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속의 명마‘에이원’36승으로 역대 최다승
70년대 초 25연승이라는 불멸의 기록과 죽음까지 예감했다는 이야기로 경마장에 전설로 남아있는 ‘에이원’(A1, 거세마, 호주산). 85년 본지 7~8월호에도 "대적할 상대를 못만나 恨에 묻혔다"라고 소개된 바 있는 에이원의 기록에 대해 궁금해 하는 팬들이 의외로 많아 이번에 새로 자료조사를 실시했다.
한국경마 60년사(83년, 한국마사회 발행)에서는 "‘에이원’은 69년에 도입되어 70~71년을 주름 잡았는데 특히 71년은 25전 25승 전승무패의 신화를 남겼으며..." 라고 간단히 적고 있다. 연도별 최다우승마 표에서도 ‘에이원’은 70년에 6승, 71년에 25승을 올렸다고만 기록되어 있고 72년과 73년의 기록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이후의 기록은 안타깝게도 알 수가 없었다.
이번자료 조사를 통해 먼저 알게된 것은 74년 퇴사마 자료에서 찾아낸 ‘에이원’의 수의사 검안서였다. 그 검안서에는 ‘에이원’이 더러브렛 계종이며 69년 6월 4일 호주로부터 도입되어 9살이던 74년 6월 8일 죽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경마장에서 활약한 기간은 5년인 셈이다.
연도별 경마 통계자료에서는 한국경마 60년사 자료에 기록된 70년 6승, 71년 25연승 이외에 도입된 첫 해인 69년에 2승을 거둔 것과 병으로 죽었던 74년에 5전 3승 2착 1회, 3착 1회를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72년과 73년을 제외한 공식적인 ‘에이원’의 우승회수는 모두 36회가 되는 것이다.
72년과 73년 에이원의 활약상은 당시의 신문 기사(일간스포츠 73년 월 일자, 74년 월 일자)에서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정확한 자료라고 입증할 만한 다른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공식적인 기록으로 인정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기사에 따르면 에이원은 72년에 21연승(2위는 20회 우승한 제네바), 73년에는 18전 15승(2위는 29전 13승의 제네바)로 2년 모두 최다 우승을 기록했다고 한다.
‘에이원’이 죽은 지 10여년이 흐른 85년에 김승길 조교사도 당시 에이원이 몇 번 경주에 출전했는지 기억할 수 없으나 단지 3번의 2착만 기록했을 뿐이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에이원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많은 경주에 출전했고 우승도 많이 한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에이원’이 5년 동안 그렇게 많은 경주에 나왔고 우승을 많이한 이유는 당시의 경마 상황이 지금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에이원이 활약하던 70년대 초에는 주 3~4회 경마에 전체 경주마가 350여 마리에 지나지 않아 경주마 한 마리가 월평균 2.5회 정도 출주해 현재와 차이가 많고 당시 경주마 중에는 에이원을 당할 말이 없어 자신의 부담중량인 56kg에 무려 16kg을 더한 72kg 까지 달고 출전했고, 그래도 적수가 없자 결국 하위 등급 경주에 출전하는 애처로운 상황까지 격어야 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이원의 연승과 다승 기록을 80년대 이후에 나타난 포경선, 대견 등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어렵지만 전설 속에 남기에는 충분한 명마임에 틀림없다.
김정구/홍보과
70년대 초 25연승이라는 불멸의 기록과 죽음까지 예감했다는 이야기로 경마장에 전설로 남아있는 ‘에이원’(A1, 거세마, 호주산). 85년 본지 7~8월호에도 "대적할 상대를 못만나 恨에 묻혔다"라고 소개된 바 있는 에이원의 기록에 대해 궁금해 하는 팬들이 의외로 많아 이번에 새로 자료조사를 실시했다.
한국경마 60년사(83년, 한국마사회 발행)에서는 "‘에이원’은 69년에 도입되어 70~71년을 주름 잡았는데 특히 71년은 25전 25승 전승무패의 신화를 남겼으며..." 라고 간단히 적고 있다. 연도별 최다우승마 표에서도 ‘에이원’은 70년에 6승, 71년에 25승을 올렸다고만 기록되어 있고 72년과 73년의 기록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이후의 기록은 안타깝게도 알 수가 없었다.
이번자료 조사를 통해 먼저 알게된 것은 74년 퇴사마 자료에서 찾아낸 ‘에이원’의 수의사 검안서였다. 그 검안서에는 ‘에이원’이 더러브렛 계종이며 69년 6월 4일 호주로부터 도입되어 9살이던 74년 6월 8일 죽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경마장에서 활약한 기간은 5년인 셈이다.
연도별 경마 통계자료에서는 한국경마 60년사 자료에 기록된 70년 6승, 71년 25연승 이외에 도입된 첫 해인 69년에 2승을 거둔 것과 병으로 죽었던 74년에 5전 3승 2착 1회, 3착 1회를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72년과 73년을 제외한 공식적인 ‘에이원’의 우승회수는 모두 36회가 되는 것이다.
72년과 73년 에이원의 활약상은 당시의 신문 기사(일간스포츠 73년 월 일자, 74년 월 일자)에서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정확한 자료라고 입증할 만한 다른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공식적인 기록으로 인정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기사에 따르면 에이원은 72년에 21연승(2위는 20회 우승한 제네바), 73년에는 18전 15승(2위는 29전 13승의 제네바)로 2년 모두 최다 우승을 기록했다고 한다.
‘에이원’이 죽은 지 10여년이 흐른 85년에 김승길 조교사도 당시 에이원이 몇 번 경주에 출전했는지 기억할 수 없으나 단지 3번의 2착만 기록했을 뿐이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에이원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많은 경주에 출전했고 우승도 많이 한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에이원’이 5년 동안 그렇게 많은 경주에 나왔고 우승을 많이한 이유는 당시의 경마 상황이 지금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에이원이 활약하던 70년대 초에는 주 3~4회 경마에 전체 경주마가 350여 마리에 지나지 않아 경주마 한 마리가 월평균 2.5회 정도 출주해 현재와 차이가 많고 당시 경주마 중에는 에이원을 당할 말이 없어 자신의 부담중량인 56kg에 무려 16kg을 더한 72kg 까지 달고 출전했고, 그래도 적수가 없자 결국 하위 등급 경주에 출전하는 애처로운 상황까지 격어야 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이원의 연승과 다승 기록을 80년대 이후에 나타난 포경선, 대견 등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어렵지만 전설 속에 남기에는 충분한 명마임에 틀림없다.
김정구/홍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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