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프리즘] 한국문학에 나타난 동성애
병리성 혹은 낭만적 이상화의 클리세
김은하 _ 중앙대 강사 / 문예창작  

기괴한 남색가로든, 속 깊고 다정한 동성친구로든 간에 한국문학(문화)에 동성애자나 동성애가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적어도 해방 이후부터 1990년대 이전까지 게이·레즈비언들은 문학 동네에서 유령으로도 떠돌지 못한 채 ‘부재’했다. 물론 그들은 드물게 서사의 장으로 불려나오기도 했지만, 늘 병리성의 상징이거나 인간의 추악한 심연의 대리표상이었을 뿐이다.

이상화된 동성애자와 가부장제의 회한


최근 영화 <왕의 남자>(이준익, 2005)나 <브로크백 마운틴 Brokeback Mountain>(이안, 2005)의 대중적 성공이 가히 ‘어메이징’한 변화로 여겨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영화들은 동성애자가 주인공이고 동성애가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상’ 가족과 이성애자를 불러 모으고 심지어 가슴 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맑은 눈물을 흘리게 했다.

이는 분명 동성애를 ‘구역질나는 비역질’이나 유년기의 성적 트라우마와 연관짓던 관행, 즉 동성애자에 대한 이성애자의 폭력적인 상상력과는 다르다. 특히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부정적인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이상적인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악의에 찬 재현과 구분되는 이상화된 이미지가 등장한 것이다.

두 작품은 잘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촌스러운 인상을 남기는데, 무엇보다 거기에는 낭만적 사랑의 신화가 훼손되지 않은 채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게이 주인공들은 사랑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연인의 죽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자신도 이미 죽어버렸음을 감지한다. 우리 시대에 사랑의 탈낭만화가 가속화되고 있음을 고려해 본다면 관객들이 흘린 눈물은 되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회한이자, 희미한 옛사랑에 대한 애도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영화들은 게임으로서의 연애와 섹스가 넘쳐나는 시대의 얄팍한 표면을 비추고 과거로의 퇴행과 향수의 욕망을 자극한다. 물론 이 눈물은 들춰봐도 그러한 사랑의 기억을 찾을 수 없는 허전함일 수도 있다. 과거란 실상 적당히 조작된 것이고, 향수는 무지와 은폐에서 비롯되는 속성이 있지 않은가? 어쨌든, 이 작품들의 배경은 상당히 고전적인데, 그곳은 역사책 속의 한 페이지 같은 조선이거나, 로데오 경기가 펼쳐지고 굵다란 시가를 문 ‘싸나이’들이 있는 옛날의 서부다.

이렇듯 고전적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숭고한 사랑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뚜렷하게 부각시키며 이성애 제도를 재생산한다. <왕의 남자>의 공길은 예쁘고 감성적이며, 늘 위기에 처해 남성들의 구출 환타지를 완성시켜주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여성이다. 장생은 비록 천한 광대지만 강인한 육체와 지력 그리고 연인에 대한 순도 높은 열정을 갖춘 신사의 전형이다.

다른 한편으로 <브로크백 마운틴>은 남성들의, 여성적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을 보여준다. ‘조잘대는’ 아내들이 주도하는 부부 모임에서 남자들이 주고받는 거의 유일한 대화는 집을 벗어나 낚시를 가고 싶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우회적으로 남성을 밥벌이꾼으로 추락시킨 산업화에 대한 염증, 양육을 비롯한 급증하는 가정적 의무, 남성의 공적 지위를 위협해오는 여성들의 약진 등 거세 위협에 직면한 현대 남성들의 고뇌와 공포를 표현한다.

이렇듯 이 두 편의 영화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이성애적 제도에 대한 퀴어적 냉소의 참신함보다는 이성애 문화에 대한 향수와 여자들의 시대에 대한 환멸 때문은 아니었을까? 영화는 동성애자라는 미지의 캐릭터를 통해 남자다운 남자와 여자다운 여자가 있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 혹은 회한을 드러낸다.

이성애제도는 기괴한 드래그 퀸(drag queen:여성복장을 즐기는 남성)의 퀴어 공동체가 아니라 꽃보다 예쁘거나 터프한 게이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를 통해 차이의 목소리가 드높아진 시대와 손해 보지 않을 타협을 했다. 그러한 타협과 양보(?)는 미덕인가? 동성애/동성애자를 이상화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은폐하는 일이다.

최근 영화나 소설은 동성 관계에 대한 낭만적 환타지를 엿보인다. 예를 들어 동성애 영화는 아니지만 자매애적 연대를 그리고 있는 <싱글즈>에서 돈 없고 혼기 찬 처녀들이 비록 고물차를 탔지만 전도양양한 왕자를 버리고 동성 친구를 선택하거나, 미혼모가 되기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은 조금도 지난하지 않다. 이들이 이성애 제도에도 흔들리지 않은 우정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서른이어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모든 것을 소비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동성애 역시 스펙터클한 상품일 수 있다. 동성애 영화에 대한 열광이 반드시 성소수자로서의 이들의 인권에 대한 윤리적 의식을 고양시키거나, 가부장적 이성애 제도에 대한 반성으로 귀결되지는 않는 것이다.


거세공포의 문학과 ‘열정’의 시기 그리고 동성애


앞서도 말했지만,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의 소설에서 동성애자 찾기란 ‘윌리를 찾기’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필자는 이른바 제도권 밖의 게이, 레즈비언 문학에 대한 별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 글은 문학이라는 제도가 인준해 준 작품들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편협하다. 참고로, 동성애/동성애자가 언급되는 정도도 있지만 꽤 비중 있게 그려진 작품 중 필자가 이 글에서 거론하지 않은 작품을 밝혀둔다. <나는 너무 멀리왔을까>(강석경), <마짠 방향으로>(배수아), 《내가 사랑한 캔디》(백민석), 《그녀의 여자》(서영은), <송어와 은어>(송경아), 《꽃을 던지고 싶다》(이명랑), <남자의 기원>, <다섯 번째 질서와 여섯 번째 질서 사이에 세워진 목조마네킹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전경린), <푸른 수염의 세 번째 아내>(하성란)).

한국 현대소설은 일제 식민지, 미군정기, 분단, 반(半)식민 근대화, 전체주의적 근대화를 겪으며 일정한 서사적 관습을 형성하는데, 이때 한국 소설이 발견해 낸 문제적 인물은 오욕에 찬 역사로 인해 주체성이 훼손당하고, 이를 복구하고자 하는 남자였다. 그는 어머니나 누이가 이국 병사에게 겁탈당한 기억 때문에 수치스러워 하거나, 미군의 원조 덕분에 이룩한 산업화의 부정성을 고뇌하며, 분단과 이후 전체주의적 근대화 과정에서 사상의 자유를 억눌린 남자였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개발과 독재의 정치와 격렬하게 투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수치스러운 식민의 기억을 지워버릴 만한 민족 국가에 대한 국가의 열망을 내면화하며 가부장권을 강화하거나 좀더 남자다워져야 할 필요가 있는 남성들이었다. 

국가에 협력하든 저항하든 남성다움은 이들의 열망의 대상이었다. 한국 현대문학은 보수와 진보, 자유와 실천의 대립구도가 무색하리만큼 여성·섹슈얼리티·무의식·자연·사적 영역 등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문학은 이성애적 제도 위에 스스로를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재생산해 냈다. 특히 근대적 민족 국가 건설을 향한 집단적 소망은 섹슈얼리티를 엄격한 규제 대상으로 만들었다. 《별들의 고향》(최인호, 1972)의 문호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섹스와 소비를 상징하는 경아가 죽어야만 했다. 문호의 입사식(入社式)은 자신이 근대적 생산에 협력하지 않고 섹스에 탐닉했다는 반성과 함께 이루어진다.

또한 <壯士의 꿈>(황석영, 1974)에서 산업화와 욕망의 부정성을 상징하는 ‘따루마 감독’은 “알록달록한 홈스펀 저고리” “빨간 구두” “희고 보드라운 살결” 긴 머리의, “불알이 없는” 남자로 묘사된다. 이 작품은 도시(산업화)의 부정성을 거구의 장사인 일봉이 도시로 와 포르노 배우와 남창을 전전하다 급기야 성기능 상실자가 되는 과정을 통해 비판한다.

소설은 그가 귀향을 서두르면서 순간적으로 성적 기능을 회복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데, 이러한 성적 비유들은 한국현대문학의 근저에 거세 콤플렉스가 자리잡고 있음을 암시한다. 남성성은 이성애제도의 산물이자 그것을 보완하는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문학은 매우 가부장적이다. 이는 문학 작품 속의 여성의 주변화나 동성애자의 부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국문학이 다양한 차이들에 주목하지 못했다는 점은 여성 캐릭터는 ‘창녀’ 아니면 어머니 밖에 없고, 동성애자는 전무한 데서 증명된다. 

그러나 한국문학사에는 동성애자가 반드시 병리성의 징후이지 않은 때도 있었다. 이광수의 초기 소설 <윤광호>(《춘추》 1918년 4월)는 동경 K대학 경제과 학생인 윤광호가 동성의 P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거부당하고 자살하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또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장편 소설인 《무정》(이광수, 1917년)에는 기생 영채와 그녀가 형님처럼 따르는 명기 월화가 육욕에만 눈 먼 호색한들에 대한 혐오와 원치 않는 삶을 사는 데서 오는 슬픔으로 서로를 끌어안는 장면이 버젓이 등장한다.

이들의 성애는 암시적이기보다는 제법 노골적이다. 그러나 서술자는 윤광호나, 스스럼없이 서로의 육체를 어루만지는 여성들을 향해 비난의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이들이 눈 뜬 관능은 오히려 사람다운 자각으로 조명된다. 사춘기에 접어든 윤광호가 어느 날 발견한 것은 자기 속의 “크고 깊은 공동(空洞)”(289면)으로 비유된 깊은 고독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열정으로서의 사랑이다. 열정을 가진 개인의 발견은 근대의 부르주아지가 형식과 의무에 매인 삶을 산 봉건적 세대와 스스로를 구별 짓는 지점이었다.

최정희의 《녹색의 문》은 비록 발간된 시기는 1953년이지만, 식민지 근대화기를 소설의 배경으로 취하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여성 간의 제법 진한 성애 장면이 등장한다.  개인의 열정은 공적이거나 이타적인 욕망으로 전환되지 못해 비판받기는 해도, 소설 속 인물들은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했다고 반성하지는 않는다.

언론은 1931년 명문가의 딸인 홍과 부호의 며느리인 김이 동반 철도자살을 하자 이를 “과도기에 처해 잇는 조선 여성 중의 애매한 타입을 가지고 엄벙하니 떠도는 여성 중의 한 사람의 파국”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기혼녀인 김의 자살이 부모에 의한 강제 결혼 생활에서 기인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백면아의 이 글은 이들의 죽음에서 봉건적 조선의 폐해를 통찰해내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동성애 관계로 적극적으로 읽어내지 않는다. 이는 동성애를 이성애제도에 대한 갈등과 전복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당시는 식민지 시기 최초로 근대적 여학교가 세워지고 여학생들이 가족을 벗어나 동성과의 관계라는 최초의 사교관계를 경험하면서 여학생 동성애가 문젯거리로 등장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당대의 담론들은 여성 동성 관계가 여성들의 이성애적 탈선을 막아줄 것이며, 얼마 되지 않아 없어질 일시적 풍조라고 해석한다. 동성애에 대한 관대한 시선은 이성애 제도가 그만큼 강고했음을 의미한다. 어쨌든 저 혼란스럽고 전복적이며 열정적인 시대를 거쳐 해방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동성애자는 실종되어 버린다. 식민지 근대화를 주도한, 스스로를 봉건적 아비와 구별 짓고자 한 오빠의 시대가 가고, 국가 재건과 근대화라는 총력전에 앞장 선 아버지들의 시대가 온 것이다. 오빠와 아버지의 거리가 그리 먼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페미니즘의 레즈비어니즘 끌어안기


동성애가 문학 작품을 통해 적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이후 여성 작가들에 의해서였다. 90년대 문학은 문학사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 주목해 볼 때 매우 이질적인 시대라 할 만하다. 이 시기의 문학의 주류를 형성한 이들은 30대의 여성 작가였고, 성·사랑·가족은 이들의 주된 서사의 장이었다.

이는 이전 시기 문학을 주도한 남성 작가들이 주목해 온 전쟁·분단·노동·이념·변혁·산업화·전통 붕괴·농촌 해체 등과 같은 비교적 큰 이야기와는 다른 것이었다. 여성 작가들은 동성애/동성애자라는 제재를 전략적으로 활용해 가부장제의 억압성을 환기하거나 그것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다.

페미니스트 문학은 가부장제에 의해 훼손된 여여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여성적 주체성을 되찾기 위한 시도로서 레즈비어니즘을 수용했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의 존재는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결정된다. 이를 테면 여성들은 거주, 가사, 경제적 조건, 사회적 지위 등의 장치를 통해 아버지나 남편과 유착 관계를 맺고 모든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지위를 구비한 남성들로부터 물질적 보호를 받기 위해 그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타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창조성의 상실은 여성되기의 절차이며 무력함은 여성적 미덕으로 미화된다. ‘아버지의 법’을 수행하는 정상적인 여성이 되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연대와 상호이해보다는 서로에 대한 적대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녀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자매이다. 또한 서로 한 몸으로 살았던 시절을 잊고 서로를 수치스러워 하며 유기하는 어머니와 딸이다. 

레즈비어니즘은 단지 동성 간의 육체의 교류가 아닌 서로를 동반자로 받아들임으로써 남성의 피보호자-타자라는 여성의 무력한 위치를 벗어나는 계기로 조명된다. <하나코는 없다>(최윤, 1994년)는 삶의 심연 앞에 직면한 남성들이 어떻게 여성을 타자화함으로써 그 위기를 피해 가는지 보여준다. 이니셜로 표기된 동창생들은 자신들의 이너서클이 지루해졌을 때, 사귀던 여자와의 심리전에 지쳤을 때, 삶의 무의미성에 직면 할 때 ‘하나코’를 불러낸다.

그들 각자는 그녀에게 구애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기도 하지만 서클의 결속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그녀를 각각 한 발짝만큼의 거리를 둔 채 공유한다. 그들은 동창이면서 동시에 사업적 파트너이기도 하다. 하나코는 지나치게 똑똑하지 않으면서도 지혜롭고, 대단한 미인은 아니지만 매력이 있으며, 친구이면서 연인 같아서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되는, 남자에게 아무 것도 청구할 권리가 없는 첩이다. 하나코라는 별칭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훼손되는 여성의 주체성을 암시한다. 소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디자이너로 성공한 하나코의 곁에 사업적 파트너이자 동반자인 동성 친구가 있음을 밝힘으로써 레즈비어니즘을 페미니즘과 결합시킨다.    

이렇듯 <하나코는 없다>가 레즈비어니즘을 여성 간의 육체적 접촉으로만 규정하는 포르노적 시선을 차단하며 여성들을 서로의 감정과 내면생활을 공유하는 동반자로 제시하는 데 비해 근친상간 못지않은 금기인 동성의 육체를 끌어안는 위반을 범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여성들의 에로틱한 성적 행위는 모성의 몸으로 규정당하면서 억눌린 여성의 성적 욕망을 되찾고 거울과 저울 사이에서 사물화된 여성의 몸을 자유롭게 하는 제의가 된다.

<밤의 수영장>(강영숙, 2002년)에서 한때 수영선수였던 여자는 지금은 비대한 육체를 향한 타인의 경멸적 시선 탓에 손님이 빠져 나간 수영장에서 코르셋에 갇힌 몸을 풀어놓는 수영장 직원이다. 여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때는 인어같이 날렵했지만 지금은 빈곤과 양육 노동에 짓눌린 뚱뚱한 여자를 만나 서로의 육체를 끌어안음으로써 “오랜 세월 짓눌린 살들”을 물 밖의 세상에 부드럽게 풀어놓는다.

<세번째 유방>(천운영, 2004년)은 세 번째 유방을 가진 여성들의 동성애를 통해 여성의 몸의 주권을 탈환하려는 판타스틱한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여성의 유방은 아기·연인·법원·의학·포르노 작가·예술가·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해 그 의미가 확정되어왔다. 그것은 아기에게 생명을 주는 좋은 것으로 칭송받는 동시에 유혹의 미끼로 비난받는다. 남성 사회가 소유할 수 없는 여성의 주체성을 상징하는 세 번째 유방과 서로의 육체를 매개로 자신의 육체를 나르시스틱하게 향유하는 여성동성애자들의 섹슈얼리티는 여자의 유방을 소유함으로써 수컷다움을 회복하려는 남성의 기획에 부딪힌다. 비록 여자는 남자의 칼에 찔려 죽지만, 남성이 끝내 차지하지 못한 세 번째 유방과 여성동성애는 남성지배가 관철되는 몸을 여성주체성을 재구축하는 장소로 재전유한다.

<무궁화>(정이현, 2003년) 역시 여성의 성기와, 국가를 상징하는 무궁화를 병치시킴으로써 개인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특히 동성애/레즈비언의 서로를 향한 욕망을 질시함으로써 처벌해온 가부장적 국가에 대한 반격을 시도한다. 주인공은 기혼녀인 연인이 끝내 사회적 시선의 폭력이 두려워 떠나버리자 동성의 사랑을 허용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도발을 감행하듯 자신의 성기를 카메라 렌즈에 담아 사랑하는 너의 사진 옆에 붙여둔다.   


지배적 관습에 대한 반란


페미니스트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차용된 레즈비어니즘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데 비해 스토리의 작위성과 관념성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플라스틱 섹스>, <여자가 여자일 때-플라스틱 섹스 Ⅱ>, <어두운 열정―플라스틱 섹스 Ⅲ>(이남희, 1997년)는 성·사랑·가족 등 미시적 영역의 변화를 발빠르게 읽어내면서 새로운 시대의 전망을 찾으려는 열망이 진지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작품은 페미니스트의 계몽적 의도가 앞설 때 그것이 역설적으로 레즈비어니즘을 신비화하는 우를 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초록이 자신들의 사랑을 부인하는 은명에게 분노해 그녀의 소설이 담긴 노트북을 가지고 달아나자, 은명이 초록이를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몸과 정신의 괴리를 엿보고, 이를 화해시키려는 관념적 사색으로 채워져 있다. 사실 이 작품은, 몸은 이미 개종되었지만 머리가 몸의 해방을 가로막는 족쇄이기는커녕, 머리는 이미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정치적으로 올바른 대안으로 선택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는 80년 세대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은명의, 신세대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90년 이후 성정치 운동의 포문을 연 신세대 레즈비언을 향한 호기심과 이에 대한 지적 성찰은 전망이 사라진 시대 앞에 선 80년 세대의 절망과 고뇌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문제는 성급하게 레즈비어니즘이 대안으로 호출되면서 페미니스트의 마술지팡이로 수단화된다는 것이다. 이십대의 레즈인 초록이는 은명의 젊음에 대한 선망과 뒤섞여 지독히 매력적이고 개성적인 인물로 진술된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한 여성들의 애절한 회고에도 불구하고  독자 스스로가 그것을 판단하고 동의할만한 객관적 근거는 허약하기만 하다. 집 나와 뚜렷한 직업 없이 세상을 떠도는 어린 레즈비언이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조금만 더 나이 들면 쓸쓸히 동사할 수 있다는 공포로 영혼을 잠식당할지도 모른다. 동성애자를 질시하는 것만큼이나 대안적 삶을 요구하는 것 역시 혹독한 강요일 수 있다.

위에서 거론한 <무궁화> <밤의 수영장> <세번째 유방> 역시 작위성을 면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선명히 드러나는 이론적 구도, 다소 생뚱맞거나 뻔한 결말, 정치적으로는 올바르지만 정서적 울림을 주지 못하는 등의 한계가 엿보이는 것이다. 동성애자의 경험과 감수성을 의도적으로 내세운다고 해서 이성애 제도에 기반한 관습적 상상력에 균열이 일어나리라고 보장할 수도 없다. 본격적인 동성애 소설이 더 짙은 작위성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성소수자나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의식은 덜 두드러진다 할지라도, 이성애 제도의 관습적 상상력과 충돌하는 동성애/동성애자 캐릭터나 그들의 경험은 남성성/여성성의 젠더 도식에 혼선을 가져와 가부장 제도를 잠식할 수 있다.

오정희의 <완구점 여인>(1968년)은 소녀가, 휠체어 여인과의 동성애적 관계를 통해 성에 대한 관능과 혐오, 죽은 동생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깨어진 가족을 대한 애절한 상실감을 경험하며 세계와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자각해 내는 과정을 담아낸다. 도벽에 시달리고 청결한 학교 복도에 뻣뻣이 선 채 오줌을 누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 소녀의 성장 담화는 관습적인 소녀의 성장담과 충돌하며, 여성되기의 통과의례를 겪는 사춘기 소녀의 지난한 성장통을 여실히 보여준다.

소녀의 계모에 대한 혐오의 시선이 연민의 감정과 복잡하게 뒤섞이는 과정은 여성의 정체성이 모성으로만 규정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走者>(주자, 1969년)는 비록 성소수자로서의 확고한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지만 동성 연인의 자살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편으로 자신의 게이 정체성을 부인하는 남성의 갈등을 통해 역설적으로 성소수자들의 허약한 관계와 불안한 내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인간 주체를 섹슈얼리티를 통해 낙인 찍고 인격화하는 이성애제도로부터 탈주하듯 질주하는 남자에게서 사회적 타자들이 겪는 소외와 억압을 읽을 수 있다.

<절규>(윤이형,문학사상 4월호) 역시 가족과 세상이 받아들여주지 않는 사랑을 하는 레즈비언과 가부장적 아버지와 가족으로부터 상처 입은 이성애자 여성의 소외를 절규의 모티프 위에 겹쳐 놓음으로써 사회적 타자들의 연대와 공감의 상상력을 확대해 나간다. 이는 동성애 모티프가 이성애 문화에 기반한 한국문학의 외연을 확장하고 내연을 새롭게 하는 해체의 일환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성애, 이성관계에 대해 이미 쓰라린 실망을 맛 본 우리 시대는 동성애나 동성 관계에 대한 판타지를 부여함으로써 또 다시 그들을 타자화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렇듯 우리 시대에 동성애가 소환되는 방식은 실상 그다지 새로운 것도 아니다. 과도한 단순화일 수 있지만, 한때 정치적 세대들은 역사와 자기 세대들에 대한 환멸을 페미니즘이나 에콜로지 같은 새로운 요술램프에 기대어 극복하고자 했다. 문제는 전망에 대한 강박적이거나 야단스러운 기대는 결국 조만간에 또 다른 환멸과 혐오로 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한국문학의 관습이 동성애라는 하위담론과 만나 어떻게 소통하고 변신을 모색할 지를 신중하게 지켜 볼 일이다.


Copyright 월간 넥스트 All right reserved. 2006년 06월

2007/04/07 10:56 2007/04/0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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