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인간들을 생각한다. 기독교의 하느님이 자신의 모습대로 지어내,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라 명령한 그들의 인생을 생각한다. (그들은 풀을 먹고 살도록 안배되었다, 창세기 1:27-31) 지상의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나약한 인간이 -- 그 어떤 동물이 스스로 서는 데 1년이나 걸리는가 -- 가진 삶의 목표는 그저 단순히 ① 생존과 ② 종족의 번성 정도가 아닐까. 그것이 우리 모두가 찾고자 열망하는, 진정한 삶의 의미란 것. 먹고 싸는 것과 섹스 따위가 존엄한 인간에게 부여된 지고지순한 존재의 의미란 말인가! 하고 화를 낼만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는다.
태초의 인간들은 맹수를 피해다니며, 주린 배를 채우고 번식을 위한 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이를 야만적이라고 폄하한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이런 야만성에 치장을 하고 누각을 덧댄 종족일 뿐이다. 뇌의 진화는 스스로를 소위 매트릭스의 세계 속에 가두도록 만들었다. 영원한 욕망의 근원은 이렇게 차단되어진 진정한 삶의 의미 때문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② 종족의 번성은 ① 생존을 전제로 한다. 불교의 스님과 가톨릭의 신부가 지켜야할 중요한 계율 가운데 하나가 바로 ② 종족의 번성을 금지한 것이다. 그들은 ② 종족의 번성을 금지하고, ① 생존을 우리가 견디어 내어야 할 고통이라고 표현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삶이라고 하는 지옥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천국을 꿈꾸는 건 지옥에 있는 이들 뿐이다. 비록 그것이 매트릭스 속의 환상일지라도. 이런 맥락에서, 종교는 아편임을 역설한 마르크스의 통찰은 눈부시다. ② 종족의 번성을 하지 않고, 고통의 시간을 충실히 보낸 후 죽음으로써 ① 생존을 하지 않는 순간,
다 이루어졌다. (요한복음 19:30)
안으로는 한 물건도 없고 밖으로는 구할 것이 없다. (조주록)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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