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혈(喀血)

2002/02/26 22:43 / My Life/Diary
객혈(喀血)을 하다. 화장지 열댓장을 흠뻑 적실 정도의 양이었으나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 야간진료 병원의 말린 멸치 같은 젊은 의사는 엑스-레이에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고, 예의 그렇듯 환자의 걱정만 늘리는 헛소리를 뱉어냈다. " 원칙상 입원입니다만, 내시경 검사를 해야하는데 이 병원엔 장치가 없습니다. 다시 객혈할 경우 기도가 막혀 위험할 수도 있으니 일주일간 입원을 권고합니다. " -숫자 계산 속에 우리는 멈칫했고, 그러자- " 아니면 주사를 맞고 내일 큰 병원으로 가시던지요. " 의사는 건성으로 말했고, 주사실의 간호사는 반말을 쏘아대며 벗겨진 엉덩이를 후려쳤다. 내가 주사를 맞고 나온건 의사가 9시 뉴스를 보러 대기실로 사라진 후였다.

병원 앞 약국의 약제조사는 " 야간진료 담당의(醫)는 의사로 볼 수 없지… 갑자기 그런 것이라면 신경과민과 과로로 인해 생겼던 코피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 기도에 쌓였던 것이야… " 라며 놀라운 추리력을 발휘했지만 전화번호와 호수를 헷갈려했다. 검은 챙모자를 쓰고 나온 어머니는 치료비 걱정에 어두웠고, 까만 바탕 속 하늘의 보름달은 노랗게 밝았다.

집에 돌아와 3일간의 휴가를 내고 뒷수습을 끝내자 역사드라마 상도의 방영에 앞서 CF가 흘러가고 있었다. 더 이상의 객혈은 없었으며 가슴도 아프지 않았고 몸은 나른했지만 정신은 평온했다. 모든 것이 지난주와 같았다.


2002.02.26
2002/02/26 22:43 2002/02/26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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