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는 성인의 모든 인간관계는 이전 감정의 재편집이며, 아이가 생후 초기 어머니와 나눴던 유대감과 자라면서 오이디푸스 갈등과 관련해 아버지에게 느꼈던 감정이 바로 사랑의 끌림으로 재현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에게 ‘모든 사랑은 재발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사랑은 무의식의 운명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무의식에서 갈망하던 대상이 바로 그 사람이며, 그리고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자신이 내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어느 날 어떤 대상에게 갑자기 빠져 들게 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우리는 처음에 상대방에게 무조건적으로 빠지는 게 아니라 매우 조건적으로 빠져 든다. 그러니까 운명적인 만남이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특히 첫눈에 반하는 사랑의 경우 그 대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그리고 있던 연인의 모습에 가까운 사람이며, 자신의 내적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중 가장 흔한 것이 부모와 같은 유형을 찾는 경우다. 자신의 부모에게서 느끼는 감정과 유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상대나,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부모상이 엿보이는 상대에게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또 구원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대상, 혹은 반대로 구원받고 싶은 자기를 돌봐 줄 수 있는 대상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ㅡ pp.25~26

사실 열 사람이 어떤 사건을 동시에 목격한다 해도, 그들이 사건에 대해 말하는 느낌은 모두 다르다. 왜냐하면 기억이라는 것은 그것이 저장될 당시의 그대로가 아닐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나 사물이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될 때, 그것은 본질과는 조금 다르게 변형되어 저장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그것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향에 따라 변형되어 기억의 창고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형된 기억이 훗날 그걸 회상할 때 또 한 번 변형될 가능성이 높다. 즉 회상하는 시점의 소망과 욕망, 감정, 느낌 등이 기억을 떠올리는 데 개입하는 것이다.

때로 기억과 상상을 혼동하는 수도 있다. ㅡ p.87

소녀들은 자신을 돌봐 주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신도 어머니가 됨으로써 여성성을 완성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사랑은 소녀의 운명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여성은 일반적으로 인간관계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여성들은 일찍부터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그와 함께하길 꿈꾼다.

하지만 남자들은 다르다. 남성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독립해 자율성을 획득하는 걸 말한다. 그래서 여자처럼 사랑이 그들에게 우선 가치가 아니다. 하지만 요즘은 경제적으로 독립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군대에 갔다 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할 때까지 부모에게 의존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남자들에게 심리적 부담을 지운다. 남자가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는 경제적 독립을 통한 진정한 자율성과 심리적 자유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남녀 모두 사랑보다 일을 해서 그 능력을 인정받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여긴다. 그러다 보니 사랑은 그 이후로 밀려나고 있다. 만혼이 유행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ㅡ p.129

하지만 누구에게나 사랑이 축복인 건 아닌 것 같다. 윌이 처음에 그랬듯 사랑이 다가와도 그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밀어내 버리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 초반에 윌을 지켜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랑받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비례하지 않을까?’

스칼라 같은 좋은 사람이 다가왔는데도 윌은 그 사랑을 거부했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아주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윌은 나중에 스스로 스칼라를 찾아간다. 자신이 더 이상 버림받아 마땅한, 나쁘고 못난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처럼 사랑받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ㅡ p.166

‘신뢰하는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프로이트는 그 답을 아기 때 엄마와 이루는 관계에서 찾는다. 즉 신뢰는 엄마와 내가 분리된 독립체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우울함에 빠졌다가 그것을 극복해 내는 과정에서 배운다는 것이다.

아기는 엄마와의 완전한 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인 생후 2년까지 엄마를 찾는데, 이때 늘 엄마가 옆에서 반응을 보여 주고 안심시켜 준다고 해 보자. 아기는 자신이 혼자 놀고 있어도 엄마가 어디 도망가지 않고 내 옆에 있을 거라는 믿음, 즉 ‘기초적 신뢰(basic trust)’를 갖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최초로 배우는 ‘신뢰’다.

어쩌면 누군가는 최초로 신뢰를 배우는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신뢰를 못 배웠을 수도 있다. ㅡ pp.178~179

정신분석 치료를 시작할 때 환자에게 으레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배우자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좌절을 견디는 능력, 적어도 타인과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이 있음을 말해 준다. 사랑을 마음의 키를 재는 척도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ㅡ p.250

ㅡ 김혜남,『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걸까?』, 갤리온
2010/12/22 23:53 2010/12/2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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