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의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실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랩토마이신을 한알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의 머리카락을
침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 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거야



폐결핵. 각혈, 그리고 나의 탐부톨錠.

2007/03/22 21:35 2007/03/2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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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2

2007/03/22 06:39 / My Life/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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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 홍세화씨의 강연을 들었다. 사실 나는 신문에 논설 내는 사람 중에 이 사람과 김훈의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줄거리가 예상되는 뻔한 구성의 로맨스 소설을 읽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들에겐 도덕적 당위만 있을 뿐이다. 강연 역시 글처럼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사람은 인상 좋고 괜찮은 선생님이었다. 어쨌든 세상을 바꾸자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방법이 문제고 위치가 문제일 뿐. 이들은 사상교육의 시대는 이미 지났고, 그 결과도 실패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본인들은 언제나 옳으니까. 나처럼 혹은 다른 모든 이들처럼, 균형을 강조하는 편향자일 뿐, 그러나 나 같은 방관자 보다는 낫겠지. 아니, 나을까?

2007/03/22 06:39 2007/03/22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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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2 07:54:21 입력

[한국의 혼 樓亭 .30] 난재 채수의 상주 이안면 '쾌재정'
'神仙'채수의 은거지…안타깝다 '페인트칠'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정치 격변기 파직→재등용→유배→공신→낙향 파란만장
최초의 국문소설 가능성 '설공찬傳'썼다가 필화 겪기도
튀는 才士의 유쾌함 서린 곳 후손의 방문 기념비 그슬려

/글·사진=김신곤기자 ms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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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이안면 가장리 들판 언덕 위에 자리잡은 쾌재정은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줄기와 마을 전경을 마주하고 있다.
상주시 이안면 가장리 들판 언덕 위에 자리잡은 쾌재정은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줄기와 마을 전경을 마주하고 있다.
조선조 중종 6년(1511) 9월2일,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사헌부에서 아뢰었다.

'채수(蔡壽)가 '설공찬전(薛公贊傳)'을 지었는데 내용은 화복이 모두 윤회(輪廻)한다는 것으로, 매우 요망한 것입니다.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에서 현혹되어 믿고서 한문으로 베끼거나 국문으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하게 합니다. 사헌부에서 마땅히 공문을 발송해 수거하겠습니다마는 혹시 수거하지 않거나 나중에 발각되면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이에 임금이 답하기를, '설공찬전은 내용이 요망하고 허황하니 금지함이 옳다. 그러나 법을 세울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노라'라고 하였다."



#'설공찬전'은 당시 정계를 경악시킨 국문소설

설공찬전이라는 이 패관(稗官)소설의 내용이 어떠하기에 이같이 조야가 발칵 뒤집힌 것일까. 이 패관소설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것으로, 사상계의 흐름이나 정치적인 문제 가운데 거슬리는 내용을 과감하게 언급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저자는 학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고, 금서(禁書)로 규정되어 불태워졌다. 그는 이 같은 필화사건으로 갖은 박해와 고된 역경을 견디어야 했다.

난재의 17세손인 채동식씨(75)는 "소설의 내용은 이승에서 잘못을 하면 저승에 가서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 설공찬전이 최근 향토학계 등에서 조선 초기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소설을 쓴 주인공은 바로 난재(懶齋) 채수(蔡壽·1449~1515)이다. 상주시 이안면 가장리의 들판과 동네 및 강줄기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쾌재정(快哉亭)은 그가 말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유유자적하며 음영(吟詠)하던 곳이다.

그의 호인 난재(懶齋)라는 글자의 난(懶)은 독음(讀音)이 '게으르다'는 의미의 '나'이지만 본음이 '난'이므로 후손들은 '난'으로 표기하고 있다.



#쾌재정은 난재가 이상향을 추구했던 곳

그가 거처한 쾌재정 원운(原韻)의 시를 보면 성품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늙은 내 나이 금년에 예순여섯(老我年今六十六), 지난일 생각하니 생각이 아득하다(因思往事意茫然). 소년 시절에는 재예(才藝)로 대적할 자 없기를 기약하였고(少年才藝期無敵), 중년에는 공명이 또한 홀로 훌륭하였다(中歲功名亦獨賢). 세월은 흐르고 흘러 탄식에 묶여 매였고(光陰滾滾繩歎繫), 청운의 길 아득한데 말은 달리지 않는구나(雲路悠悠馬不前). 어찌하면 티끌세상의 일 다 벗어던지고(何似盡抛塵世事), 봉래산 정상의 신선과 짝이 될 수 있을까(蓬萊頂上伴神仙).



이 시의 기상은 지금까지 보아오던 다른 시들의 겸손과 자수(自修)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점이 있다. 그만큼 그의 성품은 독특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본관은 인천이다. 세종조에서 중종조까지 살았던 문신으로, 중종반정 공신이다. 11세 무렵 지은 시문을 점필재(畢齋) 김종직이 읽고 찬탄하기를 "훗날 세상을 울릴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他日, 鳴世者, 必此子也)"라고 찬탄하였다.

세조 14년, 20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해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성종 1년, 22세에는 예문관수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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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문식 전 국회의장의 방문 기념비석이 정자 입구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다.3
채문식 전 국회의장의 방문 기념비석이 정자 입구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다.
되고 이어 홍문관교리, 지평,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30세에는 응교(應敎)에 임명되어 임사홍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파직당하였다.

대사헌 시절에는 연산군 생모 폐비윤씨의 구제를 위해 눈물로 아뢰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벼슬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 후 다시 서용(敍用)되어 하정사(賀正使),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었으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이후 줄곧 외직을 자청하여 무오사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후 평안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다가, 갑자사화 때 예전에 정희대비가 언문으로 적은 폐비 윤씨의 죄상을 사관(史官)에게 넘겨준 것이 죄의 빌미가 되어 곤장을 맞고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윽고 중종반정이 일자 반정에 가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하여졌다. 그 후 후배들과 조정에서 벼슬하기를 부끄러워하여 벼슬을 버리고 상주로 낙향하니 58세였다.



#진정한 즐거움을 추구한 博學聰明의 대선비

이듬해 쾌재정을 짓고 은거하여 독서하며 풍류로 여생을 보내다가 67세 되던 해 겨울, 자녀들에게 명하여 자리를 바르게 깔도록 한 후 편안히 운명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세상 밖에서 살고 간 신선'이라고 칭송한 말이 연보에 기록되어 있다.

난재는 점필재에게 종유(從遊)하였고 성현(成俔)과 교제가 깊었다. 사신으로 북경을 내왕하면서 요동의 명사였던 소규(邵圭)와 사귀었으나, 새로이 등장하는 신진사류와는 화합을 잘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난재는 총명한 신동으로 독서량이 대단히 많았던 인물이었다. 천하의 도서와 산경(山經), 지지(地誌), 패관소설 등을 모조리 독파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음악과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쾌활하고 거친 행동으로 당시 학자들의 대열에서는 조금 튀는 재사였던 걸로 보인다.

난재가 거처하던 쾌재정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180여년 후 후손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그 후 몇 차례 중수를 거듭해 왔지만 건축물 전체에 페인트칠을 해놓아 아까운 정자를 훼손한 것 같아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더욱이 정자 입구에는 후손인 채문식 전 국회의장이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덩그렇게 놓여있어 정자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분위기를 흐려놓고 있다.

이미(李)가 지은 쾌재정 중수 기문을 보면 난재공의 유쾌했던 삶의 궤적을 느껴볼 수 있다.

'…대개 천하의 즐거움은 마음이 유쾌함만한 것이 없다. 인생백년 가운데 자신을 확립하고 행동을 절제함에 한 가지라도 한스러울 만한 것이 없어야 바야흐로 마음이 유쾌할 것이다. 부귀영화에 뛰어들고 이익을 쫓으며 죽는 날까지 쉬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비록 한때는 스스로 즐거울 것이나 허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부끄러움을 탄식할 여가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유쾌함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 난재공이 '쾌재'로 정자이름을 지은 것을 유추하여 보면 난재공의 유쾌함이 어찌 다만 산수의 승경(勝景)뿐이었겠는가….'

쾌재정에서 한 시대를 고민하고 거칠게 부딪히면서 격렬하게 살다간 난재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 매일매일 고뇌하며 살고 있는 우리 인생이 과연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난재의 저서로는 난재집 두 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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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2 05:54 2007/03/22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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