테바의 모성 담론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크리스테바가 그려내는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는 주체의 무의식 안에서 공포를 일으키는 고딕 어머니이다.

따라서 그녀의 모성 담론은 전오이디푸스 단계에서 강조되는 어머니와 아이의 공생적인 의존(symbiotic dependence)에 대한 신비화나 이상화에 감추어진 허구성을 폭로한다. 상징계의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경계선에 모호하게 놓인 어머니의 몸은 상징계의 분리영역을 가로지르는 공포의 몸이다. 어머니의 몸이 가부장적 상징질서에 공포감을 일으키는 것은 단일성을 추구하는 상징계의 분리논리로는 통제 불가능한 저항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징질서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애브젝트 모성은 부정하고 오염된 몸으로 단일성을 위협하는 ‘이질성’(heterogeneity)을 암시한다.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의 몸이 표상하는 이질성은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 담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크리스테바는 재현될 수 없는 것이나 무의식, 의미영역 밖에 있는 것들이 어떻게 문화 안에서 재현되는가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프로이트와 라캉에게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의 몸은 상징계의 단일성 논리에서 배제된 몸으로서 의미의 영역 밖에 존재한다. 그러나 크리스테바의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는 상징계 영역을 가로지르며, 단일성과 유사성을 거부하고 상징질서를 교란시키는 이질적인 몸이다.

《공포의 힘들》을 비롯하여, 이후에 발표된 《검은 태양》과 《사랑의 이야기》에서도 크리스테바는 어머니의 몸이 상징질서를 교란하기는 하지만 결코 의미영역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의미를 창조하는 공간임을 강조한다. 주체의 무의식 속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어머니의 몸이 예술작품 안에서 재현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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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7 10:52 2007/04/0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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