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는 도박이다?

경마를 레저와 도박이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나누고, 레저라고 할 경우 보다 건전하고 합리적인 그 무엇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마사회 역시 경마를 '레저스포츠'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고 홍보에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두 단어는 대척점에 서야할 이유가 없다. 레저란 무엇인가? 사전상 레저의 정의는 "일이나 공부 따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시간. 또는 그 시간을 이용하여 쉬거나 노는 일" 이다. 도박을 레저로 하던 아이와 함께 운동장에 나가 미니 야구를 하던, 자유로운 시간에 재미로 즐긴다면 모두 레저로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박이란 무엇인가? 사전은 "요행수를 바라고 불가능하거나 위험한 일에 손을 대"는 일이라고 말한다.

경마 자체는 스포츠다. 일정한 규칙 아래서 각 마필과 기수의 기량을 겨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돈을 거는 행위,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마라고 할 때의 경마는 도박이다. 수 많은 변수가 상존하는 경마의 특성상, 거기에 돈이 걸리는 이상 경마는 도박이다. 미래의 불확실한 결과에 대해 자신의 자산을 투하하는 행위가 바로 도박의 본질이다. 그리고 경마는 레저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베팅을 위해 경주 분석에 많은 공을 들이고 상당한 양의 돈을 거는 경마팬들에게 경마는 더 이상 레저가 아니다. 일종의 업(業)이며, 치뤄내야 할 시험이다. 경마를 레저라고 홍보할 수는 있지만, 그 이전에 도박성을 확실히 인지시키지 않는다면 이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경마는 변수가 많은 스포츠다. 일부 변수는 측정 가능하지만, 그 변수조차도 어떻게 발현될지 알기가 상당히 어렵다. 경마에 있어 기록과 순위는 객관적인 자료로 보인다. 그리고 우승마 추론에 있어 이는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말의 특성과 습성, 그리고 경주 전개에 따라 기록과 순위는 개별 마필의 능력에 대한 객관성을 상실한다. 기록이 만들어지기까지 일련의 진행과정은 너무나도 변동성이 심하기 때문에 하나의 기록은 그 경주에 한해서만 객관적일 뿐이다. 이는 모든 스피드 지수가 가진 맹점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변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데서 시작한다. 경마엔 정답이 없다. 여기서 정답이란, 미리 정해진 어떤 올바른 답을 뜻한다. 우리가 어떤 시험을 본다고 할 때 그 시험에는, 논술 시험이 아닌 이상 정답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1번 문제의 정답은 3번이라는 식의 정답이 경마에는 없다. 문제는 주어져 있지만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이는 경마의 본질임과 동시에 매력이며, 또한 최대의 난점이다. 경마는 그 특성상, 많은 경우 마필의 능력 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경마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박으로 즐기면 된다. 무엇이라고! 경마를 도박으로 즐기라니? 나는 도박꾼도 아니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지성인인데 로또 찍듯 경마를 하라니?(시중엔 '로또보다 좋은 경마'라는 책도 나와있다) 라는 반응이 나올 법하다. 아니, 우리나라의 상당수 경마팬들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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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한국마사회

지난 주(2007년 8월 26일)의 마지막 경주 매출액을 살펴보자. 베팅 총액이 약 64억이고 그 중 단연승식과 같은 단일승식에 베팅한 금액이 약 7천 6백만원, 그외 복합승식의 경우 약 63억이다. 만약 대다수의 경마 참가자들이 결과의 높은 불확실성을 인정한다면, 결과가 로또를 찍는 것이나 주사위를 던지는 것처럼 무작위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베팅 선택은 확률이 몇 배 높은 단일승식으로 가야함이 옳다. 하지만 총 베팅금액 중 단일승식에 걸린 돈의 비율은 1.19% 뿐이다. 가장 확률이 높은 연승식의 경우 가장 적은 돈이 걸려 0.51% 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복승식의 경우 70.76%, 쌍승식의 경우 23.00%다. 물론 배당률이 높은 복합승식에 돈이 몰리는 것은 어찌보면 정상적인 행태로 생각되지만, 그 정도가 너무 극단적이다. 마치 복승식에 확률을 뛰어넘는 엄청난 적중률이 내재돼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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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 California Horse Racing Board, 2006

라스베가스라는 도박의 도시가 있으며 오랜 경마 역사를 갖고 있는 미국의 경우를 보자.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10개 경마장의 베팅 금액과 비율을 나타낸 표다. 단일승식의 비율이 20%대의 경마장이 두 군데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30%를 상회한다. 이런 차이가 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도박에 대한 문화사회적 인식의 차이와 경마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로 보인다. 미국의 경우도 도박이 권장되거나 쉬이 인정받는 사회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도박=패가망신(敗家亡身)'이라는 단선적이고 암울하기만한 인식은 아니다. 실제 취미로 카지노에서 슬롯머신 당기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경마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우리나라와는 다소 다르다. 한 세기 반이 넘는 경마 역사속에서 경마는 이미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케이블 TV에서 실시간으로 경마를 중계해주는 것은 물론 경주마 경매 실황까지 보여준다. 주요 월간지에서는 올해의 인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명마를 선정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도박과 경마는 보다 접하기 쉽고 가볍게 즐기기 좋은, 말 그대로 레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보다 확률이 높은 단일승식에 많은 돈이 걸린다는 것은 이런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돈을 벌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맞추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다는 반증이다. (약 99%의 매출이 복합승식에서 이뤄지는 상황에서 마사회는 결코 이 방법을 적극 권장하지 않는다. 마권발매수득율에서 복합승식이 단일승식보다 무려 8%가 높다.)

나는 도박과 경마를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도 엄청난 도박중독자가 있으며 경마로 피폐한 인생을 살고 있는 이도 충분히 많다. 그러나 보다 많은 이들은 경마를 결과가 불확실한 도박으로 인정하고 즐겁게 즐기고 있다. 과천경마장과 마사회 사이트의 게시판을 둘러보면, 경마장을 부정과 비리가 난무하는 곳이라고 믿고 마필의 입상실패에 기수와 조교사를 욕하고, 낙마라도 하게 되면 고의로 떨어졌다고까지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이 모든 불만의 근원에는 경마 결과에 그 어떤 정답이 있다는 착각이 도사리고 있다. 마사회가 배당률을 맞춰준다는 소문이나, 경마장에 엄청나게 난무하는 대다수의 소스 역시 마찬가지 착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경마는 뛰어봐야 안다. 그저 이 말을 믿고 경마를 즐길 수는 없을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부정과 비리의 온상이라고 생각하면서까지 경마를 할 이유는 없다. 그 스스로가 부정과 비리의 한 부분이 아닌 이상.

나는 심혈을 기울여 경마를 공부하는 이들이 승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확률의 세계인 카지노에서 활약하며 돈을 벌어들이는 이들이 있다. 카드 카운팅 기술이건 상대의 심리를 간파하는 기술이건, 그 어떤 기술이 뛰어나건 간에 그들은 분명 승리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겜블러 혹은 프로베터라고 불리는 이 도박꾼들은, 운(運)과 확률이 가진 무작위성에 전적으로 순응한다. 아무리 확률이 높아도 4구 양방 스트레이트가 노-페어가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그럼에도 거금을 베팅한다. 자신의 우승마 추론이 어떤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면, 그 이후는 하늘에 맡기고 결과를 순순히 모두 수용하는 것. 이것이 경마를 레저 이상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2007.08.28

2007/08/28 09:20 2007/08/28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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