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29

2008/01/29 03:31 / My Life/Diary
몇 가지 생각을 하다 낮부터 잠에 들었다. 혹은 자기 위해 생각을 했다.

지극한 낙관은 지극한 비관 후에 온다. 비관과 낙관은 반의어 보다는 동의어에 가깝다. 나는 굉장한 낙관론에 빠져 있다. 현재 주류 사상과 체제는 삶과 죽음을 동등한 가치로 놓지 않는다. 삶은 보다 숭고한 것이며(순환논리의 결과로 삶은 보다 숭고해야 한다는 定言) 높은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죽음은, 체제 총생산성의 저하를 가져온다. 출산장려운동과 자살방지대책은 같은 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존재하지 않은 후의 존재하지 않음과 존재한 후의 존재하지 않음. 종교는 존재하지 않은 후의 안락을 부르짖으면서도 존재의 지속을 꾀한다. 순교자가 순교자로 불리는 건 아이러니 내지는 딜레마다.

차라리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건 어떨까. 차기 정부라면 특기인 불도저式으로 밀어 붙여도 되겠다. 교육에 있어 가장 먼저 불도저식으로 처리해야할 것은, 고등학교 전액 무상교육과 무료급식시행이 아닐까. 기러기 아빠를 걱정해주는 건 사치의 도를 넘은 미친짓이다. 아! 이것도 포스트-모더니즘?

요즘들어 스스로를 내려다 볼 때면 한 편의 블랙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삶은 運이다. 神이라해도 좋소.
어떻게든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꾀해진 탓이다.

배가 고프다.
어쨌든 무력하게 살아 있다.
나는 매일 끝 속에서 시작을 본다. Abraxas.

2008/01/29 03:31 2008/01/29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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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5

2008/01/25 05:14 / My Life/Diary
무엇이든 이해했다고 자부할 때가 가장 위험한 때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건방지고 자만 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완전한 이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뒤돌아보니 꼴값을 떨고 살아온 인생이었구나. 점점 편집증 환자가 되가는 건 아닐까.


편집증 명사
발음〔--쯩〕


이든지 조사
[조사] {받침 있는 체언이나 부사어 붙어어느 이 선택되어도 차이없는 이상을 나열함을 나타내는 보조사. ≒이든.




살아오다 동사
활용〔-와, -오니〕



어미
[어미]
1용언의 어간이나 어미 ‘-으시-’ 붙어 움직임이나 상태부정하거나 금지하려 쓰이는 연결 어미. ‘않다’, ‘못하다’, ‘말다따위뒤따른다. 2 상반되는 사실서로 대조적으로 나타내는 연결 어미.


어미
[어미] {동사 어간이나 어미 ‘-으시-’, ‘--’, ‘--’ 붙어해라할 자리쓰여, 어떤 사실긍정적으로 서술하거나 묻거나 명령하거나 제안하는 따위나타내는 종결 어미. 서술, 의문, 명령, 제안 따위두루 쓰인다.



명사, 의존명사
[명사][의존명사]{어미 ‘-쓰여어떤 일이 있었던 때로부터 지금까지의 동안나타내는 . 【<석보상절(1447)≫】



ㄴ지
[어미]{‘이다 어간, 받침 없는 형용사 어간, ‘’ 받침인 형용사 어간 또는 어미 ‘-으시-’ 붙어
1 막연한 의문있는 채로 절의 사실이나 판단과 관련시키는 쓰는 연결 어미. 2 해할 자리간접 인용절쓰여, 막연한 의문나타내는 종결 어미.
2008/01/25 05:14 2008/01/25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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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학의 순간들 
 

한국문학의 깃대종 기형도, 김소진의 요절

글 |이경철_랜덤하우스코리아 주간, 문학과문화를사랑하는모임 부이사장. 1955년생.

자연 환경의 보존이나 복원의 정도를 살필 수 있는 지표가 되는 동식물을 가리키는 ‘깃대종’이란 환경용어가 있다. 반딧불이가 어둠 속 나는 것을 보고 그 심심산간은 청정지역임을 알 수 있고, 하수구 같았던 하천에 붕어 따라 피라미가 돌아온 것을 보고 그 하천은 이제 자연의 강으로 정화됐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젊은 문단에도 한국문학의 청정도를 알리는 깃대종 같은 시인, 소설가들이 있다. 발원지의 청정도 그대로 흘러 지류의 혼탁을 걸러내며 장강(長江)을 이루게 하는 한국문학의 강심수(江心水)는 고금(古今)을 초월해 오늘 이 순간에도 어느 젊은 문인의 펜 속 깊숙이 흘러내리고 있을 것이다.

1989년 3월 7일 밤 서울 서대문 네거리 적십자병원 영안실. 그날 새벽 시내 한 심야극장에서 전혀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 기형도 시인의 빈소에 문인들이 모여들어 끼리끼리 젊은 시인의 요절을 분통해하며 애꿎은 술잔만 씹어마시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젊은 문인들의 조문이 늘어 밖에 휘장을 더 쳐가며 마시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조문객들 사이로 검은 양복 정장 차림의 풍채 좋은 한 사내가 나타났다. 순간 한 시인의 입에서 “기관원이닷!”하는 외마디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술에 취해가던 일단의 젊은 문인들이 그 사내에게 몰려들어 ‘여기가 어딘데 감히 들어왔냐’는 듯 험악하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퍼부어댔다.

달려가 보니 당하고 있던 그 사내는 다름 아닌 박상천 시인이었다. 당시 박 시인은 시인협회 일을 맞아 열심히 순수시단 활동을 펼치고 있어 문단에 두루 안목이 있을 텐데 ‘기관원’으로 오인돼 몰매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시인 아무개’라며 아무리 떼어놓고 말리려 해도 몰매질은 몇 분간 계속됐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한껏 상례(喪禮)를 갖춘 차림에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박 시인을 휘장 한쪽으로 안내, 상을 따로 마련해 분을 삭이게 했고 몰매질에 가담한 시인들도 한둘씩 자리로 와 사과하게 했다. 그렇게 술잔을 기울이다 자정 무렵 빈소 옆 호프집으로 옮겨 자리는 계속됐다.

그곳에서 또 사단은 벌어지고 말았다. 몰매질 했던 시인들의 사과에 어떤 비아냥이 들어있었던지 분을 잘 삭이고 있던 박 시인이 이번에는 술집 집기 아무 것이든 흉기로 들고 무섭게 그들을 몰아붙여 젊은 시인들은 뿔뿔이 도망치기에 바빴다. 다시 진정, 화해시켜 기형도 시인의 빈소에서의 난데없는 난투극은 그렇게 끝났다. 그 난투극이 내겐 1980년대 젊은 문단 풍경의 한 전형이요 그런 80년대 문단 종식의 한 상징으로 기억된다.

‘억압된 현실에 찍소리도 못하는 비겁자, 군사독재정권의 어용문인’, ‘어중이 떠중이 투쟁 목소리만 높이면 다 시인이냐’는 식으로 진보와 보수로 확연히 갈려 한 술집에 같이 있으면서도 서로 소 닭 보듯 하고 수틀리면 싸움박질로 이어졌다. 독재정권에 대한 비분강개와 좌절, 그런 현실에서도 문학의 문학성, 순수는 지켜내야 한다는 다짐과 현실적 좌절감. 그리하여 괴롭고 술로 풀고 싸움질로 풀던 젊은 문단 시대가 80년대였다.

중앙일보에 입사해 타계하기 전 몇 년간 문학담당 기자였던 기형도 시인은 직무상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며 문단 사람들과 어울려 그 양 진영 문인들이 조문을 와 난투극을 벌인 것이다. 촉망받는 신예 시인, 두루두루 문단과 잘 어울렸던 젊은 시인 기자의 요절에 대한 비감이 처절한 몸부림, 울부짖음으로 화해 1980년대 젊은 문단의 외면적 풍경이었던 반목의 장은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1주기를 맞은 1990년 3월 6일 밤 오래된 분수대가 있던 서울 혜화동 로터리 시문화회관. 젊은 시인 50여 명이 모여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이후 4년여의 짧은 문단생활 중 기형도 시인이 발표한 61편의 시를 모아 유고시집으로 펴낸 『입 속의 검은 잎』을 낭독하고 평가하는 그 조촐한 자리가 80년대 문단에서 90년대 문단으로 넘어가는 내면적 풍경이었음이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후 각인돼 왔다 .

그 모임을 주최한 단체는 기 시인도 참여했던 시동인 ‘시운동’. 광주민주화운동의 참화로 인해 시 쓰기 조차 부끄러웠던 80년도에 젊은 시인들이 모여 민중시의 격랑 속에서 시의 시성(詩性), 순수성을 힘겹게 지켜내고 있는 동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막내 격으로 기 시인이 들어와 우울하면서도 휘황찬란한 상상력과 언어로 ‘시운동’ 선배들을 뒤에서 떠밀며 순수시세계로 나아가다 요절했다.

그의 1주기를 맞아 그 말에 빚이라도 갚듯 추모 모임을 갖고 ‘시운동’ 시인들은 그 후 별다른 동인활동이 없었던 것 같다. ‘참여·진보의 진영 간, 문학·문화 장르 간 길트기’란 명분으로 몇몇 동인들은 돈과 명성을 좇아 소설로, 다른 문화 장르로 이동하며 90년대를 순수문학적인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상업문단으로 치닫게 하는데 일조했다는 지적도 면키 힘들게 됐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빈집」 전문)

죽음을 예감했음인지 기 시인은 밤, 겨울안개, 촛불, 흰 종이, 눈물, 열망 등 자신의 익숙한 시적 이미지들에 이별을 고한다. 처절하리만큼 냉혹한 자기성찰로 비인간적 산업사회에서 인간성의 깊이를 지켜내던 기 시인을 떠나보내고 90년대 젊은 시단은 문학적 양심의 가책도 없이 상업주의에 함몰돼 갔다.

기 시인의 죽음이 젊은 시단의 한 분수령이 됐다면 1997년 4월 22일 소설가 김소진 씨의 34세의 갑작스런 죽음은 젊은 소설계의 한 분수령이 된 상징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온 김 씨는 죽기 한 해 전 잘 다니던 한계레신문 기자직마저 팽개치고 소설에만 전념, 가장 주목받은 작가로 떠오르며 그해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도 수상했다.
스스로도 전업작가로 돌아서길 잘했다며 한 해 세 권의 소설집을 펴낼 정도로 창작욕에 불타오르던 김씨는 이듬해 초 췌장암으로 손 한 번 제대로 못써보고 “형, 먼저 가서 미안해”라는 말만 남기고 숨을 넘기고 말았다. 김 씨를 96년도 가장 주목받은 작가로 선정, 기사도 다루고 본격소설의 위의를 지켜달라고 격려했던 나 역시 그의 죽음이 쓰렸지만 내심 아프고 당혹스러웠을 사람들은 김 씨보다 앞서 전업의 길을 택한 작가들이었을 것이다.

민주화도 눈에 띨 정도로 진척되고 경제도 95년 1만 불 시대로 나아가던 1990대에 접어들자 신예작가들이 ‘이제 글만 써도 먹고 살 수 있겠구나’ 하는 판단에 직장도 팽개치고 하나 둘씩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고 김 씨 또한 그러했다. 본격소설의 위엄을 지키며 한국소설의 대들보로 떠오르던 김 씨는 선배 전업작가의 창작욕을 부추겼을 뿐 아니라 돈 등에 딴눈 팔지 말고 본격소설을 지키게 하는 하나의 항체로 작용했을 것이다.

김 씨의 요절 직후 IMF 외환위기를 맞아 경제가 거덜 나 많은 잡지, 사보 등이 폐간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일간지들의 연재소설 지면과 문예지의 페이지도 줄어들고 원고료도 인하돼 고료수입도 거덜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뒤에서 본격문학의 양심으로 무섭게 추동해대던 김 씨마저 죽고 없는 젊은 전업소설계는 상업화의 유혹을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요절한 예술가들은 그들의 삶이 신화화되거나 작품이 과대평가 되는 경향도 있다. 긴 생애에 변질될 수도 있는 첫 마음 그대로의 삶과 예술을 불꽃처럼 살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하면 신화화나 과대평가는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기형도, 김소진의 요절은 거기에 더해 한국문학 창작 현장을 강심수로 흘러내리며 젊은 문학의 위의를 지키게 한 문학사적 위상까지 갖는다.


 

2008/01/22 05:08 2008/01/22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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