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1] 남산신성비 제1비
 
남산신성비는 591년(진평왕 13) 남산에 신성(新城)을 쌓고 그에 관여한 지방관 및 지방민들에 관하여 기록한 비이다. 제1비가 1934년에 처음 발견된 이래 현재까지 10개가 발견되었다. 10개 모두 비의 첫머리에 ‘신해년(591) 2월 26일 남산 신성을 쌓을 때, 법에 따라 쌓은 지 3년 만에 무너지면 죄로 다스릴 것을 널리 알려 서약케 한다’라는 공통된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신성의 축조에 동원된 사람들이 공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서약식을 행하였던 관례를 이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제3비와 9비를 제외하고, 그 다음에 도사(道使)와 나두(邏頭)와 같은 왕경 6부 출신의 지방관, 촌주와 장척(匠尺), 문척(文尺)과 같은 지방의 지배자, 그리고 축성에 동원된 기술자집단을 기술하고, 마지막에 할당된 공사구간을 몇 보(步) 몇 촌(村)의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제3비는 특별하게 왕경 훼부(喙部)의 주도리 사람들을 동원하여 신성을 쌓은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에 비문의 형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서약 문장 다음에 훼부 주도리가 할당받은 공사구간을 기술하고, 부감(部監)과 문척(文尺)과 같은 공사 책임자, 기술자집단을 차례로 기술하였다. 한편 제9비는 서약 문장 다음에 급벌군(伋伐郡)의 이동성(伊同城)이 할당받은 공사구간, 군상인(郡上人)을 비롯한 이동성의 지배자들, 그리고 기술자집단의 순으로 기재하였는데, 다른 것과 달리 왕경 6부 출신의 도사(道使) 등의 지방관이 빠져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1934년에 처음으로 발견된 제1비는 본래 경북 경주군 내남면 탑리 식혜골 김헌용의 집 앞 도랑에 놓여있었던 것이었다. 남산 중턱에 있었던 것을 가옥을 신축하면서 옮겨 놓았던 것이라고 한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높이 91cm, 최대 폭 44cm, 두께 5~14cm이며, 모양은 기다란 계란형에 가깝다. 서체는 육조풍(六朝風)의 고졸(古拙)한 성격이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비는 아량촌(阿良村), 영고촌(營沽村)과 노함촌(奴含村) 등의 주민들이 신성을 쌓았다는 내용인데, 아량촌 등은 현재 경남 함안이나 의령지방에 해당한다. 여기에 지방관으로 도사(道使), 지방의 지배자로 군상촌주(郡上村主), 장척(匠尺), 문척(文尺) 등이 보인다. 이밖에 축성기술자로 성사상(城使上), 면착상(面捉上)이 보이고 있다.
 

 
제2비는 상반부와 하반부가 따로따로 발견되었는데, 하반부는 1956년에 경주 남산 서쪽 능선의 전일성왕릉 부근에서, 상반부는 1960년 12월에 같은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제1비와 마찬가지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재질은 화강암이고, 상하단의 폭이 좁고 중간폭이 넓은 장방형을 이루었다. 전체 길이 121cm, 중간 최대폭 47cm, 두께 7~14cm이다. 비의 내용은 아차혜촌(또는 아단혜촌), 답대지촌(答大支村)과 구리성(仇利城), 사도성(沙刀城) 등의 주민들이 신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아차혜촌은 경북 의성군 안계면 안정리, 답대지촌은 경북 상주군 화서면 회령, 사도성은 상주지방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여기에 보이는 지방관이나 지방의 지배자들은 대략 제1비의 경우와 비슷하다. 다만 지방의 지배자로 군중상인(郡中上人), 작상인(作上人)이 보이고, 기술자 가운데 면석착인, 소석착인이 보이는 것이 특징적이다.
 

 
제3비는 원래 경주시 배반동 사천왕사 부근 이판출씨의 집에 있었는데, 진홍섭선생이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화강암의 재질로 전체 길이는 80.5cm이고, 폭은 상단이 30cm, 하단이 23cm이며, 두께는 10cm이다. 비의 내용은 왕경의 훼부 주도리인이 신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역부를 동원하고 축성을 감독하는 관리가 부감(部監)인데, 이것은 왕경을 관할하는 6부소감전의 관리인 감랑(監郞), 감신(監臣), 감대사(監大舍) 등과 관련이 깊다. 특히 축성구간이 21보(步)로서 다른 비에 보이는 작업구간과 비교할 때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림 2] 경주남산성
 
 
제4비는 1960년 12월에 제2비의 상반부와 함께 발견되었다. 상반부가 절단된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비문 전체의 내용은 알 수 없다. 비는 고생촌(古生村) 등의 주민들이 신성을 쌓았다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지방관으로 나두(邏頭)가 보이고 지방의 지배자와 기술자집단의 전모는 알 수 없다.
 

 
제5비, 제6비, 제7비와 제8비는 비의 조각만이 남아 전하는 것들이다. 제5비는 1972년 8월 문화재관리국에서 도로예정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던 중 경주시 사정동 흥륜사지의 중문지로 추정되는 곳의 민가를 철거하다가 발견하였다. 제6비는 1974년 3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수습한 것이고, 제7비는 1985년 남산신성 남쪽 성벽 내측의 민묘(民墓) 앞에서 수습한 것이다. 그리고 제8비는 같은 해에 남산신성의 북문지 중간지점 바닥에서 수습하였다. 모두 파손이 심하여 비의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다. 제9비는 1994년 1월 남산신성의 서쪽 성벽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처음 세웠던 상태 그대로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남산신성비와 기재 양식이 달라 많은 주목을 받았다. 비의 내용은 급벌군(현재 경북 영풍)의 이동성도(伊同城徒)가 6보를 할당받아 신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제9비는 다른 비들과 달리 지방관에 관한 사항이 보이지 않고, 지방의 지배자와 기술자의 명단만을 기재한 사실이 특징적이다. 이것을 통하여 축성을 위하여 역부를 징발할 때, 지방의 지배자들이 거기에 깊게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제10비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0년 5월 18일 경주시 배반동 751-3번지 논둑에서 발견하였다. 수습된 비편은 높이 27cm, 폭 16.5cm, 두께 13cm이며, 재질은 붉은 색조의 화강암이다. 현재 비편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3행 5줄의 15자만이 남아있다. 파손된 후 남산에서 1Km 떨어진 현재의 출토지까지 이동된 것으로 추정된다. 10개의 남산신성비는 도사(道使)나 나두(邏頭) 등의 지방관, 다양한 지역, 다양한 명칭의 지방 지배자들을 전하고 있다. 현재 이를 기초로 중고기 군(郡)과 촌(성)과의 상호 관계, 그리고 그들의 성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거나 진행 중이다. 특히 비들이 신성의 축조에 역부를 동원한 사실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현재 중고기 역역동원체계를 살필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자료로 적극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주제어
서약식, 도사(道使,) 나두(邏頭), 촌주, 장척(匠尺), 문척(文尺), 왕경, 훼부(喙部)의 주도리 사람들, 부감(部監), 군상인(郡上人), 군상촌주(郡上村主), 성사상(城使上), 면착상(面捉上), 작상인(作上人), 감랑(監郞), 감신(監臣), 감대사(監大舍), 역부, 징발, 중고기 군(郡)과 촌(성)과의 상호 관계, 중고기 역역동원체계
 
     
   
   
 
2007/03/19 03:09 2007/03/19 03:09

[한국사 미스터리](15)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1934년 5월4일, 어느 일본인이 경주 북천 건너 금장대 부근(현 경주 동국대 후면)의 구릉을 걷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오사카 긴타로(大阪金次郞)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선덕여왕대 유명한 양지스님과 관련된 석장사(錫杖寺) 터를 조사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문득 오사카의 발에 돌 하나가 걸렸다. 냇돌(川石)이었다. “어, 거참 이상한 돌이네”. 고고학자 특유의 눈썰미가 이 예사롭지 않은 돌에 꽂혔다. 자세히 보니 길이 30㎝에 지나지 않은 냇돌에 새겨넣은 글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우연히 주운 냇돌의 비밀은?=글자는 ‘임신(壬申)’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면밀히 살펴보니 5줄에 모두 74자나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돌의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이듬해인 35년 12월18일. 당시 일본 역사학의 대가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경주분관을 둘러보았다. 수집해둔 몇 편의 비석편 가운데 그의 눈길을 끈 것이 바로 이 돌이었다.

“이거 어디서 주웠습니까?”. 흥분한 스에마쓰는 오사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리고는 새겨진 글자 가운데 첫머리에 임신(壬申)이란 간지(干支)로부터 시작되고 있고, 새겨진 글자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본 결과 두 사람이 서약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바로 ‘임신년에 서로 서약하는 내용을 기록한 돌’이란 의미에서 그 자리에서 이 돌의 이름을 임시로 부르기로 했다. 그는 바로 이 돌에 새겨진 글자를 판독해서 이듬해인 1936년 경성제대 사학회지 제10호에 ‘경주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탁본과 함께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되어 임신서기석이란 용어가 마련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 돌은 돌을 주웠던 오사카의 개인소유였다. 그러다 광복되면서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두었기 때문에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 땅에서 동산문화재는 어떤 경우든 먼저 수집하는 사람의 소유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모름지기 충도(忠道)를 맹세한다”=임신서기석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임신년 6월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늘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집지(執持)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기면 하늘에 큰 죄를 짓는 것이라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 앞서 신미년 7월22일에 크게 맹세했다. 즉 시(詩), 상서(尙書), 예기(禮記), 전(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 한다’

그런데 이 임신서기석의 ‘임신년’이 신라 어느 왕대 어느 시기에 해당하느냐가 가장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글쓴 연대가 확실하게 되면 내용에 따른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임신이란 간지는 60년마다 되풀이된다. 따라서 정확한 연대를 밝히지 않으면 60년, 120년, 180년 앞서 만들어졌을 수도 있고, 뒤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스에마쓰는 이 ‘임신년’은 신라 문무왕 때인 672년이나 성덕왕 때인 732년 둘 중에 하나일 것이며, “내 생각으로는 성덕왕 때인 732년에 무게를 두고 싶다”고 결론지었다.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하나로 통일한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나라가 안정되고 나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어쨌든 일제 강점기에는 스에마쓰의 해석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고 누구나 그렇게 믿어왔다.

◇맹세연도가 732년이냐, 612년이냐=그러나 광복 후 이병도가 다시 이 서기석을 관찰하고 종합적인 해석을 내렸다. 글이 쓰인 연대는 신라 진흥왕 때인 552년이나 진평왕 때인 612년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였다. 스에마쓰 주장과는 무려 120년간의 차이가 있었다. 스에마쓰는 비문의 내용 가운데 시경·상서·예기 등 신라 국학의 주요한 교과목을 습득하고자 한 것을 맹세한 점에 주목했다. 결국 신라에서 국학을 설치하고 한층 체제를 갖춘 신문왕 이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즉 임신년을 문무왕 12년인 672년이 아니면 성덕왕 31년인 732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이병도는 신라에 국학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유교경전이 신라 지식사회에 수용되었음을 강조했다. 특히 비문 내용 가운데 나라에 충성하는 길을 맹세한 점이 돋보인다는 것. 이 충성맹세는 신라 화랑도(花郞徒)의 근본정신이며, 따라서 이 임신서기석은 이 제도가 융성했던 진흥왕 13년인 552년이거나, 진평왕 34년인 612년으로 보는 것이 좀더 타당하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와 같이 동일한 비문을 놓고 그 해석에 있어서 내용은 동일하나 비문이 쓰인 연대는 1세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고고학보다도 문헌사학을 통한 고대사 해석시에는 이러한 명문, 즉 글자가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면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왜냐하면 열악한 기록에만 의존하고 있는 학문세계에 새로운 기록이 나타남으로써 부족한 기록을 보태는 것은 물론 당시의 사회를 복원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최초 발견 당시 전후사정 볼 것 없이 쉽게 접근한 것이 바로 신라가 국학을 설치하고 교과목으로 채택한 경전이 돌에 새겨진 점이었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일본 어용사학자의 선두주자나 다름없었던 비중있는 학자가 발표했기에,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됐던 것이었다. 결국 이 임신서기석의 연대가 통일후 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성덕왕대의 것이라는 스에마쓰의 해석에 반기를 드는 이는 없었다.

◇“임신서기석은 화랑정신의 상징석”=그러나 광복 후 이병도는 스에마쓰의 해석을 분석해 새롭게 조명했다. 신라에는 화랑도의 정신이 있었다. 바로 그 화랑도 정신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나아가 외세인 당나라의 세력까지 몰아냄으로써 삼국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건 역사적인 사실이다. 알다시피 화랑에는 젊은 화랑들이 지켜야 할 5가지 행동강령인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었다.

이 강령을 보면 첫째가 임금, 즉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며, 둘째가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고, 셋째가 벗과는 신의를 지켜야 하며, 넷째가 싸움에 나가 물러서지 않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다섯째가 살생은 가려서 하라는 것이다. 진평왕때 원광(圓光)스님이 마련한 이 강령은 화랑도의 근본사상이었다.

그런데 이 ‘임신서기석’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당시 상당한 교육적 지식을 갖춘 두 사람임이 분명하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은 세속오계의 화랑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이 서기석의 임신년은 진평왕대인 서기 612년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바로 삼국통일 전의 사회정신을 말해주는 젊은 지식인들의 ‘나라에 대한 맹세’라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조유전/고고학자

2003년 08월 18일

작성자 : 고고학반 (2004/10/08 09:42:36 PM) (2005/04/17 09:01:05 PM )
이 기사의 저작권은 작성자에게 있습니다.
2007/03/19 02:55 2007/03/19 02:55

<기획탐방> 새용산박물관 전시실을 가다⑤

경주 서봉총 출토 은합(銀盒)

뚜껑과 몸체의 조립식 은 그릇

신라의 4-6세기 문화는 고분에서는 적석목곽분(績石木槨墳)으로 흔히 대표되며, 출토유물로는 황금을 비롯한 금속유물이 유명하다. 이 신라실을 채우게 되는 전시물 역시 대종은 적석목곽분 금속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경주 서봉총 출토품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은으로 만든 합(盒)이라는 그릇. 몸체와 뚜껑 조립식인데 뚜껑 안쪽과 몸체 바닥에는 각각 '延壽元年太歲在卯'(연수 원년 태세 재묘)와 '延壽元年太歲在辛'(연수 원년 태세 재신)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고 있다.

두 곳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연수'(延壽)라는 말은 연호(年號)일 것이며, 이 은합이라는 기물(器物)이 제작된 연대를 지칭하고 있으리라. 태세(太歲)란 목성이 태양 주위를 도는 주기를 기준으로 시간을 헤아리는 부호다.

목성은 12년마다 태양을 한 바퀴 돈다. 이렇게 되면 희한하게도 12간지(干支)와 대응시켜 연대를 구별할 수 있게 된다.

더욱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대목은 이 은합(銀盒)이 제작된 신묘(辛卯)라는 해가 하나(卯)는 뚜껑에, 다른 하나(辛)는 몸통에 표현돼 있다는 사실이다. '辛'이 들어간 10천간(天干)은 '卯'가 포함된 12간지에 대해 음양설에서는 양(陽)이 된다.

천간과 간지를 떼어 놓는 수법으로 연대를 표시하는 이런 방식에서 우리는 다시금 경주에 적석목곽분이 축조되던 그 시대 신라사회에 음양오행설이 얼마나 깊숙하게 침투해 있었는지를 여실히 확인하게 된다.

서봉총 은합에 새긴 명문에 의하면 이 그릇은 천간지지로는 신묘년에 해당되고 연수라는 연호로는 원년이 되는 해 "3월 중에 태왕(太王)이 교(敎.명령)하시어" 제작됐다.

학계의 다수는 이 은합이 고구려에서 제작돼 어떤 경로로 신라에 흘러들어 서봉총에 묻힌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결정적 증거는 없다.

혹자는 '연수'라는 연호가 고구려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주장하나, 고구려가 연호를 사용한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칭하고, 그의 재위 기간 중 일어난 사건을 '영락 ●년"이라는 식으로 기록한다 해서 영락(永樂)을 연호로 간주하고 있으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비문 그 자체가 영락이 호(號)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호(號)란 미칭(美稱)이란 기록이 중국에서는 이미 진한(秦漢)시대부터 쏟아지고 있다. 미칭이란 말할 것도 없이 존칭이라는 뜻. 그 외 다른 고구려 유물에서 연호가 확인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문제가 적지 않다.

이 서봉총 은합이 신라 유물이라는 결정적 증거는 사실 서봉총이 축조되던 그 무렵 같은 신라 무덤에서 이와 거의 똑같은 유물이 다수 출토됐기 때문이다. 서봉총 은합이 고구려 수입품이라면 다른 신라무덤 모든 비슷한 출토품, 심지어 경산 임당동 고분 출토품도 고구려 수입품이라는 결론이 도출되고 만다.

황남대총 유물로는 북분 출토 금으로 만든 등자가 있다. 한데 황금 마구류가 이뿐만 아니다. 여타 소규모 장식품도 금제품이 압도적이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말 등자까지 금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장례는 검소하게 치러야 한다는 절장(節葬)의 사상가 묵자(墨子)의 외침이 신라에는 전해지지 않았던지, 전해졌다 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았나 보다.

봉분 두 개를 남북으로 나란히 잇대어 놓은 쌍둥이 무덤인 황남대총 중에서도 여성을 묻었음이 확실한 북분은 남성이 묻힌 남분에 비해 '황금파티'가 더하다. 이곳에서는 각종 금제 그릇이 출토됐다. 그 모양도 굽다리 접시를 흉내낸 것도 있다.

그에 비해 황남대총 남분은 은색(銀色)이 상대적으로 짙다. 이곳 출토 은제 그릇 넉 점이 전시코너를 장악하고 있는데, 북분 금제 그릇이 그렇듯이 이곳 출토 은제 그릇 중에서도 굽다리 접시가 보인다.

같은 경주지역 적석목곽분인 식리총(飾履塚)은 이곳에서 황금신발이 출토됐기 때문에 이런 명칭을 얻었다. 식리(飾履)란 굳이 그대로 해석하면 장식용 신발이란 뜻이지만, 그냥 신발이라고 보면 된다. 한데 이 황금신발은 신발 밑창만 남았다.

이 식리총 출토품으로는 그 마스코트격인 황금신발 한 켤레 외에도 모양이 서봉총 은합과 매우 흡사한 그릇이 있다. 한데 그 재료는 청동이다. 이 역시 서봉총 은합처럼 몸체-뚜껑 조립식인데 뚜껑 복판에는 봉황으로 생각되는 고리를 장식하고 있다. 초두라고 하는 일종의 세 발 솥(혹은 냄비)도 식리총 대표주자로 나온다. 청동인 이 초두가 보통의 솥과 다른 점이라면 다리미처럼 길쭉한 손잡이가 달렸다는 데 있다. 죽은 사람이 저승에 가서도 두고 두고 음식을 해 드시라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이 외에도 적석목곽분 출토품으로는 일일이 수량을 헤아리기도 힘든 각종 구슬류가 꾸러미 상태로 출품을 기다리고 있다. 중국에서 왔을 것으로 보이는 각종 유리제품도 빼놓을 수 없다.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블로그 2005-8-22) 

<기자수첩> 고구려인은 조선인이 아니다?

<기자수첩> '국사'를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2007/03/19 02:53 2007/03/19 02:53

« Previous : 1 : ... 276 : 277 : 278 : 279 : 280 : 281 : 282 : 283 : 284 : ... 429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