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기행4] 오이디푸스, 운명(Moira)와 미덕(Arete)사이에서
번호 212010 글쓴이 류가미(ryugami) 조회 3858 등록일 2006-12-29 08:32 추천374 톡톡2

오이디푸스, 운명(Moira)와 미덕(Arete) 사이에서

 

 

 

안녕하세요. 류가미입니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있습니다. 날씨가 추우니까 마음까지 움츠러듭니다. 더군다나 댓글 붙는 것 보면 시베리아에 혼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몇몇 댓글에는 답변을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잘못하면 연재글이 너무 개인적인 푸념으로 바뀔까 싶어 참았습니다. 원래 푸념이라는 것은 한번 늘어놓으면 굽이굽이 아홉 곡절이거든요.

어쨌든 저는 이번 연재가 독자들과 의사소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갑자기 댓글 다는 것이 어색하더라도 반응이 없어 뻘줌해하는 절 생각해 댓글 달아주세요.

이번 시간에는 지난 번 시간에 이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오이디푸스 왕의 미토스(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소포클레스가 자신의 희곡에서 오이디푸스 왕의 미토스를 어떻게 배치했는지 살펴볼까 합니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의 왕궁에서 시작됩니다.

▲ 1958년 하르케 극장(Hartke Theatre)에서 공연된 오이디푸스 왕 http://drama.cua.edu/HartkeSeason/Archive%20Photos/images/oedipus%20rex%201958_jpg.jpg 

1. 테베의 시민들이 테베 왕궁으로 찾아와 오이디푸스에게 전염병을 해결해달라는 탄원을 합니다.

2. 그때 전염병의 원인을 물으러 간 크레온(이오카스테의 오빠)이 테베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크레온은 오이디푸스 왕에게 역병을 없애려면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추방하라는 신탁의 내용을 전합니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이제껏 찾지 못했는가하고 의아해하고, 크레온은 당시 스핑크스의 혼란 때문에 제대로 살해자를 찾지 못했노라고 답변합니다. 그러자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던 자신이 이 문제도 풀겠다고 장담합니다.

3.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찾기 위해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부릅니다. 오이디푸스는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라이오스의 살해자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늙은 예언자는 좀처럼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오이디푸스가 집요하게 추궁하자 예언자는 라이오스를 죽인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오이디푸스는 크레온과 테이레시아스가 공모해 음모를 꾸민 것이라 의심하고 분노합니다.

4. 바로 그때 이오카스테가 등장해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살해자가 아니라고 안심시킵니다. 그녀는 먼 옛날 라이오스가 자신이 아들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그녀가 낳은 아들을 버렸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라이오스의 버려진 그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입니다.

5.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가 아이를 버리라고 시킨 양치기를 찾으라고 명령합니다.

6. 그때 오이디푸스에게 코린스에서 전령이 찾아옵니다. 그 전령은 코린스의 폴리보스 왕(오이디푸스를 길러준 아버지)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 전령이 바로 테베의 양치기에게서 버려진 오이디푸스를 받아 폴리보스 왕에게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전령은 오이디푸스가 폴리보스의 왕의 친아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7. 그때 오이디푸스의 부하들이 라이오스의 명령을 받았던 양치기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양치기가 라이오스 왕의 부탁을 받고 어린 오이디푸스를 죽이려다가 죽이지 못하고 다른 양치기(다시 말해, 코린스에서 온 전령)에게 넘겨주었다고 말합니다.

8. 모든 것이 밝혀지자,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살을 합니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됩니다.

9. 오이디푸스는 크레온에게 라이오스의 살해자인 자신을 추방시켜 달라고 부탁합니다.

▲ 소포클레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소크라테스 http://faculty.maxwell.syr.edu/gaddis/HST210/Oct9/Socrates%20Bust.jpg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 궁전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한 나절 동안의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한나절 동안에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 2대에 걸친 사연들이 모두 압축되어 있습니다.

드라마투르기(희곡 작법)는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은 주제에 따라 재구성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드라마투르기는 플롯을 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2500년이 지난 지금 봐도 대단한 드라마트루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 작가라도 오이디푸스 왕의 신화에서 이만큼의 플롯을 짜내기는 힘들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시학’의 제7장에서 어떻게 비극의 플롯을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작가의 의도대로 이야기를 재배치하는 플롯이야 말로 비극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합니다. 그는 비극의 플롯은 발단과 전개와 결말의 구조를 가져야 하며 이 과정이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야 재현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박진감을 높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훗날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고전주의 비평가들과 극작가에게 영향을 주어 삼일치 법칙(tree unites)으로 정립됩니다. 삼일치 법칙에 따르면 희곡은 하루 동안, 한 가지 장소에서 한 가지 플롯만을 다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러한 삼일치 법칙은 어색하기 그지없습니다. 사실 이러한 삼일치 법칙은 고전주의가 유행했던 17세기 프랑스나 이탈리아 연극에서나 지켜졌을 뿐입니다. 18세기 극작가였던 셰익스피어만 해도 이러한 삼일치 법칙은 가볍게 무시합니다. 삼일치 법칙에 대해서는 17세기 고전주의를 다룰 때 자세히 하기로 하고 이제 다시 오이디푸스 왕으로 돌아가 봅시다.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 동안 공연되었던 비극이 다루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승과 몰락의 주기입니다. 봄에 싹이 텄다가 겨울에 이우는 한해살이 식물처럼 인간들도 그 상승과 몰락의 주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피할 수없는 주기를 우리는 흔히 운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 요즘 말로 하면 인간의 자아는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몰락과 소멸에 저항합니다. 정신분석학자 융은 ‘심리학과 연금술’이라는 책에서 운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운명이라는 것은 악마적인 의지를 말한다. 꼭 운명이 내(ego) 의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운명이 자아와 맞설 때면 사람들은 운명 속에 담긴 신성하거나 혹은 악의에 찬 힘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 운명에 굴복할 때 운명은 신의 뜻이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운명과 희망 없는 지긋지긋한 싸움을 벌인다. 그럴 때 우리는 운명 안에서 악마를 본다.

사실 고대 그리스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는 신의 뜻 다시 말해 운명을 거스르는 오만함(Habris)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 동안 공연되었던 수많은 비극들 중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이 작품이 결국 질 수밖에 없는 운명과의 싸움을 벌이는 인간의 의지와 미덕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미덕(arete)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자질을 뜻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탁월한 장점을 이용해 운명에 굴종하지 않고 삶을 개척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는 신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용서할 수 없는 죄지만 동시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미덕(arete)입니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 자신의 탁월한 장점으로 삶을 개척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운명의 각본 속에 빠져들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탁월함 자체가 그의 운명을 이루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스핑크스와 맞서서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의 탁월한 자질이 그를 파멸로 몰아갑니다. 만일 오이디푸스가 의문의 핵심까지 파고들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도 풀지 못했을 것이고 동시에 그렇게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갈 출생의 비밀을 캐려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에게 ‘바로 당신의 미덕(arete)이 당신에게 재앙을 가져온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 소크라테스에 대한 기록을 남긴 플라톤 http://www.mala.bc.ca/~mcneil/jpg/plato.jpg  

디오니소스 축제 때, 사람들은 비극을 보면서 인간의 미덕으로도 어쩔 수 없는 저 커다란 운명의 힘에 순종할 것을 배웁니다. 그러나 소포클레스(BC494~BC406)와 거의 동시대에 아테네에 살았던 소크라테스(BC469~BC 399)는 이러한 운명주의적인 시각을 거부합니다. 그에게는 운명보다 미덕이 더 중요하고 신보다는 인간의 영혼(psyche)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소포클레스에 비해서 세속적인 복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소포클레스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페르시아와 맞서 승리했던 페리클레스 시대에 전성기를 보냈다면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도시들이 서로 다투던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대에 전성기를 살았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아버지가 부유한 무기 상인이었다면 소크라테스의 어머니는 아이 낳는 것을 도와주는 산파였습니다.

소포클레스가 빼어난 미남으로 배우로서 인기를 끌었다면 소크라테스는 당대에 가장 못생긴 추남 중에 하나로 손꼽혔습니다. 소포클레스와 소크라테스가 가장 극명하게 차이 나는 점은 소포클레스가 아테네의 민주주의 아버지 페리클레스 밑에서 공직을 맡았다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불경죄로 기소되어 독약을 먹고 죽었다는 것일 겁니다.

죽을 때까지 소크라테스는 책을 쓴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그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들입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주변인물들의 기록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기록들 가운데 누구의 것을 얼마만큼 믿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를 만든 것은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생전에 30편에 이르는 책을 썼는데, 그 책들은 단 한편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사람들이 묻고 답을 하는 희곡 형식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그의 희곡 형식의 글들은 대화편(對話篇, dialogues)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플라톤의 대화편의 주인공은 바로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서의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고 어디까지가 플라톤 자신의 이야기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을 구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어쨌거나 플라톤의 철학을 요약하는 키워드는 아레테(arete), 프시케(psyche) 그리고 이데아(idea)입니다. 아레테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한 사람이 가진 탁월한 자질, 미덕을 말합니다. 프시케는 흔히 영혼으로 번역되는데 요즘말로 하면 자아(ego)라는 말에 더 가깝습니다. 이데아는 만물의 원형이 되는 관념적 실재입니다.

플라톤은 육체(소마)와 영혼(프시케)을 나누고 육체보다 영혼에 더 강조점을 찍습니다. 그리고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을 더 확장해, 육체적인 감각에 의해 지각(知覺)되는 현상세계와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이데아의 세계를 분리시킵니다. 그에게 있어서 육체를 통해 감각되어지는 세계는 진짜 세계가 아닙니다. 그에 따르면 참된 세계는 이성으로만 파악되는 이데아의 세계입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탁월함이 바로 인간의 이성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인간의 미덕은 곧 인간의 이성을 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인간의 미덕은 이성을 발휘해서 감각이 주는 착오에서 벗어나 이데아의 세계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인간의 이성을 신적인 원리(Logos)와 동일시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은 신적인 원리이자 동시에 인간적인 미덕이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플라톤은 인간(arete)의 미덕과 신성(Logos)을 대치시키지 않습니다.

반면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의 말년을 그린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에 순종하며 대지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소포클레스는 인간과 신의 화해는 인간이 자신의 미덕을 버리고 신의 의지를 쫓을 때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미덕과 신의 의지를 대치시킵니다.

어쩌면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플라톤이 레반트에서 전래되어온 도취와 망아를 강조하는 디오니소스교를 싫어하고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에 상영되는 비극을 비판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국가’에서 비극을 쓰는 시인들을 국가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펼칩니다. 아테네에서 추방이라는 오늘날에 정치적 망명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이 비극을 쓰는 시인을 추방하라고 한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자 다음 시간에는 왜 플라톤이 시인 추방론을 펼쳤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까 합니다.



ⓒ 류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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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30 04:20 2007/06/30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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