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기행2] 문학과 예술의 기원을 찾아서
번호 201377 글쓴이 류가미(ryugami) 조회 3804 등록일 2006-12-15 14:57 추천413 톡톡1

기원을 찾아서



▲ 삶과 죽음의 사이클을 나타내는 곡물신 중 하나였던 디오니소스.http://depthome.brooklyn.cuny.edu/ classics/dunkle/tragedy/dionysa.gif 

안녕하세요. 류가미입니다. 한 주일 동안, 별일 없이 잘 보내셨는지요? 오늘 약속대로 문학과 예술의 근원을 찾아 여행을 떠나볼까 합니다. 자 이제 마음속에 한 가지 질문을 떠올려 보세요. 문학과 예술은 과연 어디에서 시작했을까? 독자 여러분들은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내놓으셨나요?

독자 여러분이 어떤 답변을 내놓았건, 여러분의 답변은 다음 세 개의 범주 안에 속할 것입니다. 세 개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답변이 있다면 댓글에 올려주세요. 어쩌면 새로운 문예 이론이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문학과 예술의 기원이 무엇이냐를 두고 비평가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쳤지만 그들의 주장은 크게 묶어보면 다음 세 가지 범주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심리학적 기원설입니다.

이 학설은 인간이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특별한 목적 때문이 아니라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내적 욕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학설은 예술과 문학의 기원을 인간의 본능적인 창조 심리, 즉 예술 충동(art impulse)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 충동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이 학설을 지지하는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모방본능설, 유희본능설, 흡인본능설, 자기표현본능설 등으로 의견이 갈라집니다.

모방본능설은 외부의 사물을 모방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예술의 기원이 되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유희본능설은 문학과 예술이 유희 본능에서 출발했다는 입장입니다. 흡입본능설은 문학과 예술이 남을 즐겁게 해주어서 그들을 끌어들이려는 흡인본능에서 출발했다는 입장입니다. 다시 말해, 새들이 노래 소리로 짝을 불러들이듯 인간들도 다른 이들을 즐겁게 할만한 행위를 통해 다른 이들을 끌어들인다는 겁니다. 자기표현 본능설은 예술과 문학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려는 본능에서 시작되었다는 이론입니다.

두 번째는 사회학적 기원설입니다.

이 학설은 문학과 예술이 심미적이고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 생활과의 깊은 연관 속에서, 즉 사회적 필요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학설을 지지하는 비평가들은 문학과 예술이 사회적 결속과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발생했다고 봅니다. 모내기 할 때 부르는 노동요처럼 문학과 예술은 사람들에게 노동하려는 의욕을 자극하고 사람들 사이의 협동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제의적 기원설입니다.

제의적 기원설은 문학과 예술의 기원을 고대의 종교적인 제의에서 찾을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고대 종교적 제의에서는 시와 춤과 노래가 한데 어우러진 원시적인 가무가 행해졌는데 그 원시적인 가무에서 문학과 예술이 발생했다는 이론입니다. 고대 제의에서 행해진 원시적인 가무를 발라드 댄스(Ballad Dance)라고 합니다. 발라드 댄스는 원래 미분화된 원시종합예술 형태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원시적인 가무 속에 들어 있던 언어는 문학으로 소리는 음악으로 몸짓은 무용과 연근으로 분화되었다는 것이지요.

비평가들은 문학과 예술의 기원을 이처럼 크게 세 가지 학설로 구별하지만, 저는 이 세 학설이 그 중 하나만 옳고 나머지는 틀린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고대의 문학과 예술은 인간의 예술 충동을 표현한 것인 동시에 집단의 노동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독하게도 제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문학과 예술의 기원은 어디일까라는 질문에 대답을 내리기 전에, 잠시 여기서 고대 그리스에서 벌어졌던 디오니소스 축제에 대해서 알아볼까 합니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말 그대로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드리는 제의였습니다. 디오니소스는 원래 신이 아니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모든 신의 아버지인 제우스와 테베의 왕녀 세멜레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세멜레를 질투한 헤라의 농간으로, 세멜레는 제우스가 떨어뜨린 번개에 맞고 죽게 됩니다. 그때 세멜레는 임신을 하고 있었는데, 제우스는 아기를 살리기 위해 세멜레의 뱃속에서 아기를 꺼내 자기 허벅다리에 넣습니다.

아기는 아버지의 허벅다리 속에서 남은 달을 다 채운 뒤에 세상에 태어났지요. 출생 후 그는 뉘사 산의 동굴에서 요정이 가져다주는 소젖을 먹고 자라게 됩니다. 그러다가 거인들에게 사로잡혀 온 몸이 찢기는 불행을 당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제우스의 어머니인 레아의 도움으로 그는 찢긴 몸을 회복하고 다시 부활합니다. 부활한 디오니소스는 신으로 인정받아, 올림포스 산에 사는 열두 신의 반열에 오르게 되지요.

신화를 보면 알 수 있듯, 디오니소스 신은 온몸이 찢긴 채 살해되어, 이듬해 공동체의 먹거리로 부활하는 곡물신의 계보에 속하는 신입니다. 디오니소스에게는 디튜람보스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훗날 디튜람보스는 디오니소스신 뿐만 아니라, 그에게 바치는 찬가를 일컫는 말이 됩니다.

디튜람보스는 두 개의 문을 거친 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의역하자면, 두 번 자궁 문을 열고 나온 자라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 이 말은 처음에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오고 나중에는 아버지의 허벅지(자궁)에서 나온 디오니소스를 가리킵니다.

삼한시대 제천 의식인 영고와 동맹과 무천이 쌀의 파종(5월)과 추수(10월)와 관련이 있듯이, 디오니소스 축제는 밀의 파종과 수확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 같은 지중해성 기후에서는 주로 겨울밀을 키우는데, 겨울밀은 11~12월 사이에 파종해 3~4월 사이에 추수합니다. 다시 말해, 디오니소스 축제는 농사물의 풍작과 다산을 기원하는 제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 국가 아테네는 농사를 짓는 시골과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도시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디오니소스 축제가 시작된 것은 농사를 짓는 시골 마을에서부터였습니다. 시골에서 벌어지는 디오니소스 축제를 디오니소스 소축제 혹은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라고 합니다. 반면 아테네의 시가지에서 벌어지는 디오니소스 축제를 디오니소스 대축제 혹은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라고 합니다.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 당시, 합창과 연극 경연대회가 벌어졌던 디오니소스 극장.http://www.utexas.edu/courses/introtogreece/lect14/jDionysusTheater0411060500.jpg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는 그리스 달력으로 포세이돈 월에 행해졌습니다. 포세이돈 월(the month of Poseidon)은 현재 달력으로 11~12월에 해당됩니다. 대략 겨울밀의 파종시기와 일치합니다. 반면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엘라페볼리온 월(the month of Elaphebolion)에 벌여졌습니다. 이 또한 대략 겨울밀의 추수 시기와 일치합니다.

12월에 행해진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는 남근 모양의 조각상을 든 여자들의 행렬로 시작됩니다. 이 남근상을 든 여자들 뒤로 바구니를 든 어린 소녀들과 길고 커다란 빵을 든 사람 그리고 다른 봉헌물을 든 사람과 물단지를 든 사람과 포도주 단지를 든 사람들이 잇따릅니다. 이런 행렬이 끝난 후에는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합창과 연극 경연대회가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는 훗날 벌어지는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의 원형이 됩니다.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기원전 6세기 경, 도시국가 아테네의 참주였던 페이스시트라토스에 의해서 국가적인 행사로서 그 형태가 갖추어집니다.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와 달리, 국가적 행사였습니다. 사실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아테네 시민들의 단결과 도시 국가 아네테와 지중해 연안에 있는 아테네 식민도시의 결속을 다지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자국민의 단결과 다른 국가와 친선을 다지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행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의 준비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를 주관하는 것은 최고 집행관인 아르콘(Arcon)이었습니다. 도시국가 아테네에는 열명의 최고 집행관이 있었는데, 축제를 담당하는 최고 집행관은 행사를 돕는 두 명의 보좌관과 열명의 감독관에 의해 선출되었습니다.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총 5일에 걸쳐서 펼쳐졌습니다.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첫째 날 아고라에 있는 디오니소스 신전에서 디오니소스신의 나무조각상을 내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디오니소스 상을 든 사제들 뒤로 아테네 시민들과 아테네에 거주하는 외국인, 그리고 아테네의 식민도시에서 온 대표들이 뒤따랐습니다.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와 마찬가지로 이 행렬에는 나무 혹은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남근상을 실은 수레뿐만 아니라 바구니를 든 소녀, 물병과 포도주병을 든 사람들도 뒤따랐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아테네가 최전성기를 맞이한 5세기 중엽에는 아테네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무기들과 각국에서 보내온 축하 선물들이 이 행렬 대열에 참여했습니다.

디오니소스 상을 든 행렬은 시가지에 있는 다른 신들의 사원을 돌아다닌 후, 디오니소스 극장 앞으로 갑니다. 디오니소스 극장 앞에는 제단이 설치되어있었습니다. 행렬이 제단 앞에 도착하면, 디오니소스신의 가면을 쓴 제사장이 황소를 희생 제물로 바칩니다. 희생 제의가 끝난 후에는 디튜람보스 합창 경연 대회가 열렸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디튜람보스는 디오니소스 신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에 대한 찬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디튜람보스를 부르는 합창단(코러스)을 후원하는 사람들은 아테네에서 가장 부유하고 힘있는 유지들이었습니다.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없는 사람이 50명이 넘는 합창단을 후원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후원자들의 자존심이 걸려있었기 때문에 이 디튜람보스 합창 경연대회는 매우 경쟁적이었다고 합니다.

합창 경연대회가 끝나면 다시 황소를 제물로 바치는 희생 제의가 치러졌고 그 후에는 모든 아테네 시민들이 즐기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이 때 술 취한 사람들이 행렬을 이루어 아테네 시가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이 행렬을 코모스(Komos)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도시 디오니스소스 축제의 첫날이 끝납니다.

축제의 두 번째 날부터는 비극, 희극, 사튀로스극의 경연대회가 벌어집니다. 이 연극 경연 대회의 심사위원들은 제비를 통해 뽑았습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디오니소스 극장 제단에서는 어린 돼지가 희생물로 바쳐졌습니다. 두 번째 날에는 5편의 희극이 공연되었고 셋째날, 네쨋날, 다섯째날에는 매일 비극 3편과 사튀로스극 1편이 공연되었습니다. 사튀로스는 디오니소스를 따라다니는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양인 반인반수를 말합니다. 사튀로스극은 이러한 사튀로스를 흉내내는 짧고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말합니다.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와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벌어지는 합창과 연극들은 모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디오니소스 신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왜 아테네 사람들은 해마다 합창과 연극 경연대회를 열어, 디오니소스의 삶과 죽음을 모방하고 싶어했을까요? 죽음과 삶이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표현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본능적인 충동이었기 때문일까요?

또한 디오니소스 축제는 사람들을 독려해 농업 생산성을 높이려는 파종제와 추수제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더불어 아테네 시민의 단결이라는 사회적인 목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디오니소스 신에 대한 제의였습니다. 축제 동안 벌어지는 합창과 연극은 원시종합예술인 발라드 댄스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저는 문학과 예술의 기원은 어디일까라는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볼까 합니다. 예술의 기원은 표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내적 충동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아니면 노동 생산성을 높이고 사회적 결속을 다지기 위한 사회적 목적에서 시작되었을까요? 또 아니면 고대에 신에게 지내던 제의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인간의 내면 심리와, 그들이 모듬살이하는 사회, 그리고 그들이 믿는 종교는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음주에는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 때, 비극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한,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평안한 한주가 되시길.....



ⓒ 류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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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30 07:27 2007/06/30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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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기행3] 그리스 비극, 산양의 노래
번호 204285 글쓴이 류가미(ryugami) 조회 2603 등록일 2006-12-20 16:45 추천387 톡톡1

그리스 비극, 산양의 노래

 

 

안녕하세요. 류가미입니다. 세월이 빨라, 벌써 올해의 마지막달 12월이 되었군요. 봄에 꽃피고 여름에 무르익다가 가을에 결실을 맺고 겨울에 사라져가는 한 해의 주기가 또 이렇게 끝나가고 있습니다.

저 정도의 나이가 되면, 인생에도 이러한 주기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식물들의 한해살이처럼 나도 이런 삶과 죽음의 주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나 역시 모든 인간들처럼 정해진 운명을 따라 예정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셈이지요. 자신이 정해진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 자신이 언젠가 죽게 될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일은 공포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공포스러운 운명 앞에서 나약하기 그지없는 자신과 타자의 존재에 대한 연민을 느낍니다. 사실 그리스 비극이 담고 있는 것도 이러한 공포와 연민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입니다.

지난 시간에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디오니소스의 찬가와 비극, 희극, 사티로스극 경연대회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디오니소스의 찬가는 디튜람보스라고 합니다. 사티로스극은 산양의 뿔과 당나귀의 귀와 꼬리를 단 배우들이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반인반수(半人半獸) 사티로스(Satyros)와 실레노스(Silenos)를 연기하는 짧은 소극이었습니다.

그럼 희극은 뭘까요? 희극은 그리스어로 코모이디아(Komoidia)라고 합니다. 바로 이 말에서 코미디라는 말이 파생되어 나왔지요. 코모이디아(Komodia)는 코모스(Komos)와 오이데(oide)이라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oide라는 단어는 노래를 뜻합니다. 또 코모스는 디오니소스 축제 첫날, 합창 경연대회가 끝난 후, 술 취한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행렬을 말합니다. 이때 술 취한 사람들은 남근상을 들고 행렬을 했습니다. 그리고 남근에 관련된 노래를 불렀지요. 다시 말해 코모이디아는 코모스 행렬이 부른 음탕하고 짓궂고 우스꽝스러운 남근에 관한 노래입니다. 바로 이 노래에서 희극이 발생한 것이지요.

반면, 비극은 그리스어로 트라고디아(tragodia)라고 합니다. 트라고디아는 트라고스(Tragos)와 오이데(oide)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 입니다. 오이데는 알다시피, 노래를 뜻합니다. 그럼 트라고스는 무엇을 뜻할까요? 트라고스는 산양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트라고디아는 산양의 노래라는 뜻이 됩니다.

왜 그럼 비극에 산양의 노래라는 이름이 붙여졌을까요? 대체 여기서 산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 사튀로스극에서 사용되었던 실레노스 가면 http://www.cnr.edu/home/bmcmanus/mask1a.gif 

독수리가 제우스, 부엉이가 아테네를 상징하는 동물이듯, 산양은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듯이, 디오니소스는 곡물신의 계보를 잇는 신입니다. 모든 곡물신들은 겨울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공동체의 먹거리로 부활합니다. 11~12월이 있었던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와 3~4 월에 있었던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가 겨울밀의 파종과 추수와 관련있다는 사실은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산양은 점성학에서 12월 23일 동지 때부터 시작되는 염소자리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산양은 풍요와 번영을 보장하는 태양이 일년 중 가장 약해졌을 시기를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대지가 황폐해지고 곡물신이 몸이 찢긴 채, 대지에 매장되는 시기를 말합니다.

실제로 산양은 험준한 바위산에 살며 끝없이 높은 곳에 오르려는 성향이 있다고 합니다. 산에 올라보았자, 먹잇감 찾기는 점점 힘든데도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높은 곳에 오르려는 산양의 본성은 그들의 생존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산양은 인간과 많이 비슷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꼭 생존에 필요한 것도 아닌데, 높은 곳에 오르려는 충동이 있습니다. 세속적으로 인간은 더 높은 지위를 원하고 더 높은 명성을 원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간이 도달하려는 것은 세속적인 차원을 넘어선 저 무엇입니다.

세속적인 차원에서 높이 오르려는 추구는 결국 어떤 형식으로든지 몰락으로 종결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높이 올라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해진 운명에 따라 예정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높이 오르려는 인간의 충동은 이러한 인간적 한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그 무엇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더 높이 오르자는 인간의 추구는 종교적인 성향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산양이 바위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고 합니다. 산양의 행동은 오르기 위해서 내려가고 얻기 위해서 버리는 묘한 역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인간의 모든 종교는 우리에게 이같은 역설을 가르칩니다. 초월적인 신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선 개인의 야심과 자만심을 희생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어쨌거나 그래서인지 산양은 더 높은 곳에 오르고 싶다는 충동과 더불어 자기보다 더 상위에 있는 존재를 발견하고 그 아래 무릎 꿇는 겸손을 상징합니다.

자, 다시 이야기의 원점으로 돌아가 보죠. 산양의 노래 다시 말해, 비극은 더 높이 오르자는 인간의 의지와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보다 더 높은 원리에 굴복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담은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비극은 상승과 몰락 그리고 그 이후에 찾아오는 영적인 자각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연대회는 비극 경연대회였습니다. 이 비극 경연대회를 통해서 많은 재능 있는 비극 작가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작가라고 불리는 아이스킬로스(BC 525~BC 456), 소포클레스(BC 496~BC 406), 에우리피데스(BC 484?~ BC 406?)입니다.

비극경연대회에서 아이스킬로스는 13번 정도 우승했고 소포클레스는 24번 우승했고 에우리피데스는 5번 우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그리스 고전 시대라고 불리는 아테네의 최전성기에 살았던 동시대 사람이었습니다. 아이킬로스는 소포클레스의 스승이었고 에우리피데스는 소포클레스의 후배였습니다.

이 세 사람들의 작품을 모두 훌륭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저서, ‘시학’에서 언급했듯 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비극작가는 소포클레스였습니다. 소포클레스는 이래저래 복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테네가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번성하던 시절 아테네 근교 콜로누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무기 상인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그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죠. 그에게 비극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 바로 아이스킬로스였습니다.

▲ 소포클레스 http://www.christusrex.org/www1/vaticano/GP-Sophokles.jpg 

소포클레스는 처음에는 비극 작가가 아니라 배우로서 활동했다고 합니다. 잘 생긴 외모와 노래 솜씨 덕분에 그는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BC 468년, 28세 때 비극 경연대회에 나와 스승인 아이스킬로스를 꺾고 첫 우승을 합니다. 그 후 그는 수많은 작품들을 썼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왕(Oedipos Tyranos)입니다.

분명히 오이디푸스 왕은 소포클레스의 비극이지만, 오이디푸스 왕이 소포클레스가 창작한 캐릭터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다른 비극작가들처럼, 소포클레스는 이미 그 당시에 널려 알려진 미토스를 희곡화했습니다. 우리는 미토스(Mythos)를 신화라고 번역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미토스는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허구의 이야기를 뜻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토스가 희곡화되면 어떤 변용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 비극은 하루 동안 한 장소에서 일어났던 한 가지 사건을 그리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시간 장소 사건의 일치, 이것을 삼일치라고 합니다. 이렇게 길고 긴 시간 동안 여러 장소에서 일어났던 미토스(이야기)를 하루 동안 한 장소에서 단일한 사건 안에서 담아내기 위해서는 희곡적 장치들이 필요합니다.

자, 예를 들어 볼까요? 오이디푸스 왕의 신화는 사실 2대에 걸쳐 코린스, 델피, 테베 지역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연대기 순으로 사건을 기록한 오이디푸스왕의 미토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는 젊은 시절 자신의 친구 펠로포스의 어린 아들 크립시포스를 강간합니다. 크립시포스는 강간당한 수치심을 못 이겨 자살하고. 아들을 잃은 펠로포스는 라이오스에게 너는 아들 손에 죽게 될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시간이 흘러 라이오스는 테베의 왕이 되고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라이오스는 델피에 신탁을 묻자 만약 그가 아들을 갖게 되면 그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습니다.

신탁을 받은 후, 라이오스는 아내 이오카스테를 멀리합니다. 그러자 이오카스테는 남편에게 술을 먹이고 그를 유혹합니다. 그리고 열 달 후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신탁이 두려웠던 라이오스는 태어난 지 사흘 밖에 안 된 아들의 두 발목에 구멍을 내서 묶은 다음 양치기를 시켜 키테론 산에 버립니다. 이로써 라이오스는 결혼과 아이들의 수호자인 헤라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 http://bama.ua.edu/~ksummers/cl222/oedipus.jpg 

그러나 왕의 명령을 받은 양치기는 아이를 버리지 못하고 그를 코린스의 양치기에게 넘깁니다. 그 후 코린스의 양치기는 그 어린 아이를 자식이 없는 코린스의 왕 폴리보스에게 바칩니다. 폴리보스 왕은 아이의 부은 발을 보고 그에게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오이디푸스는 활기찬 붉은 머리에 자신만만한 청년으로 자라납니다. 어느날 오이디푸스는 연회에 온 손님들에게 주어온 아이라는 놀림을 받습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오이디푸스는 델피로가 신탁을 청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오이디푸스는 그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신탁을 받습니다. 그 신탁을 받은 후, 오이디푸스는 코린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북쪽으로 방랑의 길을 떠납니다.

그 즈음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커다란 문제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그가 아이를 버린 것에 분노한 헤라가 테베에 이집트의 괴물인 스핑크스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스핑크스는 여자의 얼굴과 사자의 몸과 뱀의 꼬리와 독수리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명한 예언가 테이레시아스는 라이오스 왕에게 헤라의 용서를 비는 제물을 올리라고 경고 합니다. 그러나 라이오스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다시 한번 델피에 신탁을 받기 위해 남쪽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운명은 이 아들과 아버지를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없는 좁은 협곡에서 만나게 만듭니다. 라이오스의 부하들이 오이디푸스에게 길을 비킬 것을 명합니다. 오이디푸스에 마음 깊은 곳에서 웬지 모를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는 라이오스에게 길을 비켜주기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라이오스는 채찍으로 오이디푸스의 머리를 때립니다. 분노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인지도 모르는 채, 아버지와 그의 부하들을 죽입니다. 라이오스가 죽은 후, 테베는 이오카스테의 오빠 크레온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한편 스핑크스는 테베 도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피시움 언덕에서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던집니다. 사람들이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스핑크스는 그를 죽여 언덕 밑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아무도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기 때문에 피시움 언덕 밑에는 시체들이 쌓여만 갔지요. 그 죽은 사람 가운데는 크레온의 아들도 있었습니다. 스핑크스에게 아들을 잃은 크레온은 스핑크스를 무찌르는 사람에게 나라와 왕비 이오카스테를 주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테베에 온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찾아갑니다. 스핑크스는 두발로 서기전에 네발로 걷고 그런 다음 세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는 수수께끼를 내고 오이디푸스는 그것은 인간이라고 답합니다.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자 스핑크스는 수치감을 느껴 스스로 언덕 아래로 몸을 던집니다. 스핑크스를 물리친 오이디푸스는 크레온의 약속대로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고 테베의 왕이 됩니다. 그 후 그는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네 명의 자녀를 둡니다.

시간은 흘러, 오이디푸스가 테베의 왕이 된 지 18년이 되던 해, 갑자기 테베에 역병이 돕니다. 역병이 신의 분노 때문이라고 생각한 오이디푸스는 크레온에게 델피에 가서 신탁을 받아오라고 시킵니다. 델피에서 온 신탁은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찾아 처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찾기 위해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부릅니다. 테이레시아스의 예언과 오이디푸스를 버린 양치기의 증언을 통해,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라이오스의 살해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찌릅니다.

오이디푸스 왕의 미토스는 몇 십 년에 걸쳐 테베 델피 코린스에서 일어난 복잡한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이와 달리, 오이디푸스가 왕이 된지 18년 되던 해, 테베의 왕궁에서,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의 살해자라는 것이 밝혀지는 단 하나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이디푸스 왕의 미토스는 파블라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을 희곡화한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플롯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토스(파블라)가 희곡(플롯)화 되면서 생기는 변용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보다 자세하게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그럼 아무쪼록 좋은 한주일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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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30 07:26 2007/06/30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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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기행4] 오이디푸스, 운명(Moira)와 미덕(Arete)사이에서
번호 212010 글쓴이 류가미(ryugami) 조회 3858 등록일 2006-12-29 08:32 추천374 톡톡2

오이디푸스, 운명(Moira)와 미덕(Arete) 사이에서

 

 

 

안녕하세요. 류가미입니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있습니다. 날씨가 추우니까 마음까지 움츠러듭니다. 더군다나 댓글 붙는 것 보면 시베리아에 혼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몇몇 댓글에는 답변을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잘못하면 연재글이 너무 개인적인 푸념으로 바뀔까 싶어 참았습니다. 원래 푸념이라는 것은 한번 늘어놓으면 굽이굽이 아홉 곡절이거든요.

어쨌든 저는 이번 연재가 독자들과 의사소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갑자기 댓글 다는 것이 어색하더라도 반응이 없어 뻘줌해하는 절 생각해 댓글 달아주세요.

이번 시간에는 지난 번 시간에 이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오이디푸스 왕의 미토스(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소포클레스가 자신의 희곡에서 오이디푸스 왕의 미토스를 어떻게 배치했는지 살펴볼까 합니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의 왕궁에서 시작됩니다.

▲ 1958년 하르케 극장(Hartke Theatre)에서 공연된 오이디푸스 왕 http://drama.cua.edu/HartkeSeason/Archive%20Photos/images/oedipus%20rex%201958_jpg.jpg 

1. 테베의 시민들이 테베 왕궁으로 찾아와 오이디푸스에게 전염병을 해결해달라는 탄원을 합니다.

2. 그때 전염병의 원인을 물으러 간 크레온(이오카스테의 오빠)이 테베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크레온은 오이디푸스 왕에게 역병을 없애려면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추방하라는 신탁의 내용을 전합니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이제껏 찾지 못했는가하고 의아해하고, 크레온은 당시 스핑크스의 혼란 때문에 제대로 살해자를 찾지 못했노라고 답변합니다. 그러자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던 자신이 이 문제도 풀겠다고 장담합니다.

3.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찾기 위해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부릅니다. 오이디푸스는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라이오스의 살해자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늙은 예언자는 좀처럼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오이디푸스가 집요하게 추궁하자 예언자는 라이오스를 죽인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오이디푸스는 크레온과 테이레시아스가 공모해 음모를 꾸민 것이라 의심하고 분노합니다.

4. 바로 그때 이오카스테가 등장해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살해자가 아니라고 안심시킵니다. 그녀는 먼 옛날 라이오스가 자신이 아들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그녀가 낳은 아들을 버렸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라이오스의 버려진 그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입니다.

5.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가 아이를 버리라고 시킨 양치기를 찾으라고 명령합니다.

6. 그때 오이디푸스에게 코린스에서 전령이 찾아옵니다. 그 전령은 코린스의 폴리보스 왕(오이디푸스를 길러준 아버지)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 전령이 바로 테베의 양치기에게서 버려진 오이디푸스를 받아 폴리보스 왕에게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전령은 오이디푸스가 폴리보스의 왕의 친아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7. 그때 오이디푸스의 부하들이 라이오스의 명령을 받았던 양치기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양치기가 라이오스 왕의 부탁을 받고 어린 오이디푸스를 죽이려다가 죽이지 못하고 다른 양치기(다시 말해, 코린스에서 온 전령)에게 넘겨주었다고 말합니다.

8. 모든 것이 밝혀지자,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살을 합니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됩니다.

9. 오이디푸스는 크레온에게 라이오스의 살해자인 자신을 추방시켜 달라고 부탁합니다.

▲ 소포클레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소크라테스 http://faculty.maxwell.syr.edu/gaddis/HST210/Oct9/Socrates%20Bust.jpg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 궁전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한 나절 동안의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한나절 동안에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 2대에 걸친 사연들이 모두 압축되어 있습니다.

드라마투르기(희곡 작법)는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은 주제에 따라 재구성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드라마투르기는 플롯을 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2500년이 지난 지금 봐도 대단한 드라마트루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 작가라도 오이디푸스 왕의 신화에서 이만큼의 플롯을 짜내기는 힘들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시학’의 제7장에서 어떻게 비극의 플롯을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작가의 의도대로 이야기를 재배치하는 플롯이야 말로 비극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합니다. 그는 비극의 플롯은 발단과 전개와 결말의 구조를 가져야 하며 이 과정이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야 재현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박진감을 높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훗날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고전주의 비평가들과 극작가에게 영향을 주어 삼일치 법칙(tree unites)으로 정립됩니다. 삼일치 법칙에 따르면 희곡은 하루 동안, 한 가지 장소에서 한 가지 플롯만을 다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러한 삼일치 법칙은 어색하기 그지없습니다. 사실 이러한 삼일치 법칙은 고전주의가 유행했던 17세기 프랑스나 이탈리아 연극에서나 지켜졌을 뿐입니다. 18세기 극작가였던 셰익스피어만 해도 이러한 삼일치 법칙은 가볍게 무시합니다. 삼일치 법칙에 대해서는 17세기 고전주의를 다룰 때 자세히 하기로 하고 이제 다시 오이디푸스 왕으로 돌아가 봅시다.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 동안 공연되었던 비극이 다루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승과 몰락의 주기입니다. 봄에 싹이 텄다가 겨울에 이우는 한해살이 식물처럼 인간들도 그 상승과 몰락의 주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피할 수없는 주기를 우리는 흔히 운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 요즘 말로 하면 인간의 자아는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몰락과 소멸에 저항합니다. 정신분석학자 융은 ‘심리학과 연금술’이라는 책에서 운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운명이라는 것은 악마적인 의지를 말한다. 꼭 운명이 내(ego) 의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운명이 자아와 맞설 때면 사람들은 운명 속에 담긴 신성하거나 혹은 악의에 찬 힘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 운명에 굴복할 때 운명은 신의 뜻이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운명과 희망 없는 지긋지긋한 싸움을 벌인다. 그럴 때 우리는 운명 안에서 악마를 본다.

사실 고대 그리스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는 신의 뜻 다시 말해 운명을 거스르는 오만함(Habris)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 동안 공연되었던 수많은 비극들 중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이 작품이 결국 질 수밖에 없는 운명과의 싸움을 벌이는 인간의 의지와 미덕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미덕(arete)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자질을 뜻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탁월한 장점을 이용해 운명에 굴종하지 않고 삶을 개척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는 신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용서할 수 없는 죄지만 동시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미덕(arete)입니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 자신의 탁월한 장점으로 삶을 개척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운명의 각본 속에 빠져들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탁월함 자체가 그의 운명을 이루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스핑크스와 맞서서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의 탁월한 자질이 그를 파멸로 몰아갑니다. 만일 오이디푸스가 의문의 핵심까지 파고들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도 풀지 못했을 것이고 동시에 그렇게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갈 출생의 비밀을 캐려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에게 ‘바로 당신의 미덕(arete)이 당신에게 재앙을 가져온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 소크라테스에 대한 기록을 남긴 플라톤 http://www.mala.bc.ca/~mcneil/jpg/plato.jpg  

디오니소스 축제 때, 사람들은 비극을 보면서 인간의 미덕으로도 어쩔 수 없는 저 커다란 운명의 힘에 순종할 것을 배웁니다. 그러나 소포클레스(BC494~BC406)와 거의 동시대에 아테네에 살았던 소크라테스(BC469~BC 399)는 이러한 운명주의적인 시각을 거부합니다. 그에게는 운명보다 미덕이 더 중요하고 신보다는 인간의 영혼(psyche)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소포클레스에 비해서 세속적인 복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소포클레스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페르시아와 맞서 승리했던 페리클레스 시대에 전성기를 보냈다면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도시들이 서로 다투던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대에 전성기를 살았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아버지가 부유한 무기 상인이었다면 소크라테스의 어머니는 아이 낳는 것을 도와주는 산파였습니다.

소포클레스가 빼어난 미남으로 배우로서 인기를 끌었다면 소크라테스는 당대에 가장 못생긴 추남 중에 하나로 손꼽혔습니다. 소포클레스와 소크라테스가 가장 극명하게 차이 나는 점은 소포클레스가 아테네의 민주주의 아버지 페리클레스 밑에서 공직을 맡았다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불경죄로 기소되어 독약을 먹고 죽었다는 것일 겁니다.

죽을 때까지 소크라테스는 책을 쓴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그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들입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주변인물들의 기록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기록들 가운데 누구의 것을 얼마만큼 믿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를 만든 것은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생전에 30편에 이르는 책을 썼는데, 그 책들은 단 한편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사람들이 묻고 답을 하는 희곡 형식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그의 희곡 형식의 글들은 대화편(對話篇, dialogues)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플라톤의 대화편의 주인공은 바로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서의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고 어디까지가 플라톤 자신의 이야기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을 구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어쨌거나 플라톤의 철학을 요약하는 키워드는 아레테(arete), 프시케(psyche) 그리고 이데아(idea)입니다. 아레테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한 사람이 가진 탁월한 자질, 미덕을 말합니다. 프시케는 흔히 영혼으로 번역되는데 요즘말로 하면 자아(ego)라는 말에 더 가깝습니다. 이데아는 만물의 원형이 되는 관념적 실재입니다.

플라톤은 육체(소마)와 영혼(프시케)을 나누고 육체보다 영혼에 더 강조점을 찍습니다. 그리고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을 더 확장해, 육체적인 감각에 의해 지각(知覺)되는 현상세계와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이데아의 세계를 분리시킵니다. 그에게 있어서 육체를 통해 감각되어지는 세계는 진짜 세계가 아닙니다. 그에 따르면 참된 세계는 이성으로만 파악되는 이데아의 세계입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탁월함이 바로 인간의 이성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인간의 미덕은 곧 인간의 이성을 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인간의 미덕은 이성을 발휘해서 감각이 주는 착오에서 벗어나 이데아의 세계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인간의 이성을 신적인 원리(Logos)와 동일시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은 신적인 원리이자 동시에 인간적인 미덕이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플라톤은 인간(arete)의 미덕과 신성(Logos)을 대치시키지 않습니다.

반면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의 말년을 그린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에 순종하며 대지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소포클레스는 인간과 신의 화해는 인간이 자신의 미덕을 버리고 신의 의지를 쫓을 때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미덕과 신의 의지를 대치시킵니다.

어쩌면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플라톤이 레반트에서 전래되어온 도취와 망아를 강조하는 디오니소스교를 싫어하고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에 상영되는 비극을 비판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국가’에서 비극을 쓰는 시인들을 국가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펼칩니다. 아테네에서 추방이라는 오늘날에 정치적 망명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이 비극을 쓰는 시인을 추방하라고 한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자 다음 시간에는 왜 플라톤이 시인 추방론을 펼쳤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까 합니다.



ⓒ 류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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