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이 자유로이 이 사랑을 거부할 수 있으며, 항시 비추는 이 빛을 가리개로 차단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어쨌든 사랑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어쨌든 사랑받는다. 인간에게는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자신을 숭배하는 자’와 ‘타인과 공감하는 자’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과 타인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길 거부하는 사람들 간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유일한 신성모독은 사랑에 대한 모독뿐이다.
강조하는 바이지만, 나는 내가 사랑과 고통을 결합시키는 긴밀한 관계의 신비를 이해하고 그렇게 살고자 했다고 해서, 고통받는 누군가에게 ‘당신은 참으로 운이 좋군요. 당신이 겪는 고통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나는 내가 잘 알고 있고 참으로 좋아하기도 하는 테레사 수녀를 생각한다. 그분은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자들을 위한 무한한 자비를 한평생 증명해보이신 위대한 성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흔히들 그러듯 그분이 병원에서 끔찍이도 고통받는 불행한 이들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의 대속과 고통을 이렇듯 함께할 수 있으니 운이 좋으십니다’ 라고 말하는 걸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건 안 된다. 나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는 두 가지 태도만이 바르다고 마음속 깊이 확신한다. 침묵하고, 함께 있어주는 것이 그것이다.
고통받는 자들에게 충고를 하려 들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들에게 멋진 설교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신앙에 대한 설교일지라도 말이다. 다만 애정어리고 걱정어린 몸짓으로 조용히 기도함으로써, 그 고통에 함께함으로써 우리가 곁에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그런 조심성, 그런 신중함을 갖도록 하자. 자비란 바로 그런 것이다.
ㅡ 피에르 신부,『단순한 기쁨』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
빈자리로 각인 된 사랑.
과거는 단지 꿈이다. 생각하는 마음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 역시 마찬가지다. 있다고 한다면 나에게 보여달라. 그런데도 우리는 과거, 미래가 마치 실제로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 혹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분노하고 걱정하고 행복해하고 슬퍼한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생각이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인정하는 사람들 중에도 현재만큼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당신이 ‘현재’라고 말하는 지금 이 순간도 엄밀히 따져보면 이미 지난 시간이다. 과거란 말이다. 현재는 없다. 우리 생각이 현재를 만들고 과거와 미래를 만들 뿐이다.
생각을 하면 시간과 공간이 생기고 시간은 언제나 끊임없이 흘러 간다. 하지만 이 시간이란 것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단지 생각에서 나온다. 시간은 우리 자신의 생각하는 마음과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이 순간만을 갖는다. 우리 삶은 순간순간 일어난다. 이 순간은 무한대의 시간과 무한대의 공간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없음을 말하는 또 다른 길이다.
ㅡ 숭산 스님,『선의 나침반 2』
읽고도 잊어버렸던 것들을 다시 읽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현재의 육체적 욕망을 억누를 수 없는가? 그 이유는 충분히 억누를 수 있었던 욕망을 습관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절망감을 느낄 때면 스스로를 환자로 생각하라. 너무 많이 움직이지도 무언가 행동하지도 말고 상태가 좋아지기만을 가만히 기다려라.
반짝거리는 새 신발을 신은 사람은 진흙탕을 밟지 않으려 조심한다. 하지만 실수로 신발을 더럽히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신경 쓰지 않고 진흙탕을 걷게 된다. 우리의 영혼의 삶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라. 잘못하여 진흙탕에 들어갔다 해도 곧 빠져나와 자기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살인, 도둑질, 정욕, 거짓말, 음주를 다섯 가지 죄로 여긴다. 이들 죄를 피하는 방법은 자기 절제, 소박한 삶, 노동, 겸손, 믿음이다. 육체는 영혼에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반대 상황이 너무도 자주 벌어진다. 이를 나는 죄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의 삶을 통제하고 행동을 지시하는 일이 쉬운 까닭은 무엇인가? 혹시 잘못된 결정을 내렸더라도 자신이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타인에게 떠드는 이에게는 정작 자기 삶을 살 시간이 없다. 타인에게 자기가 시키는 대로 살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은 이를 위해 동원된 폭력을 정당화한다.
ㅡ 레프 톨스토이,『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하지만 슬프고 무섭고 견디기 어려운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나는 너희가 그것을 면하게 할 수 없었기에, 모든 것에 대항할 수 있도록 너희의 마음을 무장시켰다. 너희는 용감하게 참고 견뎌라. 이 점에서 너희는 신을 능가할 수 있다. 신은 수난의 바깥에 있으나, 너희는 수난을 뛰어넘으니까 말이다. 가난을 무시해라. 태어났을 때만큼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통을 무시해라. 고통은 사라지거나 너희와 함께 끝날 것이다. 죽음을 무시해라. 죽음은 너희를 끝내주거나 다른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운명을 무시해라. 나는 운명에 너희의 영혼을 칠 수 있는 무기를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아무도 너희 뜻에 반해서 너희를 붙들지 못하도록 배려해두었다. 인생에서 출구는 열려 있다. 싸우고 싶지 않으면 도망쳐도 좋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필요할 성싶은 모든 것들 가운데 죽음을 가장 쉽게 만들어 놓았다. 나는 영혼을 쉽게 사라질 수 있도록 급경사진 곳에다 세워두었다. 유심히 살펴보기만 하면, 얼마나 짧고 편리한 길이 자유를 향하여 나 있는지 너희는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나갈 때에는 들어올 때만큼 오래 걸리지 않게 해두었다. 인간이 태어날 때만큼 천천히 죽는다면, 운명이 너희에게 큰 권세를 가질 테니까 말이다.”
“죽음이라는, 이른바 영혼이 육신에게 떨어져나가는 시간 자체가 너무나 짧아서 그 과정을 느낄 수 없다. 올가미가 목을 조르든, 물이 숨구멍을 막아버리든, 딱딱한 바닥에 거꾸로 떨어져 두개골이 박살나든, 들이마신 열기가 숨길을 막아버리든 그것은 순식간에 진행된다. 너희는 부끄럽지 않으냐? 그토록 빨리 끝나는 것을 그토록 오랫동안 두려워하고 있으니 말이다.”
ㅡ 세네카,『인생론』
2003년 11월 구입한 책에 꽂혀 있던 낙엽. 가끔 책갈피에 곱게 끼워져 있는 낙엽을 찾을 때면, 이상하게 쓸쓸하고 슬퍼진다. 혹은 쓸쓸하고 슬퍼올 때면 무의식간에 이런 낙엽들을 귀신같이 찾아내는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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