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결론이 완벽한 근거와 증거를 통한 논리적인 추론 과정을 거쳐 갖게 된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있다. 실상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인상적인 주관에 의해 잠재적인 결론(특히 이 결론에는 善/惡의 구분이 핵심요소로 포함된다.)을 내린 채, 부분적이고 일면적인 근거와 증거로 헛점투성이의 결론을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뭐라고 쓰는지 졸려서. 무수히 늘어나는 머리카락과 함께 체력이 급감하는 느낌이다. 생각해보면 확실히 힘과 정력이 함께 쎌 수는 없는 것이다. 주유는 죽기 직전에 하늘이 제갈량과 자신을 동시대에 낳은 것을 원망했다. 힘과 정력이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유는 힘이 소진하는 순간에 깨달은 것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愛國도 하고, 山도 탔다. 銃도 쏘았는데, 아마 어딘가에 한 마리 傷한 새가 뒤집혀 있을런지도 모른다. 이런 날이면 언제나 한 국가의 사회 체제 내에서 관리, 혹은 구속 받고 있다는 사실에 자못 불쾌해진다. 그러나 개나리가 상당히 아름답게 피었다. 산과 들을 배경으로, 아무런 안배 없이, 언젠가 그 씨가 무작위로 바람에 날려 피어난 개나리. 개나리가 피기 전까지, 산과 들은 배경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불확실성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결론이 깨지는 것을 善이 惡에 굴복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아무리 정당한 반증이 나와도 그 결론을 폐기할 수 없는 것이다. 토론이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바보들이 자신이 보다 더 천치임을 보여주기 위해 무척 똑똑한 척하며 헛소리 경쟁을 하는 데 있다. 아마 오늘 MBC 100분 토론이 방영시간을 160분으로 연장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토론은 웃으라고 있지, 참여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뭔가를 아는 놈들은 언제나 닥친다. 오늘은 실컷 웃었으므로 나는 그 시간에 잠을 잘 것이다.
죽을 뻔한 고비를 몇 차례 넘기고, 시간이 지난 후 생각해보면 섬뜩해질 때가 있다.
과연 내가 그 당시 죽을 뻔한 고비를 정말 넘기긴 넘긴 건가? 내가 단지 생각만 하고 있는지, 실존하고 있는지 증명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큐비스트(Possible World). 땅콩의 죽음은, 고독을 추구하며 그렇게 살아간다고 자부했던 나 자신을 산산이 부숴놓았다. 그저 300원어치 마른 안개꽃이었다.
오늘은 김선자씨의 변신이야기를 60쪽 정도 읽었다. 변신은 죽음을 피하기 위한, 영생의 한 방편이다. 여자의 변신은 유죄다. 하지만 이영애의 변신은 무죄다. 미인은 영생이 허가되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근데 악자씨는 뭐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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