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새로운 이론과 사상]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 이론 |
분리의 경계선 가로지르는 어머니 몸 |
박주영 _ 순천향대 교수 / 영문학 |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현대 사상과 이론을 매우 다양하게 섭렵하여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을 전개한다. 크리스테바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이론, 러시아 형식주의와 바흐친의 대화 이론을 심도 있게 연구했으며, 롤랑 바르트(구조주의)·루시앙 골드만(문학이론)·레비-스트로스(사회 문화 인류학)·자크 라캉(정신분석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다양한 사상적 영향 속에서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 이론이 갖는 특징은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조명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이 가부장적인 관점에 토대를 두고 있다면,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정신분석의 기본틀을 수용하면서 모성의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대 어머니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은 전(前)오이디푸스적 어머니와 가부장적 상징계의 아버지, 그리고 아이가 이루는 삼각구조를 토대로 한다. 전통적인 정신분석 담론이 그려내는 아버지는 엄격한 이미지를 지니며 법의 세계를 상징하고, 상대적으로 어머니는 수동적이고 침묵하는 이미지 안에서 몸을 표상한다. 프로이트와 라캉에 따르면 전오이디프스적 어머니는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분리해야 하는 존재이며, 아이는 전오이디프스적 어머니와의 분리 이후 아버지의 상징질서에 진입하여 주체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문명을 공격적인 욕구충동(drive)의 억압으로 규정하는데, 이때 욕구충동이란 아이가 어머니의 몸과 맺은 전오이디푸스적 관계에 내재하는 본능적인 충동을 의미한다. 아이가 문명화되는 과정은 초자아를 형성하여 사회적 주체가 되는 것으로, 이때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볼 때 아이는 아버지의 중재를 통해서만 어머니의 몸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상징적인 법을 대변하는 아버지는 아이가 어머니와 분리되지 않는다면 거세하겠다는 위협을 가한다. 남아는 이러한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어머니와의 최초의 동일시를 포기하고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억압한다. 한편 여아는 이미 거세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거세 위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이는 여아가 남아와 달리 초자아를 충분히 발달시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 여아는 페니스를 소유하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페니스를 소유한 아버지에 대한 선망을 통해서 주체성을 획득하고자 하지만, 여성은 아버지의 거세 위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한 의미에서의 주체성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성차에 따른 주체에 관한 기본적인 해석이다. 프로이트가 생물학적 차이에 기초하여 성차에 따른 주체를 해석하는 반면, 라캉은 생물학적 차이를 강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라캉 역시 주체가 상징질서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점에 초점을 둔다. 라캉은 어머니를 생물학적 욕구(need)의 영역에 한정시켜 놓고, 아이가 언어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 거부되어야 하는 존재로 어머니를 설정한다. 라캉에 따르면 아이에게 어머니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존재이다. 그러나 점차로 아이가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결핍(lack)을 경험하게 될 때 어머니의 존재는 명확해진다. 거세(결핍)의 위협―라캉은 프로이트의 거세의 위협을 욕구충족의 결핍으로 전환시켜 설명한다―속에서 아이는 결핍을 요구(demand), 즉 언어로 대체한다. 궁극적으로 아이의 욕구는 요구하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충족되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욕구에 언어가 개입하게 됨에 따라 ‘욕구’와 ‘욕구를 표현하는 요구’ 사이에는 간극이 발생한다. 따라서 언어의 획득과 함께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이 원하는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 욕구와 요구 사이의 이러한 괴리를 라캉은 ‘욕망’(desire)이라고 명명한다. 욕망은 완전히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아이는 아버지의 위협과 금지를 통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세계로 들어선다. 어머니의 몸은 아이에게서 멀어져 심연으로 떨어지고 그 자리에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상징계가 들어선다. 아이가 언어를 획득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몸과 분리된다는 것을 뜻한다.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 이론은 침묵하는 어머니를 복원하여 모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크리스테바의 주된 관심은 프로이트와 라캉이 간과한 어머니의 위상과 의미, 다시 말해 주체가 상징질서에 진입하기 이전의 어머니의 몸과 이후의 어머니의 몸에 관한 논의에 놓여 있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에서 어머니의 몸은 주체가 분리를 체험하는 근원적인 공간이다. 하지만 크리스테바가 역설하는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의 몸은 상징계에 진입한 후 사라지거나 상징계 밖에 존재하는 몸이 아니다.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의 몸은 주체와 분리된 후에도 주체의 무의식 속에 흔적으로 남아, 상징계 질서가 수립한 ‘분리의 경계선’에 침범하여 그 선을 순간적으로 와해시키는 전복적인 힘으로 남아 있다. 다시 말해 크리스테바의 이론에서 어머니의 몸은 전오이디푸스적 영역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상징계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상징질서를 위협하는 공포의 힘으로 존재한다. ‘입과 항문과 성기’를 넘어서기 《공포의 힘들 : 애브젝션에 관한 에세이》에서 크리스테바는 억압된 어머니의 몸이 결코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채 주체가 상징계에 진입한 후에도 상징계를 분열시키는 파괴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크리스테바는 ‘애브젝트’(abject)와 ‘애브젝션’(abjection)이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통해 적합한 주체와 주체성이 형성되기 위해 어떻게 부적합하고 더럽고 무질서한 것들이 배제되어 왔는가를 분석한다. 애브젝트가 더럽고 천하며 역겨운 대상을 의미한다면, 애브젝션은 애브젝트에 대한 주체의 반응을 의미한다. 보통 우리가 역겹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는 오줌·똥·토사물·침·신체의 털 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청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보거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을 찡그리고 눈살을 찌푸리거나 토할 것 같은 메스꺼운 느낌을 주는 대상들이다. 애브젝트가 더럽고 역겨운 대상이라면, 애브젝션은 주체가 그 대상에 대해 갖는 육체적이면서 상징적인 어떤 느낌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빈번히 애브젝션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식사 중에 누군가 배설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갑자기 식욕이 저하되면서 구토증상과 함께 비위가 상하는 경우가 좋은 예이다. 그렇다면 애브젝트와 대면한 주체가 애브젝션을 체험하면서 애브젝트에 저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러움과 청결함의 구분은 문명형성의 기본틀로서,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문명은 불순한 근친상간적 요소들을 추방(expulsion)하는 것에 기초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문명화과정에서 배제된 애브젝트는 원초적 억압의 대상을 상징하며, 따라서 원시와 문명의 경계를 표상한다. 프로이트가 가부장적 상징질서에 주체가 진입하는 것을 문명화과정으로 설명한다면, 라캉은 주체의 상징질서에로의 진입과정을 언어획득과정으로 설명한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가 아버지의 법(역할)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와의 관계에만 머무른다면 심리적·언어적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 프로이트와 라캉 이론의 공통점은 분리의 논리에 입각하여 원시와 문명 또는 어머니의 몸과 아버지의 법에 대한 분명한 경계설정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테바는 명확한 경계를 설정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억압되고 경계에서 제외된 ‘애브젝트’는 결코 완벽하게 제거되지 않고 무의식 속에 계속 남아 있으면서 끊임없이 주체를 위협하며 체제와 정체성을 어지럽히는 전복적인 요소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상징질서가 요구하는 주체와 대상 간의 명확한 경계가 애브젝션에 의해서 흐려지고 모호해지는 것이다. 경계가 흐려진다는 것은 분리를 갈망하지만 동시에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애브젝션을 유발하는 애브젝트는 단순히 청결함이 결여된 것이 아니라 정체성·체제·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소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애브젝트는 그 자체가 애매모호하고 간극에 위치한 경계나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복합적인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애브젝트는 상징계에서 요구하는 적합한 것과 부적합한 것, 질서와 무질서, 청결한 것과 불결한 것의 명확한 구분과 구별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애브젝트는 애매모호하고 안과 밖의 구별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분류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유의 표면에 생성된 얇은 막, 삶을 감염시키는 죽음을 상징하는 시체, 자생적으로 생겨나며 다른 생명체를 흡수해 버리는 감염과 오염 등은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애브젝트의 좋은 예이다. 이 밖에 썩은 고기, 추방되어야 하는 금기나 부정물(不淨物), 법을 위반하는 범죄, 기독교에서 죄라고 부르는 도덕적 위반행위도 애브젝트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애브젝트는 도덕과 윤리의 확고부동함을 뒤흔들고 적합한 것과 부적합한 것의 경계를 허물며 혼돈을 자아내는, 애매모호한 대상 아닌 대상을 암시한다. 또한 애브젝트는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에 대한 관계를 뜻하며, 경계 또는 주변부에서 제외되어 ‘내던져진 대상’(jettisoned object)을 뜻한다. 하지만 내던져진 상태에서도 애브젝트는 상징질서를, 즉 주체와 사회의 정체성을 위협할 수 있으며, 이미 수립된 경계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점에서 애브젝션은 억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배제이자 추방을 뜻한다. 애브젝션이 ‘추방하는 것’ 또는 ‘배제함’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자연을 상징하는 육체의 영역과 당혹·수치·죄책감·욕구 등이 작용하는 사회적·상징적 영역 간의 대립구도를 암시한다. 보편적으로 역겨움에서 나오는 구역질·토사·경련·질식 등은 이성적 사고가 수용할 수 없는 육체적 과정과 영역을 보여준다. 부패한 음식물이나 더러움·찌꺼기·오물에 대한 혐오감이 생길 때 주체가 경험하는 근육의 경련이나 구토증상은 오물이나 시궁창 같은 더러운 것들을 멀리하고 피해갈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보호막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애브젝션은 사회의 규범과 규율에 따라 단일화되고 통제되는 몸의 영역과 감각들을 가로지르는 부산물이다. 애브젝션이 몸 전체를 ‘가로지르는’ 효과를 갖고 있다는 것은 경계를 설정하기 모호하고 경계를 흐린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애브젝션은 심리적이면서 생리적인 것으로, 그 안과 밖을 구별하기 어려운 흡수와 배설의 순환구조에 토대를 둔 아이의 구조화된 육체적 경계이다. 흡수되고 배설된 대상―음식물·오줌·똥·토사물·눈물·침―은 나중에 성감대(입·항문·눈·귀·생식기)로 전화되는 다양한 육체의 영역과 관련을 맺는다. 크리스테바는 애브젝션을 세 가지 형태로 분류한다. 음식물과 관계 있는 구강, 배설물과 연관되는 항문, 그리고 성차(性差)와 관계가 있으며 성욕을 의미하는 생식기가 그것이다. 구강 혐오감은 애브젝션의 가장 고전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는 음식물에 대한 혐오감과 관계가 있는데, 우유 표면에 생긴 얇은 막에 대한 역겨움은 구강 혐오감의 좋은 예이다. 부정(不淨)한 어머니의 몸 크리스테바는 오염된 것과 성스러운 것 사이의 경계형성과 구별짓기를 파악하기 위해서 성서 ‘레위기’에서 묘사하는 혐오감의 논리에 주목한다. 이것은 메리 더글라스(Mary Douglas)가 《순수와 위험》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는데, 크리스테바는 더글라스의 인류학적 고찰을 토대로 구강과 항문 애브젝션이 더러운 음식, 부정한 것에 대한 사회적 금기와 관계 있음을 밝힌다. 더글라스는 ‘레위기’에서 다양한 음식에 연관된 혐오감과 금기는 명백히 분류할 수 없는 동물들에 대한 금지에 기초한다고 설명한다. ‘고유하고 적절한’ 환경에서 자란 동물들만이 깨끗한 음식으로 분류되어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날아다니는 새, 아가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 네 다리로 걷고, 새김질하고,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진 동물들은 ‘깨끗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다른 동물 서식처의 경계를 넘나드는 동물들과 이동의 형태가 다양한 동물들은 섭취해서는 안 되는 ‘불결한’ 것으로 분류된다. 이를테면 뱀은 땅이나 물속에서 미끄러지듯 기어다니기 때문에 깨끗한 것으로 분류될 수 없다. ‘깨끗한’ 것은 논리적 질서 또는 분류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고, ‘불결한’ 것은 질서를 벗어나는 것, 혼합과 무질서에 연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결한 것과 깨끗한 것의 분류가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정의되기는 하지만,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의 구분은 비교적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더글라스는 육체의 주변부에 내재하는 위험이 각 문화마다 상대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육체의 주변부는 모든 문화에서 체계의 외연(外緣)을 이루는 경계로 작용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더글라스의 고찰이 ‘개인의 통합’과 ‘분리’의 구조로 ‘레위기’에 묘사된 혐오감의 논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본다. 크리스테바는 특히 경계를 가로지르는 동물을 불순하게 여긴다는 사실이, 경계의 침범에 대한 사회적 공포를 반영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심리적 불안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배설물에 관련된 개인적인 혐오감과 사회적 금기들은 경계와 영역을 가로지르는 것에 대한 심리적·사회적 공포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똥·침·정액 등 몸에 흐르는 유동체이자 배설물은 유한성에 대한 주체의 공포감을 일으키는 육체적 부산물의 좋은 예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이 물질적인 유기체임을 인정하기 어려운 주체에게 자신이 물질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은 죽음의 필연성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똥은 몸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를 만들면서 줄곧 불결한 것과 깨끗한 것의 대립을 나타낸다. 몸의 내부에 있을 때는 존재의 조건이지만, 일단 외부로 배설되면 불결한 것과 오물을 상징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각각의 주체는 배설물의 상징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배설물은 단지 주체 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하게 외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없다. 피고름으로 엉겨 붙은 상처, 땀이나 썩은 것에서 풍기는 달콤하고도 자극적인 부패의 냄새들이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고름과 오물과 배설물들은 주체가 힘겹게 죽음을 떠받치고 삶을 유지해 나가도록 하는 삶의 조건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몸을 가로지르는 오물과 배설물은 주체의 삶의 조건이기도 한 경계를 표상한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배설물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주체의 몸이 경계 저 너머로 완전히 나가떨어져 시체가 될 때가지 배출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배설물에 대한 애브젝션의 극단적인 형태로서 죽은 시체를 직면하는 것을 좋은 예로 든다. 시체는 주체의 필연적인 미래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를 나타내면서 죽음의 영역을 삶의 중심으로 옮겨놓기 때문에 시체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시체가 자아를 외부로부터 위협한다면, 여성의 생리혈은 자아를 내부에서 공격한다고 밝힌다. 생리혈은 사회적 금기의 결과 개인적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본질적인 애브젝트이다. 여기서 크리스테바는 더글라스와 같은 인류학자들의 사회·문화적 고찰을 정신분석 관점에서 해석하여 모성의 위상에 대한 논의로 발전시킨다. 말하자면 생리혈은 여성과 남성 간의 구별이 아니라 남성과 어머니 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생리혈은 생명의 요소를 지닌 것으로 여성에게는 다산성과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휘는 현실에서 이러한 생산적이고 매혹적인 측면보다는 심리적 공포를 조장하는 혐오감을 지닌 것으로 더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생리혈에 대한 공포는 어머니와 태아의 연결, 즉 각각의 존재로 분리되지 않고 그렇다고 동일하지도 않은 두 존재의 연결을 거부하고자 하는 반응이다. 크리스테바는 ‘레위기’에서 여인의 분만과 분만에 따른 피를 ‘부정’(不淨)한 것으로 묘사하는 것에 주목하면서, 남아의 할례의식은 모성의 불결함과 오염으로부터 분리되고자 하는 의식이라고 지적한다. 할례의식은 다산성을 보유한 풍요로운 어머니의 ‘몸’이 모성적인 세속적 권력을 이루어 상징체계의 질서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데 대한 가부장적 권위의 불안감과 강박증을 드러낸다. 크리스테바의 말을 빌리면 이처럼 더럽혀진 어머니의 몸을 상기하고 그것과의 분리를 꾀함으로써 여성과 남성, 즉 개개인이 ‘깨끗하고 적합한’ 사회조직의 토대를 만들면서 점차로 법과 도덕에 종속되어가는 ‘말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를 창조하는 공간 생리혈을 배출하고 출산의 경험을 지닌 어머니의 몸이 오염된 육체를 표상한다면, 어머니 몸의 내부 역시 불순물로 가득 찬 곳이다. 어머니의 몸과 출산은 어머니 몸 내부의 물질들이 그 안의 육체를 분리시키는 난폭한 밀어내기라는 이미지를 통해 상기된다. 혐오감을 주는 어머니의 몸은 더 이상 영양을 공급하지 않는 태반으로부터 태어난 육체가 갖게 되는 환상이라고 크리스테바는 강조한다. 이제 어머니의 몸은 오염된 것이므로 아이는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와의 최초의 동일시를 참을 수 없게 되며, 따라서 어머니의 몸을 밀쳐내고자 시도한다. 자율적인 인간주체가 되기 위해서 아이는 어머니를 거부함으로써 어머니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지만, 어머니와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때 아이는 어머니를 애브젝트로 만들어놓음으로써―더욱 정확히는 애브젝트로 여기도록 교육됨으로써―분리를 용이하게 만든다. 주체가 되기 위해서 상징계의 경계선상에 있는 어머니의 몸은 반드시 애브젝트가 되어야만 한다. 이처럼 모성을 애브젝트화하며 위협으로 간주하게 된 것은 상징계에 의해서 금지되었던 것, 또는 상징질서로 들어가기 위해서 배제시켜야 하는 것으로서의 모성설정에서 유래된 것이다. 프로이트 이론이 주장하듯 근친상간에 반대하는 오이디푸스적 금지이건, 라캉이 해석하듯이 어머니의 욕망 또는 주이상스(jouissance)에 대한 금지이건, 크리스테바에게 사회를 구성하는 금지는 결국 어머니의 몸에 대한 금지이다. 어머니의 몸은 출입금지구역을 의미한다.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배설물을 배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브젝트도 건전한 사회를 위해 추방되어야 한다. 크리스테바는 주체에게 어머니의 몸은 공포의 ‘대상’이라고 강조한다. 경계가 불분명한 어머니의 몸은 주체가 출생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분리 불가능성을 상징하며, 이때 아이는 어머니의 몸이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공포감을 가져다주는 육체’라는 환상을 갖게 된다. 주체는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의 몸을 증오한다. 안과 밖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아이와 어머니의 분리가 모호한 어머니의 몸은 아이에게 분노와 두려움을 자극하는 육체를 암시한다. 정신분석 담론에서 일반적으로 묘사하는 모성은 결코 자애롭고 온화한 어머니의 이미지가 아니다. 오히려 주체가 상징질서에 진입하기 위해서 반드시 버려야 하는 더럽고 혐오스러운 몸이며 주체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무서운 몸이다.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적 페미니즘 이론은 경계선상에 있는 전오이디프스적 어머니가 상징질서를 균열시키면서 주체의 안정성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무한한 사랑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모성의 신비화나 어머니와 아이의 낭만적인 전오이디푸스적 관계는 크리스테바의 모성 담론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크리스테바가 그려내는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는 주체의 무의식 안에서 공포를 일으키는 고딕 어머니이다. 따라서 그녀의 모성 담론은 전오이디푸스 단계에서 강조되는 어머니와 아이의 공생적인 의존(symbiotic dependence)에 대한 신비화나 이상화에 감추어진 허구성을 폭로한다. 상징계의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경계선에 모호하게 놓인 어머니의 몸은 상징계의 분리영역을 가로지르는 공포의 몸이다. 어머니의 몸이 가부장적 상징질서에 공포감을 일으키는 것은 단일성을 추구하는 상징계의 분리논리로는 통제 불가능한 저항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징질서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애브젝트 모성은 부정하고 오염된 몸으로 단일성을 위협하는 ‘이질성’(heterogeneity)을 암시한다.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의 몸이 표상하는 이질성은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 담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크리스테바는 재현될 수 없는 것이나 무의식, 의미영역 밖에 있는 것들이 어떻게 문화 안에서 재현되는가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프로이트와 라캉에게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의 몸은 상징계의 단일성 논리에서 배제된 몸으로서 의미의 영역 밖에 존재한다. 그러나 크리스테바의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는 상징계 영역을 가로지르며, 단일성과 유사성을 거부하고 상징질서를 교란시키는 이질적인 몸이다. 《공포의 힘들》을 비롯하여, 이후에 발표된 《검은 태양》과 《사랑의 이야기》에서도 크리스테바는 어머니의 몸이 상징질서를 교란하기는 하지만 결코 의미영역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의미를 창조하는 공간임을 강조한다. 주체의 무의식 속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어머니의 몸이 예술작품 안에서 재현되기 때문이다. |
Copyright 월간 넥스트 All right reserved. 2005년 08월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Trackback RSS : http://www.fallight.com/rss/trackback/928
Trackback ATOM : http://www.fallight.com/atom/trackback/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