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환멸이란 그런 적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저 멍할 뿐이다. 자살. 오늘 아침은 차분하게 자살을 생각했다. 진짜 환멸은 인간을 흐리멍덩해지게 하거나 자살하게 만드는 무서운 마귀와 같아. 확실히 나는 환멸을 느끼고 있다. 부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살아있는 최후의 단 하나의 길에 환멸을 느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세상이 바보 같은 게 아니라 세상에 살면서 노력하고 있는 내가 바보 같아지는 것이다. 암흑 속에서 혼자 하하하, 하고 웃고 싶은 기분이다. 세상에 이상 따위 있을 리 없다. 모두 초라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역시 먹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무미건조한 이야기다. ㅡ 다자이 오사무,『정의와 미소』, pp.184~185 X. “나는 적어도 본래적으로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오. 내 속에는 어떤 공허가, 어떤 무시무시한 사막이 있어요.” 마치 인간에게는 타락과 벌 사이의 절대적 선택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듯이. C의 친구. “우리는 우리가 스무 살 때 자기 가슴에 쏜 총알을 맞고 마흔 살에 죽을 것이다.” ㅡ 알베르 까뮈,『작가수첩2』, pp.258~307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열망들을 이루지 못한 채 몇십 년 동안이나 품고만 지냈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실패했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럴 때, 부정적 의미의 환멸로부터 구원이 필요하다. 우리가 환상과 더불어 열광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현실과 직면하지 않으려고 환상 속에 안주할 수도 있다. 나는 카뮈도 생각한다. 해방 후에 한때 우리는《콩바(Combat)》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다. 그는 모든 일에 성실했다.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어린아이들을 저렇게 고통받도록 내버려두는 하느님에게 나의 믿음을 바칠 수 없다.” 본질적으로 카뮈는 부정적 의미의 ‘환멸을 느낀 자’였다. 그것은 그에게 통찰력과 너그러운 마음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자신을 열광적인 환멸로 인도할 유일한 길인 희망을 끝내 찾지 못했다. 인간의 삶은 희망과 절망, 빛과 어두움이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샤를 보들레르가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쓴 비극적 외침이 생각난다. ‘나는 한밤중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숲속에서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여행자와 같아. 그런데 저 멀리서 불빛이 보인다. 아마도 산지기가 잠자리에 들려고 집으로 돌아가 촛불을 켠 것이리라. 이젠 살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게 되자 모든 게 간단해졌다. 그런데 잠시 후 산지기가 불을 꺼버린다. 나는 다시 길을 잃고 만다. 희망이라곤 없다.’ 이 편지는 내가 자주 떠올리곤 하는 다음의 시 구절과 더불어 끝이 난다. ‘악마가 여인숙 창문의 불을 모두 꺼버렸네.’ ㅡ 피에르 신부, 『단순한 기쁨』, pp.54~67 |
어디도 없어.
TAGS 일기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Trackback RSS : http://www.fallight.com/rss/trackback/2149
Trackback ATOM : http://www.fallight.com/atom/trackback/2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