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 읽기

2004/09/11 04:54 / My Life/Diary
《행복한 책 읽기》(1996, 문학과지성사) 를 읽다.

ㆍ김현 지음


「 삶에 있어서 절실한 것, 절절한 것은 거의 대부분 환상처럼 보인다. 그것이 환상처럼 보이는 것은 그것이 삶의 밋밋함과 대립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절실한 것이 이뤄지는 순간은 너무나 짧고 아름답기 때문에 밋밋한 삶 속에서 지속되기 힘들다, 아니 지속되지 못한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환상의 빛과도 같다. (p.81) 」

「 내 존재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잊음 oubli이다. 나는 잊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잊음이다. 내 활력은 잊음에서 나온다. 모든 존재가 들어가 웅크리고 있는 알집과 같은, 거푸집과 같은 구멍으로서의 잊음. (p.128) 」

「 (기형도) 시를 쓰면, 밤 열두시에도 친구 집에 전화를 걸어 그것을 읽어준 모양, 정리벽이 있다. 하나도 안 버리고, 모든 것을 보관하고 정리한다. 과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의 시는 비교적 사실에 충실하다. 석유 냄새나는 누이는 신문 배달을 하는 누이라는 뜻이다. 신문에서 나는 석유 냄새, 다시 말해 잉크 냄새. 대중가요를 위한 가사가 두 편 있다. 심수봉에게 갔던 가사인 모양이다. 유행가를 잘 부른 모양. 우리들 앞에서는 명곡들만 불렀는데 친구들과는 그렇지 않았다. 시를 발표한 뒤에는 자기 시에 대해 언급한 비평가들에게 전화를 하는 꼼꼼함도 보여준 모양이다. "죽기 일주일 전에 몸살을 앓았는데 그것이 신호였던 모양이예요"(박해현). 그러나 어떻든 한 젊은 시인은 죽었고 우리는 살아 남아 그를 이야기한다. 죽음만이 어떤 사실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해도 괜찮게 만들어준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 (p.230-231) 」

「 이제는 갈수록 긴 책들이 싫어진다. 짧고 맛있는 그런 책들이 마음을 끈다. 두껍기만 하고 읽고 나도 무엇을 읽었는지 분명하지 않은 책들을 읽다가 맛좋은 짧은 책들을 발견하면 기쁘다. (p.234) 」


새벽에 형광등 밑에서 거울을 본다 수척하다 나는 놀란다
얼른 침대로 되돌아와 다시 눕는다
거울 속의 얼굴이 점점 더 커진다
두 배, 세 배, 방이 얼굴로 가득하다
나갈 길이 없다
일어날 수도 없고, 누워 있을 수도 없다
결사적으로 소리지른다 겨우 깨난다
아, 살아 있다.
(p.282)



2004.09.11
2004/09/11 04:54 2004/09/11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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